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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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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 달러와 약 160만 관객. <아이언맨>의 개봉 첫 주말 미국과 국내 스코어란다. 뚜껑을 열자마자 순제작비 1억 4천만 달러를 뽑고 이제 이익만 남기면 된다. 이 정도면 지난달 16일, 주연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내한이 남부끄럽지 않을 수준이다. 바야흐로 할리우드 블록터스터의 시즌, 여름 시장의 막이 올랐다.

국내 스코어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 맞붙은 한국 영화 <가루지기>와 <비스티 보이즈> 모두 청소년 관람불가였다. 또한 두 작품 모두 상업 영화다운 흡입력도 약했다. 2, 3일엔 촛불집회에 참석한 서울 관객들의 일탈(?)도 별 도움이 안 됐단 얘기다. 한쪽에서는 '쇠고기 재협상'을 외쳤지만 한쪽에서는 영화관으로 향했단 뜻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리우드 영화들의 여름스케줄은 화려하다. 비가 조연으로 활약한 <매트릭스> 시리즈 워쇼스키 형제의 <스피드 레이스>가 다음주, <나니아 연대기> 속편이 셋째주, 22일엔 무려 <인디아나 존스> 4편이 버티고 서 있다.

그런데 속편도 아니고, 톱스타가 출연하지도 않은 <아이언맨>이 이렇게 장사가 될 물건 이냐고? <아이언맨>은 매끄럽고 재미있다. 볼거리도 <트랜스포머>의 '떼거리' 로봇에 비하면 수적으로야 달리지만 집중도와 질적인 면에서 뒤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영악하다. 정치적 중립을 내세운 채, 미국적인 물신주의와 테크놀로지를 만방에 과시하는 매력적인 수퍼히어로 시리즈가 탄생했다. 점점 더 똑똑해지고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 그 중에서도 올 해 스타트를 끊은 <아이언맨>의 전략을 거들떠보도록 해보자.

고민 없는 자본주의형 수퍼 히어로, 토니 스타크

주인공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는 전세계를 통틀어도 남부러울 게 없는 남자다. 최고의 갑부고 최대 군수업체 CEO에다 '초딩'때 MIT를 수석 졸업한 천재 과학자다. 재능과 부는 물론이요, 얼굴도 잘생겼고 유머감각까지 겸비했다. 날씬한 기자를 필두로 할리우드 배우 뺨치는 여자들이 줄을 서고 비서는 재색을 겸비한 버지니아(기네스 팰트로우)다. 이만하면 역대 최강이다.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도 갑부지만 가상공간인 고담시티에 처박혀 있으니 현실감이 떨어진다. <수퍼맨>의 클라크는 신문기자, <스파이더맨>은 가난한 고학생, <엑스맨>은 천대받는 돌연변이들이었다. 21세기 미국에 발을 딛고 선 <아이언맨>은 시작부터 현실감으로는 역대 최고다. 초반부 그의 화려한 이력을 훑고 지나가는 연결 화면과 단 몇 신을 위해 마이애미의 절벽에 지어진 저택이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쨌건 무기 홍보차 아프가니스탄으로 당도했다가 게릴라 조직에 납치되는 스타크. 신무기를 만들어내라는 주문을 살짝 무시한 뒤 게릴라 군의 미사일을 조합, 가공할 무기인 철갑 수트를 발명한 뒤 가뿐히 탈출에 성공한다. 심각한 부상은 인공심장으로 대신 한 채.

다음은 일사천리다. 납치 사건으로 무기의 해악을 깨달은 스타크는 군수 산업을 접겠다고 선언하고 마니아다운 기질을 살려 스스로 철갑 수트의 업그레이드에 착수한다. 말 그대로 자기 손에서 탄생한 수퍼히어로 되겠다. 그 후 새롭게 나타난 악당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비서 버지니아와의 사랑을 확인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다.

<아이언맨>의 강점은 무엇보다 토니 스타크라는 캐릭터의 새로운 면모다. 만인이, 그 중에서도 특히 틴에이저들 남성들이 부러워할 이 모든 걸 가진 남자는 물론 어떠한 고민도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총아답게 마음먹은 걸 실행하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다.

<배트맨>의 선과 악에 대한 존재론적인 고민도 없다. <스파이더맨>의 영웅의 책임론도 간단히 무시한다. '돌연변이' <엑스맨>처럼 마이너리티적인 시선은 더더욱 없다. <수퍼맨>처럼 외계인은 더더욱 아니다. 초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최첨단 기술과 무지막지한 자본으로 스스로의 재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케이스다.

