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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7/14 무덤까지 가져갈 단 한 편의 영화 (1)
  2. 2008/07/14 길 위에서 영화를 만나다 ① (2)

무덤까지 가져갈 단 한 편의 영화

필진 칼럼 2008/07/14 14:47 Posted by 우디79
백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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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2008 시네바캉스’의 백미는 단연 스파게티 웨스턴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 특별전’일 것이다. 돈만 있으면 우주여행도 가능해진 시대에 말 타고 총질이나 해대는 웬 구닥다리 영화냐고? 자고로 싸움의 백미는 총싸움인 법. 짤막한 권총에 유독 푸른 눈을 지녔던 프랑코 네로와 총구가 긴 권총을 소지했던 신경질적인 광대뼈의 리반 클립과 궐련을 질근질근 문 채 윈체스터를 폼 나게 돌려가며 쏘아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탄생시킨 것이, 세르지오 꼬르부치에서 시작되어 그의 후예 세르지오 레오네가 꽃을 피운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면 어떤가!

이렇듯 수정주의 서부극에 B급 감성을 버무려 독특한 영화세계를 일궈온 세르지오 레오네였지만, 그가 필생의 작업으로 여겼던 영화는 전혀 다른 형식의 것이었다. 입버릇처럼 말해왔듯이, 세르지오 레오네의 위대함은 단순히 그의 영화세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즉, B급 서부극이라 불린 레오네 영화에서나 주연일 수밖에 없었던 2류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오늘날 거장으로 군림하기까지 레오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고 레오네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레오네의 영화, 그 중에서도 그의 유작(遺作)을 필름으로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시네바캉스는 절반의 만족을 안겨준 셈이라 하겠다. 이제, 물어보자. 당신을 미치게 만드는 단 한 편의 영화가 있는가? 제목만 들어도 뛰는 가슴을 주체하기 힘든 그런 영화가 있는가. 아님 당신의 가슴을 데워줄 영화가 있기는 한 것인가.

좋은 영화란 셀 수 없이 많다. 이 무수한 영화를 전부 이야기하자면 평생 걸려도 못할 일이기에 단 한편의 영화를 고르라면 누구라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을 테지만 내겐 그리 고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최고의 영화 한 편만 꼽아보라고 할 때 주저하지 않고 꼽을 영화가 있다는 것. 정말로, 그런 영화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이 영화에 대해서 긴 얘기가 필요 있을까? 어떤 수식어로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다 할 수 있을까. 70 년대에 <대부>가 있었다면, 80년대는 바로 이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있다. 물론 90년대에 이르면 <좋은 친구들>로 그 계보가 이어진다.

「뉴욕 빈민가의 어느 식당, 한 소년이 화장실로 들어가 벽돌 하나를 조심스레 빼낸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그 구멍을 통해 옆방을 들여 다 본다. 벽 너머의 공간에서는 소녀가 발레 연습을 하고 있다. 소녀는 소년이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마치 뽐내듯 발레를 계속하고, 소년이 소녀를 좋아하듯 소녀도 소년을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소년이 나쁜 길로 빠지려 하고 있음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소녀의 걱정대로 소년은 사람을 죽이고 교도소에 가게 되었다. 옛날 옛적 미국에서...」

1920년대 경제 대공황과 금주법시대의 뉴욕 브룩클린을 배경으로, 다섯 명의 소년이 범죄자로 성장하는 과정과 이젠 도피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주인공 누들스의 과거회상을 통해 인생과 사랑, 범죄와 죽음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둘도 없는 친구였던 누들스와 맥스, 그리고 연인인 데보라를 통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배신의 인생 이야기가 애절한 엔니오 모리코네의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그려지고 있다. 여기에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 팬플루티스트인 게오르그 장피르의 주옥같은 선율이 듣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이 영화는 가히 영화도 영화음악도 모두 최고 걸작 반열에 오를 가치가 충분하다 하겠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세르지오 레오네가 평생 간직해온 ‘드림 프로젝트’였다. 70년대 후반 연출보다는 제작에 더 힘을 쏟았던 그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만들기 위해 <대부>의 연출제안을 거절했을 정도였다.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들을 통해 상당히 기묘한 스타일을 지닌 감독쯤으로 인식됐던 레오네는 이 영화를 통해 거장다운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데, 과거, 현재, 미래를 정교하게 오가면서 진행되는 사건은 미스터리하면서도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원작은 "HOODS"라는 소설로 당초 10시간짜리 러프 컷을 수정한 레오네의 1차 편집본은 6시간짜리이고 디렉터 컷(현존하는 완전한 감독 공인판)도 229분짜리 분량으로 만들어졌으나, 흥행을 고려한 제작사가 무려 89분을 잘라낸 2시간 19분짜리 필름으로 개봉시켰으니, 결과적으로 평론가들의 악평과 흥행 참패를 겪어야 했고, 10년이 지난 후에야 감독 판이 재개봉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명보극장 개봉 당시인데, 132분이라는 (지금으로서는)어처구니없는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충격과 매혹은 여전히 기억을 지배할 뿐 아니라 광적 지지자로까지 바꿔놓을 정도였으니, 단언컨대 내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단 한 편의 영화가 있다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일 것이다.

