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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에게 경배를 <다크 나이트>

필진 리뷰 2008/07/24 09:42 Posted by 우디79
하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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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피로감에 있어서는 역대최강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관객의 심장을 움켜쥐고 시종일관 놔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2시간 30분이란 러닝타임은 솔직히 긴장감을 넘어 피로감을 던져줄 정도다. 간간이 터지는 유머가 그걸 상쇄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정색하고 어떤 인생에 대한 성찰과 예술에 대한 사유를 논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줄 수 있는 어떤 정점에 관한 문제다. 공들인 시청각적 쾌감과 연기 잘 하는 명배우들의 향연은 명불허전이다. 그럼에도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 모든걸 한치도 놓치지 않고 여유롭게 관장한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배트맨이 지닌 트라우마의 심리적 기원을 보여줬으니 거침없이 본론으로 직진하는 폼이 자신만만하다. 핸콕에는 비길바 못하지만 슈퍼히어로의 부작용을 몸소 체험해야 하는 배트맨의 비애가 <다크 나이트>를 아우르는 정조다.

여기에 <배트맨>에서도 그러했듯 주인공을 뛰어넘는 악역 조커로 인해 <다크 나이트>의 엔드크레딧 첫 머리는 히스 레저가 올라가야 마땅하지 않나 의아해야할 정도다. 투 페이스의 갈라진 얼굴 처럼, 그가 매번 던지는 동전처럼, 그리고 선과 악은 한끝차이라고 시종일관 이죽거리는 조커의 주장처럼 <다크 나이트>의 주제는 그렇게 고뇌해야 하는 배트맨(선)의 내면을 성공적으로 다룬다. 아, 거대한 트럭을 장쾌하게 뒤집어 엎거나 병원 건물을 단칼에 날려버리는 액션신은 보너스다.

어쨌건, 그래서 피로하다는 거다. 팀 버튼의 회화적이고 포스트 모던한 색채를 지워버리고 리얼리티 넘치는 범죄물의 정수를 추구하는 슈퍼히어로물에 미국인들은 다시금 열광했다. 이제는 <아이언맨>의 극단에 서 있는 이 <다크 나이트>에 우리가 경배를 바쳐야 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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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00%] 진짜 미쳤다. 다크나이트, 완벽해!

    Tracked from Plan9 Blog  삭제

    세명의 주인공목차1. 짧은 감상기2. 현재 상황3. 뒷이야기4. 부록1. 짧은 감상기 어제 메가박스에서 다크나이트를 보기 전까지 스파이더맨3 때와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호평받은 영웅물의 후속작이자 배우와 스텝들이 거의 그대로 다시 참여했고 팬들이 가장 선호하는 악당(베놈과 조커)이 나온다는 점이 바로 그렇다. 보고 난 뒤에 둘의 차이점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스파이더맨3는 기대한 만큼 보여줬고 다크나이트는 그 기대를 가뿐히 뛰어넘...

    2008/07/2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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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7/24 14:36
  4. 크리스토퍼 놀란 | 다크 나이트 The Dark Knight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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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편의 법칙'이 또 깨졌다.히스 레저에게 내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주어야 한다는 미국의 일부 히스 레저 팬들의 주장을 열렬한 팬들의 과장된 애정과 무작정 생떼라고만은 할 수 없다. <다크 나이트>는 배트맨보다는 조커의, 조커에 의한, 조커를 위한 영화다. 물론 이것은 팀 버튼 감독이 일찌감치 배트맨 시리즈를 유쾌하고 익살스러우면서도 어두운 웃음이 가득한 슈퍼히어로물로 만들었던 것에 도전해, 새로운 배트맨 시리즈를 볼거리가 가득하면서도...

    2008/07/24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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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부식


<놈놈놈>에 대해 억지비판을 늘어놓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렇지만 어느 인터뷰에서처럼 감독이 내러티브의 결함에 대한 비판을 그냥 무시하겠다는 식의 발언은 상당히 안타깝다. 왜냐하면 내러티브에 대한 문제제기는 비단 일부 평론가들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상당수 관객에 의해서도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스토리의 비어있음'이 스타일 혹은 시각적 쾌감이 상쇄할 뿐만 아니라 '포스트모던'하다고 까지 평가하는 분들도 있기도 하다. 일리가 있는 평가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평가야 말로 여러 가지 자가당착적인 요소를 띠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는 이런 식의 시각적 현란함과 스펙터클의 쾌락이 내러티브의 결핍을 상쇄시킬 뿐만 아니라 의도적이며 따라서 '포스트모던'한 새로운 영화라고 평가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가끔 '포스트모던'을 시각적 충동에 의한 스펙터클의 감각적 경험과 혼동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는 지극히 '나르시시스트적' 감성을 이론적 레테르로 때워보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나는 이 논란이 매우 의미 있는 담론의 장을 열어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놈놈놈>이라는 영화의 평가 그 자체와는 별도로 이 영화가 의미 있는 '대화'를 열어줄 수 있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찬탄 혹은 비난 식의 글보다는 조금 다른 시각의 글을 써보고 싶어졌다. 이하 몇 가지의 질문을 통해 스스로 생각해 볼 거리를 던져보고자 한다.