게다가 이 친구는 회개까지 한다. 전쟁과 무기의 해악을 스스로 깨닫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군수산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피랍으로 인한 심경의 변화가 온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사업을 자기 스스로 해체하는 수준은 아니다. 더욱이 군수산업체가 '스타크 기업' 하나만은 아니지 않는가. 회개치고는 단순명료한데 자신이 만든 무기는 미국만이 쓸 수 있다는 논리 정도랄까.

적에 대한 선긋기도 명징하다. 공격은 아프가니스탄에 본거지를 둔 게릴라들. 삽시간에 날아가 난민들을 괴롭히는, 바로 자신을 납치했던 그들을 간단히 제압한다. 구소련의 아프간 침공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지원하며 탈레반을 키워냈던 역사를 곱씹어 본다면 "하필 또 아프가니스탄이냐"란 푸념이 들리는 듯하다.

진짜 적은 액션영화의 관습과도 같은 내부의 적이다. 아버지 세대부터 회사를 떠받쳐 왔던 간부가 그의 뒷통수를 친다는 전개인데, 이게 또 군수산업의 백전노장과 맞서는 궤적을 그리는 셈이다.

여기에 그를 돕는 친구는 미 공군의 엘리트 장교. 이쯤 되면 스타크는 군대의 조력과 군수산업체 그리고 과학기술을 겸비한 가장 세속적인 파워를 자랑하는 수퍼히어로가 아닐 수 없다. 초능력도 없는 군수 산업체 회장이 회개하여 악을 물리친다는 무겁지 않을 만큼의 현실성과 과시하는 듯한 정치적 중립성의 영웅 말이다.

똑똑해진, 성인 취향의 <트랜스포머>

이 영화를 보고 <트랜스포머>를 떠올렸다면, 그건 스타크의 철갑 수트 변신 능력이 로봇의 그것을 닮아서만은 아니다. 주인공 스타크의 지적 수준이 아닌 사고 수준이 딱 <트랜스포머>의 고딩 샘(샤이아 라보프)를 닮았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샘이 안드로메다에서 도착한 로봇들과 짝패를 이룬다면, 스타크는 손수 제작한 초강력 무기를 장난감으로 사용한다는 차이만 있을 뿐.

예전의 수퍼히어로들에서 고민을 걷어낸 <아이언맨>은 로우틴(10대 초중반) 남자 아이들이 환호한 변신 로봇에 대한 감흥을 화려한 CG 화면으로 구현하는데 공을 들인다. 초능력에도, 안드로메다에서 찾아온 로봇의 도움도 받지 않고 우주까지 홀로 비행하고, F-16 전투기와 전투를 벌이는 판타지적 쾌감 말이다.

<아이언맨>은 분명 좀 더 성인 취향의 <트랜스포머>다. 게다가 내용 전개의 허술함으로 인해 빈축을 사야했던 <트랜스포머>보다 전통적인 영웅의 탄생 구조와 스피티한 전개를 취함으로써 앞으로 2, 3편이 나올 근간을 이미 마련했다. 연기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캐스팅은 그래서 더더욱 탁월하다. 가벼울 수 있는 캐릭터에 신뢰감을 부여한달까.

원작은 <스파이더맨> <엑스맨> <헐크> 등의 캐릭터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 수퍼히어로물의 양대 산맥 마블코믹스. <아이언맨>은 마블코믹스가 제작사를 차리고 직접 제작한 첫 번째 영화다. 1963년 처음 선보인 이 만화 캐릭터가 마블코믹스 영화사의 효자 종목이 될성싶다. 벌써 미국 영화 사이트에서는 속편이 결정됐다는 소문이 들려오는 중이다.

60년대의 만화를 현실적으로 치환하면서 정치적 중립성을 어기지 않는 영민함. 그리고 무엇보다 SF 액션의 기본에 충실하며 가벼움과 볼거리, 유머를 황금비율로 조율하는 대중적인 세공술. <아이언맨>은 코엔형제를 비롯한 미국 독립영화 진영의 세력들 못지않게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들도 똑똑해졌다는 자신감 넘치는 증명서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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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기로 흥한 자의 개과천선...? 아이언맨(IRON MAN)

    Tracked from 라디오키즈@LifeLog  삭제

    매년 여름 극장가는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헐리우드 블록 버스터의 출현과 함께 달아오르곤 한다. 그런 와중 우리를 찾아온 첫번째 블록 버스터 아이언맨(IRON MAN)은 마블 코믹스 사단의 초인으로 다분히 시리즈물이 될 가능성을 보여준 흥미있는 오락 영화. 줄거리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세계적인 군수 업체를 이끄는 토니 스타크. 그는 일찍부터 발휘하기 시작한 천재성과 쇼맨쉽으로 전형적인 억만장자의 삶(한량?)을 살고있다. 그러던 중 아프가..

