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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까지 가져갈 단 한 편의 영화

필진 칼럼 2008/07/14 14:47 Posted by 우디79
백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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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2008 시네바캉스’의 백미는 단연 스파게티 웨스턴의 거장 ‘세르지오 레오네 특별전’일 것이다. 돈만 있으면 우주여행도 가능해진 시대에 말 타고 총질이나 해대는 웬 구닥다리 영화냐고? 자고로 싸움의 백미는 총싸움인 법. 짤막한 권총에 유독 푸른 눈을 지녔던 프랑코 네로와 총구가 긴 권총을 소지했던 신경질적인 광대뼈의 리반 클립과 궐련을 질근질근 문 채 윈체스터를 폼 나게 돌려가며 쏘아대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탄생시킨 것이, 세르지오 꼬르부치에서 시작되어 그의 후예 세르지오 레오네가 꽃을 피운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면 어떤가!

이렇듯 수정주의 서부극에 B급 감성을 버무려 독특한 영화세계를 일궈온 세르지오 레오네였지만, 그가 필생의 작업으로 여겼던 영화는 전혀 다른 형식의 것이었다. 입버릇처럼 말해왔듯이, 세르지오 레오네의 위대함은 단순히 그의 영화세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즉, B급 서부극이라 불린 레오네 영화에서나 주연일 수밖에 없었던 2류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오늘날 거장으로 군림하기까지 레오네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고 레오네만의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레오네의 영화, 그 중에서도 그의 유작(遺作)을 필름으로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시네바캉스는 절반의 만족을 안겨준 셈이라 하겠다. 이제, 물어보자. 당신을 미치게 만드는 단 한 편의 영화가 있는가? 제목만 들어도 뛰는 가슴을 주체하기 힘든 그런 영화가 있는가. 아님 당신의 가슴을 데워줄 영화가 있기는 한 것인가.

좋은 영화란 셀 수 없이 많다. 이 무수한 영화를 전부 이야기하자면 평생 걸려도 못할 일이기에 단 한편의 영화를 고르라면 누구라도 머뭇거릴 수밖에 없을 테지만 내겐 그리 고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최고의 영화 한 편만 꼽아보라고 할 때 주저하지 않고 꼽을 영화가 있다는 것. 정말로, 그런 영화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이 영화에 대해서 긴 얘기가 필요 있을까? 어떤 수식어로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다 할 수 있을까. 70 년대에 <대부>가 있었다면, 80년대는 바로 이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있다. 물론 90년대에 이르면 <좋은 친구들>로 그 계보가 이어진다.

「뉴욕 빈민가의 어느 식당, 한 소년이 화장실로 들어가 벽돌 하나를 조심스레 빼낸다. 그리고 잔뜩 긴장한 채 그 구멍을 통해 옆방을 들여 다 본다. 벽 너머의 공간에서는 소녀가 발레 연습을 하고 있다. 소녀는 소년이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마치 뽐내듯 발레를 계속하고, 소년이 소녀를 좋아하듯 소녀도 소년을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는 소년이 나쁜 길로 빠지려 하고 있음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소녀의 걱정대로 소년은 사람을 죽이고 교도소에 가게 되었다. 옛날 옛적 미국에서...」

1920년대 경제 대공황과 금주법시대의 뉴욕 브룩클린을 배경으로, 다섯 명의 소년이 범죄자로 성장하는 과정과 이젠 도피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주인공 누들스의 과거회상을 통해 인생과 사랑, 범죄와 죽음을 다루고 있는 이 영화는, 둘도 없는 친구였던 누들스와 맥스, 그리고 연인인 데보라를 통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배신의 인생 이야기가 애절한 엔니오 모리코네의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그려지고 있다. 여기에 루마니아 출신의 세계적 팬플루티스트인 게오르그 장피르의 주옥같은 선율이 듣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이 영화는 가히 영화도 영화음악도 모두 최고 걸작 반열에 오를 가치가 충분하다 하겠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는 세르지오 레오네가 평생 간직해온 ‘드림 프로젝트’였다. 70년대 후반 연출보다는 제작에 더 힘을 쏟았던 그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만들기 위해 <대부>의 연출제안을 거절했을 정도였다.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들을 통해 상당히 기묘한 스타일을 지닌 감독쯤으로 인식됐던 레오네는 이 영화를 통해 거장다운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데, 과거, 현재, 미래를 정교하게 오가면서 진행되는 사건은 미스터리하면서도 매혹적이기까지 하다.