영화에서 내러티브의 불완전함은 의도적으로 비워 내거나 그것이 다른 시각적 메타포들로 인해 상징화되고 풍부해질 때 상쇄되거나 오히려 더욱 풍성해질 수 있는 것인데, 내러티브의 전개를 시각화하거나 상징화할 수 있는 미장센이 이 '결핍'들을 메워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락영화의 내러티브가 단순한 것 같지만 실제로 분석을 해나가다 보면 이 내러티브가 품고 있거나 사방팔방으로 열려질 담론의 꼭지가 상당수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디아나 존스>의 경우 '고고학'이라는 고루해 보이는 학문의 이력 아래 인간의 이성이 닿지 않는 '불가지한' 신성 혹은 초자연적 요소들을 통해 흥미를 끌고 있다. 나는 시리즈 중에서 특히 성배를 찾으러 가는 과정에서 존스가 처하게 되는 화두 같은 물음에 답하는 장면들을 영화의 백미로 기억하고 있는데, 다들 기억하듯이 무조건적인 믿음을 통해 불구덩이의 칼날들을 피하고 절벽 위에서 한 발 더 내딛는 장면들은 그래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이는 단지 보물을 찾으러가는 하나의 단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성 너머에 존재하는 신성이라는 것에 대한 접근이 매우 상징화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스타워즈>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 거대한 우주에까지 인간지평의 한계를 넓히고 선악의 대립구조를 가족신화 안에 배치하였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영화의 플롯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숨겨진 요새의 세 악인>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구로사와의 영화는 거의 모든 작품들이 셰익스피어 모티브로 분석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갈등과 비극적 운명에 대한 오마주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의 유행하고 있는 <맨>시리즈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주 단순한 선악구조로 보이지만 서브플롯과의 상관관계들을 살펴보면 그것들이 매우 유기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관객에게 호응을 얻으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맨' 시리즈의 원동력은 이런데 있다.

그런데 감독은 '평론가들은 왜 감독이 만들어낸 것에 집중하지 않고 '내러티브'에 대한 비판만을 하는가'라고 묻고 있는데 여기에서 매우 실망하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영화에서 감독이 제시한 것만을 보라는 건 매우 전체주의적 발상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영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첫 번째로 영화를 만나게 되는 관객의 한 사람인 '평론가나 기자'들은 '첫 눈'을 밟는 심정'으로 영화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뒤에 올 사람들에게 지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놈놈놈>이 불러일으키는 논란 아닌 논란을 피할 필요는 전혀 없다. 칭찬 일색의 예술영화가 흥행에 참패하는 사례를 들 필요도 없이 대중영화는 언제나 '논란' 속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담론'으로서 기능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놈놈놈>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어쩌면 아무런 저항 없이 칭찬 일색의 단순한 과정을 통해 단지 흥행작으로서 마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천만관객 이상을 동원한 영화들은 그야말로 논란 속에서 활발한 '담론'을 생산하도록 추동하는 '논란' 촉발제였기 때문이다. '동성애'담론에 대한 일정정도의 고정관념을 해체한 <왕의 남자>나 '분단이데올로기'가 단지 이데올로기일 뿐이라는 점과 그 한계를 명백히 했던 <실미도>, 한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심대한 질문을 '미국과의 굴종적 관계'라는 관점에서 담아 보냈던 <괴물> 등 모두가 한국 사회가 익히 제기했던 질문들을 극대화시켜낸 영화들이었기 때문이다. <놈놈놈>이 질문을 두려워한다면 결코 심리적 한계선인 천만관객을 돌파하지 못할 것이다. 혹시 CJ가 천만관객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말이다.