    2008/05/08 16:31



5월 5일 어린이날이 지남과 동시에 영화제를 찾은 많은 사람들이 썰물같이 빠져나갔다. 지난 3일부터 이어지던 기나긴 휴일에 자녀들의 손을 잡고 영화관을 찾은 부모들, 그리고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봄을 만끽하는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주말을 이용해 영화제에 다녀간 수많은 게스트들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출근, 혹은 등교를 위해 전주를 비운다. 전주영화제의 열기가 절정에 이르렀고, 일정의 반을 훌쩍 넘기는 중간 지점에 위치했던 지난 주말은 그야말로 북적거리는 두터운 열기가 머리를 멍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다소 뜸해진 전주는 여전히 영화제의 열기가 식을 줄 모른다. 지난 주를 시작으로 매진에 매진 행렬을 거듭하던 상영관 사정은 꿀 같은 휴일이 끝나며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길거리는 다시 노란색 옷을 맞춰입은 지프지기들로 뒤덮였다. 하지만 좋아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일찍 상영관을 기웃거리는 영화광들의 모습은 어제도 오늘도 변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로 뒤섞여진 주말에는 볼 수 없었던 반가운 얼굴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어떤 영화가 재밌었더라, 이건 끝내주는 걸작이다, 이 영화는 전작보다 못 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각자가 보았던 영화에 대한 간평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문득 전주가 슬슬 아쉬워진다. 거리에서 안면이 있는 분들을 만나 커피라도 나눠마시며 막 보고 나온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서울에선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언제나 이런 순간이 소중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가슴이 뛴다. 매년 느낄 수 있는 열기지만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열기는 아니다. 평소 말을 걸어보고 싶었던 사람들 옆에 가만히 앉아서 한 두 마디를 건네보기도 한다. 그들과 이야기 나누고 영화를 보는 하루는 24시간만으로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지난 4월 제 9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상영작이 발표되기 한참 전, 이미 굵직한 줄기는 홈페이지의 메인에 올려져 있었다. 해마다 전주영화제가 열리는 시간이 찾아오면, 나는 의례적으로 회고전과 특별전의 감독이 누구인지부터 펼쳐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물론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으므로, 거의 아무 정보도 열려있지 않은 전주국제영화제 홈페이지를 열심히 새로고침해가며 눌러댔던 나날이 얼마나 되었던지. 그러던 와중에 벨라 타르의 이름을 읽은 것이다.

벨라 타르는, 거스 반 산트가 오마주를 바친 감독으로 이미 동시대의 수많은 감독들에게 찬사를 받고 있는 영화인이다. 전주국제영화제가 첫 번째 선을 보일 때 벨라 타르의 <사탄 탱고>를 상영했었고, 당시 심야상영이었던 영화에 대한 호평은 끊이지 않았다. 물론 2000년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내가 <사탄 탱고>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말로만 듣던 전주의 소식을 뒤로하고 고등학교에 올라와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러닝타임 7시간'을 자랑하는 <사탄 탱고>를 어둠의 경로를 통해 잠시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어줍잖게 만났던 <사탄 탱고>는 결과적으로 내게 갈증만 더해준 꼴이 되었다. 그때 나는 <사탄 탱고>를 스크린으로 보지 않으면 제대로 감상할 수 없다는 생각에 못을 깊게 박았다.

때문에 이번 전주영화제에 벨라 타르의 주요 작품들을 포함한 거대한 상영에 <사탄 탱고>가 들어있었으니,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이 앞섰다. <사탄 탱고>의 상영 시간동안 서 너 개의 영화를 챙겨볼 수 있었겠지만, <사탄 탱고>가 상영되는 단 하루, 5월 6일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 영화를 다시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난생 처음 접하는 벨라 타르의 다섯 편의 영화에 그토록 시끌벅적했던 어린이날이 지나가는 줄도 몰랐다. 5일 저녁 <베크마이스터 하모니즈>를 관람하고 상영 후 조촐한 술자리에 참석하고 나서인 화요일 아침, 멍멍한 머리를 가라앉히고 '결전의 날'이 왔음을 실감했다.