영화에는 유머러스한 장면들도 꽤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어린 창녀의 환심을 사기위해 슈크림을 사들고 찾아간 ‘짝눈’이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을 참지 못하고 야금야금 핥다가 기어이 다 먹어치우는 장면이라든지, 보석상을 턴 맥스 일당이 훗날 안주인과 재회하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그녀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장면 등은 가히 레오네 다운 발상으로 여겨진다. 사랑하는 여인보다 손 안의 슈크림이 더 간절한 소년의 심정은 얼마나 절절하던가! 또한 출옥한 누들스가 데보라와 만나 야연을 즐기던 시퀀스도 잊을 수 없으니, 이 장면에서의 대사는 이렇다. “미치지 않기 위해선 바깥세상은 다 잊어야 했어. 하지만 그래도 잊혀 지지 않는 건, 도미니크였어. 총 맞고서 ‘나 넘어졌어.’ 라고 말하던 아이 말이야. 그리고 데보라...너!”

숱한 밤, 나를 갈색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휘파람 불며 브룩클린 다리 밑을 걷던 다섯 명의 소년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제 필름으로, 그것도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판본으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니 어찌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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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

    Tracked from Pell's seer Blog  삭제

    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 - Synopsis 맥스, 짝눈, 팻시 등 뒷골목 죽마고우들을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에 35년 동안이나 시달려 온 누들스는 ‘베일리 재단’이라는 곳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초대받는다. 어린 시절, 누들스는 고고하고 아름다운 데보라가 춤 추는 것을 화장실 벽 틈새로 훔쳐본다. 술주정뱅이를 털려다 친해진 맥스와 누들스는 친구들과 밀수품을 빼돌려 돈을 버는 가운데 우정을 다져 나간다. 이들을 질투..

    2008/07/21 00:31

길 위에서 영화를 만나다 ①

그리고... 2008/07/14 14:41 Posted by 우디79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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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밟는 남도 땅은 뜨거웠다. 8월의 마지막 주, 서울에서 벗어나 경상남도 진주에서 아는 분과의 조우를 마치고 꼬박 두 시간이 걸려 전라남도의 땅을 밟았다. 단 한 번도 남도로 내려온 적이 없고 함께 여행을 하는 동행도 없던 터라 모든 것이 신기했다. 다만 입을 꾹 다물고 내리쬐는 햇빛을 혼자 대하기에는 약간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여름에는 습기와 고온으로 숨이 제법 막힌다는 남도의 더위.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곳이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내가 사랑하는 두 영화의 모든 것이 공존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청준의 단편집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두 편의 영화 <서편제>와 <천년학>은 전라남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굽이굽이 산길과 논밭을 걸어 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세월을 읊던 그들의 모습이 문득 눈앞을 가로막았다. 나의 등에 올려진 배낭과 카메라는 조금 무거웠지만 다시 한 번 신발 끈을 조이고 『선학동 나그네』, 영화 <천년학>의 배경이 된 장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십 년 인생을 풀어내는 단 하루의 저녁, <천년학>의 선자마을

보성에서 장흥으로 넘어오는 길은 험했다. 애초에 ‘걸어서 남도를 돌아다녀보자’ 라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를 조롱하듯 산길에는 버스가 아니면 지나갈 수 없도록 차도가 놓여있었다. 장흥에 도착하자마자 장흥 터미널에서 <천년학>의 촬영지로 유명한 선자마을이 있는 버스를 찾았다. 선자마을은 장흥에서 약 40분을 달려 회진에 내려 다시 30분을 걸어야만 했다.

회진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남도에 내려온 지 이틀 만에 처음으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았다. 이곳에 내려와서 느낀 것은 주민들 대부분이 나이 드신 분들이라는 것과 공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좀처럼 젊은이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방이 논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길의 고요를 뚫고 버스에서 나는 엔진소리를 들으며 버스 안을 훑었다. 큼지막한 버스에 무거운 배낭을 짊어 진 여행객 복장을 갖춘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런 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시간이 지나자 곧 고개를 돌려 당신들끼리의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버스 내에서도 역시 젊은이는 나 하나 뿐. 새삼 전형적인 시골 땅을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선자마을 가는 길이 이쪽 맞나요?”
“선자마을? 선자마을은 뭣 땜시 가려고? 아가씨, 이 더운디 거까지 걸어가려고?”
“네. 제가 선자마을에 볼 일이 있는데 방향을 잘 모르겠네요.”
“이 도로를 따라 쭉 가면 선자마을이 나오긴 하는디, 걸어가기는 좀 힘들 터인데. 가다가 사람들 나오면 또 물어보구 허라구.”