장광설이 길었다. 다시 <놈놈놈>의 내러티브 문제로 돌아가 보자. '세 놈'이 펼치는 스펙터클과 만주의 광활함이 스토리의 '결핍'을 넘어 영화의 새로운 차원을 열고 있는가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을 수 있다. 최근의 '포스트모던' 담론에 의하면 스타일 그 자체는 이야기의 내용과의 분리를 넘어 일체화된 것이며 오히려 '스타일 그 자체가 이야기'라는 새로운 아포리아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놈놈놈>은 전형적으로 포스트모던한 새로운 담론의 위대한 영화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것이 정녕 새로운 '영화'인가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아니, 어쩌면 감독 혹은 제작진의 경우 오락영화에 무슨 그다지도 많은 '의미부여'가 많은가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한다면 위의 할리우드 영화의 단순해보이지만 '신화와도 같은 내러티브' 플롯에 대한 이해가 좀 더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평론가나 기자'라는 직업이 원래 이런 일을 하는 집단이라는 점을 이해해주면 고맙겠다.

<놈놈놈>의 호쾌한 액션이 불러일으키는 '스펙터클'의 짜릿한 쾌감은 분명 한국영화에서 새로운 차원을 열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무사>에서 비롯되기 시작한 광활한 공간에 대한 욕망과 그 공간에서 펼쳐지는 '스펙터클'은 점점 한국영화에서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말이 쓰러지고 총탄이 빗발치는 장쾌한 추격씬이 펼쳐지며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평원 위의 액션 씬은 분명 '할리우드' 키드로 자라난 한국의 감독들에게 매우 유혹적인 상상일 것이다. 만주라는 잃어버린 상상의 공간에 펼쳐지는 한국적 액션의 새로운 면모를 보일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 있는 도약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 <쇠사슬을 끊어라!>가 정전처럼 여겨지는 한국영화의 만주웨스턴이 어디에서 기원했으며 한국영화사에서 어떻게 자리매김 되는지를 안다면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평가해볼 여지가 생긴다. 그것은 이 국적불명의 영화들이 한국영화의 정점에서 선보였던 수많은 장르적 퓨전 혹은 아류작 남발의 와중에서 만들어진 영화라는 점이다. 만주웨스턴이라고 불리는 <쇠사슬을 끊어라!>를 정점으로 한국영화에서 수없이 많이 만들어졌던 홍콩무협영화 아류의 영화들 그리고 무협장르의 비틀림으로서의 '만주물'들이 점차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얼마나 많은 홍콩무협물과 아류작들 그리고 장르퓨전물들이 만들어졌는지는 영화사에서 그 목록들만 들춰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숫제 홍콩영화사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은 분량의 무협물들이 만들어졌던 역사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왜 갑자기 이런 무협물들과 퓨전장르극들이 사라져버렸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체로 보아 70년 말로 접어들면서 유신독재체제의 억압은 더 이상의 '영화적 욕망'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시대적 비극을 반영하는 멜로물이 대세를 이루며 80년대의 에로사극시대로 넘어갔다는 것이 대체적 평가이다.

<쇠사슬을 끊어라!>가 한국영화에서 만주웨스턴의 정전이며 그에 따라 <놈놈놈>이 그 전통을 잇고 있다는 평가는 그런 점에서 단절적이기도 하고 연속적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런 고유의 전통이란 오직 홍콩무협 혹은 장르퓨전의 한 갈래로서 존재했다는 점에서 그런 이중적 측면이 발견된다 하겠다. 특히 <쇠사슬을 끊어라!>의 경우 세 명의 남자가 벌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비교적 뚜렷한 공통점을 <놈놈놈>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영화가 갖고 있었던 '역사적 상상력'과 '영화적 욕망'을 단지 스펙터클로서만 편취할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의미에서 새로이 부활시켜낼 수 없었는가라는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군다나 좀 더 명백히 하자면 이 스펙터클들이 다른 글에서 밝혔듯이 지독한 '데자뷔'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플롯이 성긴 내러티브에 어딘가 본 듯한 장면들이 반복되는 영화라면 도대체 이 영화를 제대로 평가해 줄 수 있는 대목은 어디란 말인가? 스탭들과 제작진들의 지난한 노고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서구웨스턴에 대한 오마주가 아닌 '흉내 내기'라면 그에 들인 공이 너무 허무해지지 않는가 말이다. 더욱이 <놈놈놈>의 시사 직후 느꼈던 소회는 이명세의 <형사> 혹은 <엠>을 보고 난 후 느꼈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매우 시각적으로 훌륭한 스펙터클과 비주얼적 쾌감을 스크린 위에 수놓았지만 도무지 심장 아래 1센티미터도 쾌락이 전이되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형사>가 제시한 퓨전사극의 무국적성이 새로운 이미지의 ‘과잉’ 속에서 전혀 녹아들지 않고 도드라지는 이상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모두들 극찬과 찬사를 퍼부어대는 속에서 이상하게 찜찜한 느낌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해 본 결과 제작한 측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것은 <형사> 때의 느낌과 흡사한 감각이었다. 이것은 무국적의 역사적 배경 아래에서 도드라지는 ‘낯선 대상’들과 익숙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이었다. '낯선 대상'들은 이종적으로 결합된 풍경들의 스펙터클과 이야기 전개에서 나타나는 공간들이었고 사라져버린 것은 그것들을 매개할 개연성과 모험과도 같은 두근거림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역사적 상상력'의 심원한 저수지들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내러티브들이 가 닿을 어떤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를 기대했으나 나는 결국 그다지 설득력도 없는 허무한 '170억짜리 맥거핀'만을 목도했다.