<사탄 탱고>의 상영시간은 약 7시간 정도로, 영화 상영 도중 두 번의 휴식시간이 설정되어 있었다. <사탄 탱고>의 상영을 몇 분 앞둔 전주 CGV 앞 휴식공간에는 벌써부터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사탄 탱고> 하나만을 보기 위하여 서울에서 전주까지 달려온 영화의 동지들도 적지 않았다. 모두가 상기된 얼굴로 영화 상영 시간을 기다렸다. 긴 상영시간에 대비해 눈을 부릅뜨며 쓴 커피를 홀짝이는 친구도 있었다. 혹 영화를 보다가 졸지는 않을지, 뛰쳐나가고 싶지는 않을지에 대한 농담을 주고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렸다. 상영관 앞에서 서성이는 사람들의 소망은 딱 하나, <사탄 탱고>의 상영에서 살아남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벨라 타르는 흑백을 사랑해 언제나 영화에 색을 입히는 것을 꺼리는 감독이다. 벨라 타르의 이런 개인적인 기호는 <사탄 탱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검은 색과 흰 색의 대비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내야만 하는 신비스러운 흑백필름의 미학을 감독은 꿰뚫고 있었다. <사탄 탱고>는 분명히 원작이 존재하는 영화였으나, 원작만큼의 내러티브를 기대하기는 힘든 작품이었다. 여러 가지의 챕터로 구성되어 등장인물들의 순환을 바꿔가는 영화에서 주된 내용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쉽게 말하자면 <사탄 탱고>는 인과응보, 혹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인 틀 만을 바라보았을 때 나올 수 있는 너무나도 간단한 이야기다. 영화는 식상한 표현을 앞세워 말하자면, '인간의 인생은 복잡하다'라는 식의 화두를 던져놓고 꼬인 상태의 문제를 풀어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의 현상이 던져지고, 그것을 둘러싼 마을 주민들의 일상은 장조에서 단조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마치 오래된 헛간의 거미줄이 솎아내기 힘들 정도로 얽혀있듯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을 창조해낸다. 그들은 '주점'이라는 공간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며 천천히 리듬 속으로 몸을 던진다. 탱고의 12스텝을 토대로 6스텝은 앞으로, 6스텝은 뒤로 발걸음을 옮기며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극한의 공간을 노래한다. 말하자면 '사탄 탱고'는 잿빛 아코디언과 검은 색 피아노가 노래하는 세상의 끝, 인류의 바닥을 달리는 변주곡이다.

상영 시간이 긴 영화들은 대부분 많은 사람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그러나 소문을 통해 물리적인 시간성만으로 알려진 영화들이 모두 좋은 것은 아니다. 러닝 타임이 극에 달하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긴 시간 만큼 허점이 보인다는 평을 얻고 있지만, <사탄 탱고>는 이런 영화들과 별개다. 두 번의 휴식시간, 그리고 한정적인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비참한 아름다움은 단 한순간도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는 마법의 시간을 선사한다. <사탄 탱고>의 엔딩 직후 감독과의 대화에서 쏟아지는 질문의 홍수에 동참하며, 같은 마음으로 <사탄 탱고>를 기다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는 확신은 '영화 완주'의 쾌감을 극대화시키기에 충분했었다. 오후 두 시에 시작한 영화는 휴식시간과 감독과의 대화 시간을 포함해 11시가 넘어서야 가까스로 막을 내렸다. 하루 종일 상영관에 틀어박혀 벨라 타르 특유의 어두운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대하는 바깥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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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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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그러니까 1980년대 초반, 신한은행이 반포에 첫 영업점을 개설했을 때의 일인데, 이 지점 은행원들이 어찌나 친절했던지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세상일이 다 그렇듯 과유불급이라, 이 친절함이 문제에 봉착했다는 얘기다. 국내 유수의 여성단체 회장이 이 지점에 처음 방문해서 본 광경, 즉 손님이 들어올 때 마다 전 행원이 일어나 머리를 90도로 조아리면서 “어서 오세요”를 외치는 모습은 낯설음을 넘어 거부감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소위 유명인사라는 나 같은 사람도 과도한 친절에 적은 돈은 감히 예금할 엄두가 나질 않는데, 서민들이야 오죽하겠느냐”고 적당한 친절을 은행장에게 주문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뜬금없이 은행이야기를 꺼낸 것은 서비스업의 과잉친절이 때론 부담스럽다 못해 짜증까지 유발할 경우가 많음을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극장에 관한 이야기다.