회진읍의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무작정 앞으로 걷다가 지나가시는 할아버지께 길을 물었다. 도로를 따라 쭉 가기만 하면 선자마을로 향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전라남도를 여행하면서 지도 하나 가져오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지만 길을 잃을까 걱정하는 것도 잠시, 읍내에 군데군데 놓인 표지판은 ‘천년학 촬영지’로 가는 길을 너무나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선자마을로 가는 길은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멀었다. 회진읍내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마을인줄은 알았지만 찌는 듯한 남도의 더위는 매번 앞길을 가로막으려 필사적이었다. 회색 도로에는 화물을 싣고 가는 트럭들이 질주하며 지나갔고 그 위를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십 년 전만해도 흙이 구르는 길로 범벅이었을 이 도로는 <천년학>의 동호가 선학동으로 가기 위해 지나갔던 발자국이 남아있는 길이다. 무미건조한 회색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커다란 고개를 넘어가니 쭈욱 뻗은 도로 한 켠에 작은 건물이 하나 보인다. 눈에 익은 소나무. 익숙한 산의 모양새. 이곳이 선자마을의 주막, 동호가 하루를 묵고 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풀어낸 그 주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포구에 물이 없고 나무가 저 모양인디 학인들 날라 들것소. 하긴 지 마음에 그 시절을 잡아 놓고 학이 다시 날라들기를 기다리는, 그런 한심한 인간도 있으니께.” -<천년학> 中


<천년학>에서 동호의 아버지 유봉은 어린 송화와 동호를 물이 흐르는 선학동으로 데리고 와서 선학동의 주축을 이루는 학 산을 보여준다. 학이 날개를 펼친 채 날아오르고자 하는 모양새를 그대로 본 딴 듯한 산을 보며 어린 동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선학동에 다시 찾아온 그는 변해진 선학동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며 오랜 애환이 묻은 선학골의 주막에서 평생 주막을 지키던 사내와 술잔을 기울인다.

‘촬영지’라는 간판이 크게 써 붙여진 선자마을 입구의 작은 주막의 뒤로 영화 속 동호가 느꼈던 황량함을 보여주는 곱게 포장된 도로가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회진읍에서 이곳으로 걸어오기를 한 시간. 고개를 숙이며 익어가는 벼들 사이로 지칠 대로 지친 나와 나의 배낭은 망설일 것도 없이 쉬어야만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멀리 마을이 보이고 마을로 가면 시원한 물 한 잔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여행길에서의 냉수 한 모금은 고급 음식점의 잘 차려진 식탁보다 반갑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조그맣게 보이는 마을의 모습을 한번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보고 바깥채 쉼터에 짐을 내려놓았다. 풀들만 무성한 주막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 살 법한 번듯한 집이라고 생각해 조심스레 창문을 닦으며 안쪽을 들여다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살지 않는다. 촬영이 끝나고 발길이 뜸해졌기에 먼지가 수북하게 앉은 작은 집에 지금 숨 쉬고 있는 생물이라고는 풀들을 제외한 나와 벌레들 뿐 인 듯 했다. 마을은 멀리 있고 보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바로 왼쪽에 바다가 있고 배들도 여러 척 있었지만 배 위에 올라있는 사람도, 바다를 구경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에겐 미안하지만 거미줄을 대충 휘휘 저으며 치워버리고 배낭을 베고 먼지더미로 풀썩, 몸을 던졌다.