그에 반해 <님은 먼곳에>의 경우에는 반대로 매우 전통적 방식의 플롯을 통해 캐릭터를 복속시키는 어쩌면 매우 보수적인 스타일의 영화이다. 필자 스스로 보수적이라기보다는 진보에 가까운 영화적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놈놈놈>의 이종배합보다는 정공법의 영화가 더 마음에 드는 건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다. 아마 그것은 한국영화에서 ‘말없이 존재하는 것’들의 아우라 그러니까 역사적 상상력이 작용하는 공간에 대한 협소한 이해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인에게 만주라는 공간은 역사교과서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매우 추상적인 공간이기 쉽다. 그 공간을 배우들의 캐릭터가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려면 매우 섬세한 세공술이 필요할 것이다. 말하자면 캐릭터의 일상이 짙게 배어있는 그런 삶의 토대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만주’를 달리는 기차의 액션은 호쾌했으되 플롯의 시작으로서 ‘지도의 가치’는 그다지 크게 않았고 게다가 만주를 누비는 마적단의 ‘폼’은 트랜디한 펑크족 스타일을 닮았다. 정우성의 모습은 어느 기자의 표현처럼 ‘간지 잘잘~’이지만 그 역시 아우라를 풍기기보다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데자뷔 현상만 일으켰다. 그가 멋지다는 의견에는 토를 달고 싶지 않지만 그저 멋지기만 하다는 데에도 이견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의 스펙터클을 감싸는 아우라가 어디에서도 뒷받침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것은 무국적의 역사적 배경 아래에서 도드라지는 ‘낯선 대상’들과 익숙하고 낯익은 세계라는 ‘생활세계’의 사라짐으로 인한 아쉬움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익숙한 동시에 낯설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에 반해 <님은 먼곳에>의 경우에는 반대로 매우 전통적 방식의 플롯을 통해 캐릭터를 복속시키는, 어쩌면 매우 보수적인 스타일의 영화이며 <놈놈놈>의 이종배합보다 <님은 먼곳에>가 더 마음에 드는 건, 아마도 영화에 대한 배경을 알고 있는가, 아닌가라는 차이에서 비롯된 것인 듯하다. 아마 그것은 한국영화에서 전통 혹은 역사라는 ‘말없이 존재하는 것’들의 아우라 그러니까 <님은 먼곳에>의 경우 베트남전이라는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이 영화를 친숙하게 받아들이도록 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놈놈놈>의 낯섦은, 식민시기를 거치면서 만주라는 공간 자체가 한국인의 인식지도에서 사라져버린, 즉 한국사회의 구조적 억압과 역사적 망각에 의해 만들어진 효과일 것이다. <놈놈놈>에서 본 것이 데자뷔 현상만 일으킨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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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영