얼마 전 꼭 봐야 할 영화가 있어 멀티플렉스를 찾았던 적이 있다. 길이 막혀 상영시간에 임박해서 허겁지겁 도착하고 말았는데, 문제는 매표창구에서 벌어졌다. 다름 아닌 매표직원이 표를 쥐고는 갖은 설명을 해대는 바람에 하마터면 영화의 시작을 놓칠 뻔 했다는 것이다. (물론 일찌감치 도착하지 못한 나의 책임도 크지만) 촉박한 시간을 감안해 조금 빨리 처리했더라면 상영관까지 달리기를 하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멀티플렉스가 이 땅에 들어 온지 10여 년이 되었다. 강남의 대기업 극장체인을 중심으로 시작된 것이 이제는 유서 깊은 강북의 극장들까지 옷을 갈아입는 지경에 이르렀다. 멀티플렉스가 보여준 이전 시대 극장들과의 확연한 차이점은 복합문화공간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서비스의 질적 향상에 있다. 단관 개봉시절, 매표소 직원을 비롯한 극장 종사자들은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 사실이다. 반면 멀티플렉스 직원들은 조직적으로 훈련된 서비스정신을 바탕으로 웃음을 얼굴에서 지우지 않는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가장 큰 덕목은 친절일 테니까 말이다. 비단 서비스업 뿐 아니라 모든 상행위 종사자가 친절해야 함은 당연한 일일 터. 다만 도가 지나쳐서 서비스 받는 이들에게 거부감을 안겨줄 정도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옥외 매표소가 있는 강북의 몇 군데 극장을 제외하고 멀티플렉스 매표직원의 친절함은 도가 지나칠 정도이니 인터넷으로 예매하여 자동발매기를 이용하지 않는 바에는 누구라도 다음과 같은 상황을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이다.

관람할 영화와 시간을 선택한 후 매표소 앞에 서는 순간, 당신은 꼼짝없는 매표소 직원의 서비스 대상으로 포획 된다. 이제 그녀는 당신에게 원하는 좌석위치를 물어보고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확인 한 후 발매할 것이다.

“OO카드나 OO포인트 카드, OO멤버십 카드, 저희 극장회원카드 갖고 계신 거 있으신가요?” (꼭 대답해야 다음 이야기가 이어진다.) “<비스티 보이즈> 오늘 1회 11시 30분 영화 맞으신가요?” (대답하자. 바로!) “보시는 화면에서 황색 표시된 곳이 가능한 좌석인데, 이쪽 어떠십니까?” (난 맨 뒤에서 보고 싶다. 무례한 녀석들의 발길질로부터 안전하고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핸드폰 소리와 잡담에서도 비교적 평온한 자리, 맨 뒷자리를 달라)

이제 영화표가 발매기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영화표는 아직 그녀의 손에 있질 않은가. 그러므로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

“구매하신 좌석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4관 1회 11시 30분 영화 <비스티 보이즈>구요. 좌석은 R열의 왼쪽에서 세 번째 줄입니다. 또 다른 궁금한 점 있으십니까? 즐거운 영화관람 되십시오.” (네! 라고 반드시 대답하자)

그렇다고 이것으로 끝인가? 아직 더 남아 있다. 극장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팔락팔락 손가락을 흔든 후 색연필로 입장권에 하트 무늬를 그리는 퍼포먼스가 끝나야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된다. 그제야 상영관으로 향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서비스를 끝내면 아쉬울 터. 상영관 입구에서 다시 한 번 유사한 절차를 거치고서야 나의 좌석을 찾아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물론 고마운 일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이토록 친절하다니, 아무리 서비스업이라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서비스에 익숙지 못한 탓인지 몰라도 억지스러운 미소와 몸놀림으로 과잉친절을 베푸는 매표소 직원이 부담스럽다고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장광설을 견뎌야 하는 시간은 왜 그리도 길게 느껴지는지. 게다가 상영 5분전이나 상영시간 임박해 겨우 도착해서 숨 가쁘게 표를 끊는 경우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앞서 내가 경험한 사례도 이와 비슷하다. 던져도 좋고 날려도 좋으니 표를 빨리 건네줬으면 좋으련만, 세상에! 저 긴 멘트를 다 듣고서야 겨우 표를 받을 수 있다니. 융통성이란 이럴 때 사용하라고 만들어진 단어일 것이다. 친절도 원칙도 복무규정도 결국은 관객을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닐까? 그러므로 간절하게 바라는 나의 주문, 조금 덜 친절해도 좋으니 입장만이라도 빨리 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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