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동 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어느 건물 2층에는 꽤 알려진 와인 바가 있다. 은은한 조명과 귀를 간질간질하게 만드는 재즈넘버가 흐르고 칠레 산 '까베르네 소비뇽'이 입안 가득 향을 품기며 짝 달라붙을 때면 그 순간만큼 나는 이세상의 왕이 된다. 가늠하기 힘든 천차만별의 맛만큼이나 품종과 가격이 다양한 와인은, 서민의 가정식탁에서 명망가의 지하보관소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역사와 빛깔로 자신을 뽐내고 있으니, 우연한 기회로 접한 맛에 반해 한 병 거뜬히 비운 뒤 오는 기분 좋은 취기를 누가 알 것인가!
어김없이 ‘보졸레 누보’ Beaujolais Nouveau 의 계절이 돌아왔다. 백화점과 대형마트 할 것 없이 동네 편의점에도 보졸레 누보 출시 안내문이 붙여져 있으니 말이다.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이 다가오면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대체 언제부터 우리 국민들이 와인애호가가 되었을까?
1990년대 초중반 이 땅에는 재즈 열풍이 불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재즈를 들었고 이야기했으며 홍대를 위시해 젊은이들의 집합소마다 유행처럼 재즈 바가 들어섰다. 사실 말이 좋아 재즈 바이지, 재즈에 대해 문외한인 업주와 종업원이 최소한의 오디오시스템을 가지고 귀에 익은 레퍼토리를 들려주는 것이 고작인 업소도 많았다. 수준 미달의 뮤지션으로 라이브 연주를 들려주던 곳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따지고 보면 재즈열풍은 90년대 거품경제와 쿨 한 라이프스타일의 유행이 빚어낸 기형아에 다름 아니었다. 그럼에도 버번위스키나 데킬라를 마시며 말보로를 피워대면서 빌리 할리데이와 존 콜트레인의 소리에 취하는 것이 더 없이 멋져 보였던 시절이었다. 뒤이어 시가 바와 더불어 보졸레 누보가 일반인들 사이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보졸레 누보가 국내에 들어온 역사는 꽤 오래다. 특급호텔마다 매년 11월이면 주요고객을 대상으로 시음회를 열곤 했으나, 세간에 알려질 기회가 없었는데, 1999년을 기점으로 언론에 부각되면서부터 24시간 편의점까지 보졸레 누보를 예약 받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와인 얘기를 하자면, 2005년 미국 내 비평가협회 작품상을 모조리 휩쓴 알렉산더 페인 Alexander Payne 감독의 [사이드웨이_Sideways](2004)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에는 캘리포니아의 와인 산지로 여행을 떠나는 두 친구가 등장하는데, 갖은 와인의 향연이 펼쳐지는 가운데, 잠시 샛길로 빠졌던 두 남자가 제 자리를 찾아갈 때 즈음이면, 관객은 이미 반쯤 취하게 된다. 포도농장을 배경으로 영화 내내 와인 시음을 하는 장면에서 취하고, 담백한 일상의 에피소드를 넉넉한 풍광 안에 거둬들인 영화의 마력에 취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탈현실적 여유와 감미로운 나른함이 진한 와인 향처럼 풍겨나는 영화 한편을 만나는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것인가.
삶이 무료하거나 곤죽이 될 정도로 지쳐있을 때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재충전하곤 한다. 하지만 여행이란 꼭 물리적 장소를 바꾸는 것만은 아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거리를 걷거나 음악을 듣는 것, 또는 [사이드웨이] 같은 영화 한편을 보는 것 역시 여행의 다른 모습일 터이다. 게다가 쉼 없이 마셔대는 와인과 청명한 잔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당장이라도 와인 한 병 사고 싶어 못 견디게 될 것이다. 이 영화가 한국에 개봉되던 해에는 와인 동호회들을 중심으로 와인 바에서 영화 상영회가 열리기도 했다. 와인과 함께하는 영화 관람이라. 멋지지 않은가. 이런 영화감상은 몸과 영혼에 더 없이 유익할 테니 그야말로 오감이 만족스러울 터이다. 그렇다면 올해 11월의 셋째 목요일에는 사랑하는 연인과 또는 친구와 혹은 영화를 좋아하는 그 누구와 저렴한 와인 한 병 준비해놓고 [사이드 웨이]를 다시 한 번 보는 것이 어떨까? 오래 묵은 좋은 와인 맛만큼이나 시간이 지날 수 록 가치를 더 해가는 이 영화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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