발리우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 (혹은) 발리우드에서 배우들이 살아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 인도에서는 영화배우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첫째도 춤, 둘째도 춤, 셋째도 춤. 하루가 멀다하고 신인이 쏟아지는 발리우드에서 배우로 성공하기 위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용'이다. 발리우드의 기반이 된 '마살라'영화는, 인도 영화가 존재하기 휠씬 이전부터 이어져 온 신화의 모티브를 충실히 재현한다. 때문에 발리우드 영화에서 내러티브보다 중요시 되는 것은 뮤지컬 형식의 서사다. 수 십년간 봄베이에서 제작되어 인도의 주를 이루는 영화들은 음악과 춤을 적극적으로 사용했으며, 이를 토대로 인도 영화의 가장 큰 특색을 확고히 지켜나가기도 했다. 다소 시끄럽고 정신없을 지도 모르는 발리우드의 시,청각적 특징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발리우드의 진정한 팬이라면, 마살라 무비의 기나긴 러닝타임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흡수할 수 있는 매니아라면, 2007년 인도 전역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킨 <옴 샨티 옴>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옴 샨티 옴>은 작년 충무로 국제 영화제에서도 상영한 바 있는 <메후나>의 감독, 파라 칸의 두 번째 장편영화이다. 이미 <메후나>를 통해 발리우드의 흥행 보증 수표를 확보한 파라 칸은,판을 조금 더 넓혀 아예 영화 셋트 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데뷔 시절 함께 일했던 인도의 인기배우 샤룩 칸까지 합세했으니, <옴 샨티 옴>의 볼거리는 이미 두 말하면 잔소리다.

<옴 샨티 옴>을 눈여겨 보아야할 것은 (여타의 마살라 무비와 마찬가지로) 드라마, 액션, 해피엔딩이몽땅 혼합된 진풍경에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앞서 지금까지 주의깊게 보아온 발리우드 애호실력을 맘껏 뽐내게 한다는 데 있다. 한국의 경우, 현대와 계약을 맺어 국제적 홍보대사로 급부상 중인 인도가 사랑하는 '섹시 배우' 샤룩 칸은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역할, 다시 말해 '슈퍼 스타'의 연기를 놀랠만큼 능청스레 소화해낸다. 다부진 몸과 어떤 동작도 어렵지않게 해내는 춤 실력이 가세하니, <옴 샨티 옴>의 최고 흥미점은 '세 시간동안의 샤룩 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옴 샨티 옴>의 재미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내러티브가 진행될 동안 계속해서 발리우드 까메오들의 출연이 이어지는데, 이것은 중후반에 이르러 절정에 치닫는다. 극 중 '옴(샤룩 칸)'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직후의 시상식 파티에서는, 실제 발리우드 레드카펫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다수의 스타들이 등장한다. 현재, 혹은 과거로부터 최고라 불려졌던 스타들은 샤룩 칸의 주변을 돌며 영화의 주제곡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그들이 맡고 있는 역할과, 그들이 패러디하는 영화의 제목들 모두 발리우드 시장을 뒤흔든 블록버스터들이다. <옴 샨티 옴>의 뮤지컬 씬 중 가장 긴 시간을 할애하는 이 장면은, 볼리우드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일종의 이벤트다.

발리우드 영화 관람을 위한 작은 팁. 절대 '혼자' 보지 말 것. 그리고 절대 '작은' 모니터로 관람하지 말 것. 수 많은 음악과 경쾌한 리듬이 혼합된 발리우드 영화는 극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깔깔거리거나 혹은 사운드에 맞춰 발을 구를 때 진가를 발휘한다. 혹시 발리우드 영화를 처음 만나거나, 인도 영화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앞서는 당신, 소강상태에 접어든 비를 등지고, 부천으로 직행해 세 시간동안 '타국의 취향'에 흠뻑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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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 그래도, 카메라는 돈다

필진 리뷰 2008/07/16 10:53 Posted by 우디79
김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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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는 저예산의 비교적 단순한 영화다. 그래서 [REC]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글들은 대체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인다. 1인칭 카메라의 압박이 어떠니,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어떠니, UCC 시대의 영화가 어떠니 등등. 물론 이러한 설명들은 모두 옳다. 그러나 나까지 나서서 구태의연하게 그런 말들을 한 번 더 반복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는 것은 섭섭할테니 한 가지만 말해두기로 하자. 올여름 개봉작 중에 절대 놓치지 말아야할 호러영화가 있다면, [REC]는 그 중의 한 편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라는. [REC]는 정말 괜찮은 영화다. 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어둠을 다루는 솜씨는 이 영화에서도 충분히 발휘되고 있으며, 긴장감을 뽑아내는 솜씨 역시 능숙하게 드러내보인다.

그러나 많은 글들이 놓치고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하우메 발라구에로가 영화 속에 역사를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그는 역사를 숨기는 행위, 즉 진실을 감추는 행위에 신경질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돌이켜보면 그의 영화에서는 항상 과거가 문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사건을 따라가다보면 꼭 숨겨진 - 모르고 있던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이다 - 과거가 나온다. 딸의 실종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나치대학살까지 들먹이게 되었던 [네임리스], 끔찍한 역사가 싫어서 자식을 죽여가며 종말을 꾀하는 사교도집단의 노력을 그린 [다크니스], 학대받았던 기계소녀(?)의 분노를 다룬 [프레절]까지.