새벽을 꼬박 지새우던 동호의 눈빛이 떠올랐다. 동호가 가진 것이라고는 그의 인생의 굴곡을 짐작하게 하는 눈빛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남도 천지를 떠돌다가 이 작은 주막에 와서 송화의 흔적을 찾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송화가 다녀갔던 곳과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몇 가지의 이야기밖에는 없었고,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술 한 잔과 묵은 김치 한 그릇이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누이 송화를 만나기 위해 그가 이곳으로 달려온 것은 아닐 것이다. 동호가 자신의 마음을 넌지시 술잔에 토해내고 있을 그 시간에 송화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몸을 바로하고 앉아 다시 주막을 둘러봤다. 한참을 누워있는 동안 주막 앞의 도로를 지나간 차는 다섯 대가 넘지 않았다. 오늘 아침 장흥근처의 찜질방에서 물을 담아두었던 물통을 꺼내들었다. 미지근하지만 그런 것을 따지기엔 햇볕이 너무 뜨거웠다. 물을 마시다보니 문득 옆에 놓여 진 뒷간이 눈에 들어왔다. <천년학>에서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시간은 단 한번 뿐이다. 주막 주인은 밤새도록 동호와의 술자리를 마치고 이른 아침 화장실로 볼일을 보기위해 몸을 옮긴다. 그가 일을 마치고 뒷간에서 나오는 바로 그 순간 동호는 차분히 앉아서 유봉이 자신에게 남긴 북을 바로 세운다. 화장실에서 빠져나오려 했던 주인 사내는 동호의 모습을 보고 황급히 몸을 숨긴다. 동호는 북을 들고 사내는 그런 그를 바라본다. 동호가 북을 치는 순간, 논으로 바뀐 황량한 벌판에는 물이 차오르고 송화는 그의 곁에서 소리를 한다. 그리고 곧, 두 마리의 학이 함께 날아오른다.





<천년학>은 ‘소리’를 아낀다. 송화의 목소리는 <서편제>에서와 같이 여전히 애절하지만 그것 자체가 마음을 움직이지는 않는다. <서편제>를 달려온 동호와 송화의 이야기는 <천년학>에서 이어지나, 사실은 그들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한을 토해내기보다는 서로를 향한 마음을 더 많이 보여준다. 송화와 동호에게 아버지였던 유봉이 가르쳐준 ‘소리’라는 것은,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길 위에서 사랑을 노래한다. 이복누이 송화를 향한 동호의 사랑, 동호를 그리워하는 송화의 마음, 그리고 그 주변에서 그저 자신의 사랑을 태울 수밖에 없던 주막 사내의 이야기가 교차할 때 선학동에는 학이 날아든다. 태풍을 맞고 을씨년스럽게 변한 소나무도, 그리고 동호가 어깨에 짊어진 세월의 굴레 또한 학이 날아오르는 그 순간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고 싶지 않게 하는 바로 이 순간은 <천년학>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한참동안 생각에 빠져 있다가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며 주막 뒤편을 가로지르는 오토바이는 얼마 달리지 않아 아까 보았던 주인 없는 배들이 있는 작은 방조제 앞에서 멈추었다. 커다란 배낭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이방인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아저씨의 시선을 뒤로하고 다시 한 번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급하게 걸어온 아까와는 달리 제법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주막 주변에는 코스모스도 피어있었고 잡초라고 살아 있는 것들에도 꽃이 피어있었다. 아까 내가 없애다시피 해버린 거미줄에 매달려 있었던 거미는 열심히 다시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동호가 다녀간 이후 이 작은 건물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기둥을 잡고 이따금씩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혹시 <천년학> 때문에 주막을 찾지는 않을까 기대하며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이곳에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될 수 있다면 내가 앉아있는 이곳에서 노을이 지는 것을 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별이 뜨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나 마음은 움직였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했다. 누군가 작고 보잘 것 없는 이 건물에서 발길을 쉽게 떼지 못하는 나를 본다면 아마도 ‘청승맞다’라고 했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마을버스도 하루에 한두 번 들어오는 것이 전부이고 지나가는 사람조차 뜸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존재하던 그들은 선자마을의 주막을 떠난 지 이미 오래다. 겉멋만 잔뜩 들은 것처럼 나도 이 주막에서 조용히 탁주에 작은 안주를 곁들여 밤을 지새우고 싶었다. 동호처럼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도 이곳에서 풀어내버린 것일까. 오늘 내에 반드시 완도로 넘어가야 하는 나의 일정과는 달리 처음 왔던 그때처럼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회진에서 선자마을로 넘어온 지 벌써 세 시간째. 입구에서 주저하는 나에게 회진으로 갈 예정이면 태워주겠다는 선한 인상의 아저씨가 요란한 트럭소리를 내며 나를 불렀다. 걸어왔던 길이니 다시 한 번 걸어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아저씨는 버스는 이미 끊겼고 힘든 일도 아니니 어서 타라며 재촉했다. 갈등 끝에 트럭에 오른 나에게 아저씨는 어쩐 일로 발길 뜸한 이 동네로 왔냐며 말을 걸었다. 트럭의 백미러로 학산이 어스름히 보였다. 이것저것 질문을 하는 아저씨와 대화를 하면서 덜컹거리는 트럭 뒤로 고개를 내밀어 슬그머니 다시 학산을 눈에 담았다.

(편집자 주: 강민영의 남도여행기는 다음 주 <서편제>의 촬영지로 이동합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기대와 열독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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