[REC]는 경찰에 의해 봉쇄된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작품이다. 아파트에 갇힌 자들의 인권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다. 결국 그들은 대의명분을 위해 버려진 것이다. 그럼 왜 하필 이 아파트에서 그러한 소동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이 곳에 실험에 사용된, 그러나 실패한 실험의 대상자가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참극은 자신들의 실수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숨겨버린 과거로부터 온 것이다. 이는 전작들과 맞닿아 있다. 또다시 이 곳을 봉쇄하게 된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무엇인가를 감추었던 그 곳에서 문제가 새어나오고 있는데도, 그 곳을 또다시 감추려고 한다는 설정은 같은 실수가 현재에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40년전 실패한 의식을 완수하고자 했던 [다크니스] 역시 같은 맥락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하우메 발라구에로는 영화를 통해 과거의 쓰라린 경험을 잊지 않기를, 그리고 동일한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를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진실은 묻힐 수 없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돌아간다. 사람은 죽어없어질지라도 카메라는 남는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될리도 없고, 어떤 사건이 후세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리도 없다. 따라서 매듭을 지어야 한다. 하우메 발라구에로가 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발라구에로가 비슷한 이야기들을 반복하게끔 만들었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진부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스페인 사람이며, 스페인 내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페인내전의 사후처리 방식이 어떠했는가. 타협(대의명분)에 의한 과거와의 단절 - 다시 말하면, 미해결된 역사 - 이 아니었던가. 그의 영화들에서 주로 고통받는 것은 아이들이다. 이 역시 당연하다. 끔찍한 시대에 가장 고통 받는 것은 가장 유약한 존재일테니까.

솔직히 나는 발라구에로가 1인칭 카메라시점의, 유사다큐멘터리 형식의, 좀비물을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소 의아했다. 과연 그가 좀비물의 장르 안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 특히 후반부 - 를 보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노골적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했던 초보감독의 치기는 사라졌을지라도, 그는 뚝심있게 같은 이야기들을 반복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 쯤 되면 그를 한 명의 작가로 인정해줘도 괜찮을 듯 하다. 나는 언젠가 발라구에로가 스페인 내전을 다룬 대표적 감독 중 한 명으로 거론되어야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의 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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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용준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를 (의도적으로) 연상시키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The good the bad the weird>(이하, <놈놈놈>)은 전자의 명성에 무임승차하고자 조합된 문자 나열의 결과물 따위에 불과한 것은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놈놈놈>을 마카로니 웨스턴(스파게티 웨스턴)의 동양적(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적) 변주라고 섣불리 규정해버리는 것도 탐탁치 않다. 일단 <놈놈놈>의 부분을 채우는 다양한 이미지들은 대부분 어디선가 한번쯤은 본듯한, 그리 낯설게 보이는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 낯익은 이미지들이 조합된 전체적 형태는 낯설게 입력된다. 이는 그 이미지들이 각각 과도기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혼재한 무질서적 세계관을 형성하는 까닭이며 이런 시각적 작용은 그 당시 주인이 불분명했던 만주벌판의 지정학적 요건과도 맞물려 교묘하게 시대상과 연관되어 작동한다.

스스로 ‘만주 웨스턴’이라고 (홍보문구를 통해) 자처하는 <놈놈놈>은 서부극의 건조하고 황량한 정서를 만주벌판에 대입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만하다. 본래 조선의 국토였지만 일제강점기와 함께 반허공에 떠버린 만주벌판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은 독립군이거나 일제앞잡이,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아나키스트적 개인으로 생존한다. 마적단 두목으로 무리를 이끄는 박창이(이병헌)나 독고다이 도적질로 살아가는 윤태구(송강호), 그리고 현상금 사냥꾼으로써 그들의 뒤를 쫓는 박도원(정우성)도 돌아갈 곳을 잃은 채 그 자리를 떠도는 아나키스트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덕분에 역사적인 의식 따위도 그곳엔 부재하다. 그들에겐 잃어버린 국가에 대한 사명감보단 생이 붙어있는 현실의 돌파구를 찾아내는 게 더욱 큰 관심사다. ‘나라가 없어도 돈은 있어야지’라는 박도원의 대사는 그들의 욕망 너머에 담긴 허무적 정서를 관통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웨스턴 무비란 장르적 명칭을 허한 지정학적 배후에 무의식적으로 녹아있던 무질서의 개념을 역전시키는 설정이다. 웨스턴은 본래 정복자들로부터 시작된 사연이다. 초창기 웨스턴은 서부 개척이란 역사에 토착민이었던 인디언들의 야만성을 부각시키며 그들에 대한 공격적 행위를 개척정신으로 정당화함으로써 장르의 폭력성을 설득했다. 그 후, 웨스턴은 점차 인디언을 몰아내며 서부를 점령한 총잡이들의 이익 쟁탈전으로 심화되고 폭력성의 연출과 비열함을 가미하는 마카로니 웨스턴과 정복자들의 자기 성찰을 덧씌운 수정주의 웨스턴으로 진화해 나간다. 주인 없는-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입장에서 없다고 판단된- 땅에서 펼쳐지는 총잡이들의 물고 물리는 대결의 양상은 무질서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그 맥락이 발생한 지점은 결과적으로 외부에서 유입된 정복자들의 오만한 정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웨스턴의 정서적 기운을 함축한 <놈놈놈>의 만주는 그 양상이 조금 다르다. <놈놈놈>에서 정서적 굴곡을 형성하는 이들은 하나같이 망국의 자손들, 조선인이다. 만주는 일본 제국주의의 정복자들에게 국가를 빼앗긴 조선인의 망향지정이 서린 공간이다. 물론 그곳이 다양한 군락을 이룬 만주족들의 터이기도 하겠지만 <놈놈놈>의 주요맥락이 조선인 신분의 캐릭터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런 사안은 논외의 사안으로 간과될만하다. 사실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지니고 있었던, 혹은 그것이 응당 그러한 것이라 믿어지던 일련의 고정관념은 사실 그것을 잉태한 이들의 무의식에 정복의 역사를 합당하게 바라보는 관점이 개입된 까닭이다. 스스로 웨스턴을 표방한 <놈놈놈>은 그것을 의식했는가의 여부를 떠나서 기본적으로 웨스턴의 세계관이 지니고 있던 어떤 고정관념을 타파한 꼴이 됐다. 이는 <데어 윌 비 블러드>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이 공간성의 테두리로 잔존하거나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처럼 완전한 시대적 공간성으로 확보되는, 혹은 <3:10 투 유마>와 같이 활극의 요소를 가미한 자기 복제의 양상과는 확연히 판이한 꼴이라 말할 수 있다. 이는 명백히 장르의 중심지대를 이양함으로써 장르의 한계를 이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역설과도 같다. 애초에 영웅주의적 공식을 탈피한 마카로니 웨스턴의 시작이 미국 서부의 입지조건을 벗어나면서 형성됐다는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제목에서 명명된 세 명의 ‘놈’은 트라이앵글을 이루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구도를 형성한다. 캐릭터 삼각편대 구도 안에서 발생하는 빈번한 충돌은 활극의 스펙터클로 구사되며 이에 일제강점기 만주의 시대상과 신구가 맞물린 과도기의 이미지가 중첩되며 <놈놈놈>은 도가니탕의 신세계로 내달린다. 물론 노골적인 결말부의 삼자구도까지 확인하고 나면 전체적인 영화적 설정은 분명 세르지오 레오네의 그것과 접점을 이루는 면모가 다분함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놈놈놈>에서 실제를 구현하는 골격의 이미지가 아니라 가상적 세계관을 구현하기 위한 기본적인 소스의 출처에 가깝다. 중국 대륙과 러시아 연해주, 제국주의 일본, 그리고 조선의 유랑민까지 다국적의 인간들이 혼재해있으며 말과 오토바이가 공존하는 신구 문명의 발전적 과도기가 혼탁하게 얽힌 193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한 <놈놈놈>은 일제강점기 만주의 과도기적 이미지를 적극 차용한 시대극에 근접해 있다. 물론 그것 역시 사실적인 시대적 모사(模寫)로서가 아닌 전반적인 영화적 디테일을 구성하는 요소로써 산재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놈놈놈>은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활극적 모험담으로 규정될만한 것이다. 시대상과 지역성을 기초로 융합되어 가공된 영화만의 특수한 이미지들은 실제 연대를 가늠하되 현실적 시공간을 망각하게 만든다. 동시에 탁월하게 세공된 스타일을 자랑하는 캐릭터들이 펼쳐 보이는 활극의 동선은 제각각 오락적 반경을 확장해나간다. 대립적 갈등의 심리 묘사보단 외부적 충돌의 파괴력을 묘사하는 것에 중점을 둔 대결양상의 화려함도 이를 보탠다. 박창이와 윤태구, 박도원이 처음으로 접점을 이루는 기차 탈취 씬으로부터 본격적으로 발생하는 박진감은 윤태구와 박도원이 손을 잡고 박창이의 무리와 대결하는 시가지 총격씬을 비롯해 크고 작은 액션 시퀀스를 점층적으로 나열한 뒤, 후반부 평원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추격전에서 클라이막스를 이룬다. 무엇보다도 현란한 동선을 쫓는 필사적인 트래킹 샷과 거대한 평원을 스펙터클하게 펼쳐 넣는 부감 숏 등 장면을 효과적으로 비추는 구도적 능숙함과 고난이도의 액션에 만화적인 연속성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카메라 워크의 민첩한 노력은 <놈놈놈>의 세련된 이미지를 완성하는 가장 큰 공신이자 탁월한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쟁글거리는 기타 선율과 리드미컬한 퍼거션으로 채워진 남미 계열 멜로디와 일렉기타와 신디사이져음을 대거 차용하며 현대적 감각으로 복기된 웨스턴 풍의 음악으로 채워진 사운드트랙도 장면과 결착한 순간마다 절묘한 시너지를 발산한다.

물론 드라마상의 맥락이 드물게 느슨해지는 경향은 존재한다. 세 명의 주요 캐릭터가 격돌하고 다시 흩어지는 반복적 이야기 구조는 방대한 스케일만큼이나 산재한 조연들과 함께 개별적인 동선에서 빚어지는 각자의 사연을 크고 작게 그려낸다. 이 과정에서 종종 팽팽하던 실이 느슨해지듯 풀려나가는 경우가 발견된다. 이는 크고 작게 강약의 강세를 반복하듯 진행되는 내러티브의 흐름에서 강약의 간극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발생하는 경우에 종종 발견되는 면이라 할 수 있다. 전후 구조에서 전반부의 세기가 강했을 때, 상대적으로 후반부의 세기가 약할 경우 격차가 크게 느껴지는 이치다. 게다가 <석양의 무법자>를 완전히 본뜬 듯한 결말부의 설정은 그 의도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알아챌 경험의 기반이 없는 관객에게는 지독한 허무주의로 인식될 위험성도 분명 존재한다.

전반적으로 캐릭터의 역할 배분은 배우의 능력(?)마저도 고려한 듯 적절하게 안배됐다. 특히 입담을 자랑하는 송강호는 언제나 그렇듯 발군이며 가장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캐릭터 박창이를 연기한 이병헌은 자신의 역량과 노력을 보태며 철저히 캐릭터에 몰입한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세 캐릭터 중 가장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박도원 역을 맡은 정우성의 이미지를 능숙하게 활용한다. 영화 상에서 가장 세련되고 화려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박도원은 심리적 내면을 깊게 드러내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놈놈놈>의 세련미를 구축하는 전반적인 포석으로써 날고 뛰며 겨눈다. 물론 캐릭터의 갈등 지점이 명확하게 해소되지 않는 부분도 존재한다. 중반부부터 형태를 드러내는 윤태구를 향한 박창이의 집착은 후반부에서 의문을 명확히 해소하지만 박도원이 다소 의아하게 박창이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이유는 마지막까지 명확하지 않다.-단지 좋은 놈이라서?- 이는 (자체만으로도 인상적인 배우들이 이루는) 캐릭터의 삼각관계 형성이 역할에 맞아떨어지는 이미지의 구도를 형성하며 일정한 상승효과를 발휘한다는 점은 확실하나 그 구도의 결속력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음은 지적될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놈놈놈>은 단연 즐길만한 여지가 풍부한 오락영화이자 일정한 수확을 얻었다고 여겨도 좋을법한 장르적 시도의 결과물이라 평가할만하다. 동시에 김지운 감독 특유의 세련된 감각이 돋보이는 전체적인 미장센과 적절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연출력, 확실한 몰입도를 선사하는 인상적인 액션의 응집력은 분명 수훈이다. 과거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고 거액의 제작비가 투입되어 기대를 모았던 몇몇 대작들의 초라한 결과물과 비교했을 때 <놈놈놈>의 성과는 더욱 뚜렷해진다. 새로운 소재에 도전하는 과감성과 함께 탄탄한 연출을 통해 정석적인 성취를 거둘 줄 아는 방식은 분명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놈놈놈>은 김지운 감독 본인의 말대로 ‘걸작'이나 '명작'의 반열에 오를 수 없을지 몰라도 지금만큼은 분명 간과할 수 없는 흥미로운 영화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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