원작은 "HOODS"라는 소설로 당초 10시간짜리 러프 컷을 수정한 레오네의 1차 편집본은 6시간짜리이고 디렉터 컷(현존하는 완전한 감독 공인판)도 229분짜리 분량으로 만들어졌으나, 흥행을 고려한 제작사가 무려 89분을 잘라낸 2시간 19분짜리 필름으로 개봉시켰으니, 결과적으로 평론가들의 악평과 흥행 참패를 겪어야 했고, 10년이 지난 후에야 감독 판이 재개봉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만난 것은 1984년 명보극장 개봉 당시인데, 132분이라는 (지금으로서는)어처구니없는 러닝 타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의 충격과 매혹은 여전히 기억을 지배할 뿐 아니라 광적 지지자로까지 바꿔놓을 정도였으니, 단언컨대 내가 무덤까지 가지고 갈 단 한 편의 영화가 있다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일 것이다.

영화에는 유머러스한 장면들도 꽤 등장하는데, 이를테면 어린 창녀의 환심을 사기위해 슈크림을 사들고 찾아간 ‘짝눈’이 그녀를 기다리는 동안을 참지 못하고 야금야금 핥다가 기어이 다 먹어치우는 장면이라든지, 보석상을 턴 맥스 일당이 훗날 안주인과 재회하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림으로써 그녀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장면 등은 가히 레오네 다운 발상으로 여겨진다. 사랑하는 여인보다 손 안의 슈크림이 더 간절한 소년의 심정은 얼마나 절절하던가! 또한 출옥한 누들스가 데보라와 만나 야연을 즐기던 시퀀스도 잊을 수 없으니, 이 장면에서의 대사는 이렇다. “미치지 않기 위해선 바깥세상은 다 잊어야 했어. 하지만 그래도 잊혀 지지 않는 건, 도미니크였어. 총 맞고서 ‘나 넘어졌어.’ 라고 말하던 아이 말이야. 그리고 데보라...너!”

숱한 밤, 나를 갈색추억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휘파람 불며 브룩클린 다리 밑을 걷던 다섯 명의 소년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제 필름으로, 그것도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판본으로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니 어찌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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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

    Tracked from Pell's seer Blog  삭제

    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 - Synopsis 맥스, 짝눈, 팻시 등 뒷골목 죽마고우들을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에 35년 동안이나 시달려 온 누들스는 ‘베일리 재단’이라는 곳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초대받는다. 어린 시절, 누들스는 고고하고 아름다운 데보라가 춤 추는 것을 화장실 벽 틈새로 훔쳐본다. 술주정뱅이를 털려다 친해진 맥스와 누들스는 친구들과 밀수품을 빼돌려 돈을 버는 가운데 우정을 다져 나간다. 이들을 질투..

    2008/07/21 00:31

길 위에서 영화를 만나다 ①

그리고... 2008/07/14 14:41 Posted by 우디79

강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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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밟는 남도 땅은 뜨거웠다. 8월의 마지막 주, 서울에서 벗어나 경상남도 진주에서 아는 분과의 조우를 마치고 꼬박 두 시간이 걸려 전라남도의 땅을 밟았다. 단 한 번도 남도로 내려온 적이 없고 함께 여행을 하는 동행도 없던 터라 모든 것이 신기했다. 다만 입을 꾹 다물고 내리쬐는 햇빛을 혼자 대하기에는 약간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여름에는 습기와 고온으로 숨이 제법 막힌다는 남도의 더위.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곳이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내가 사랑하는 두 영화의 모든 것이 공존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청준의 단편집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두 편의 영화 <서편제>와 <천년학>은 전라남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굽이굽이 산길과 논밭을 걸어 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세월을 읊던 그들의 모습이 문득 눈앞을 가로막았다. 나의 등에 올려진 배낭과 카메라는 조금 무거웠지만 다시 한 번 신발 끈을 조이고 『선학동 나그네』, 영화 <천년학>의 배경이 된 장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몇 십 년 인생을 풀어내는 단 하루의 저녁, <천년학>의 선자마을

보성에서 장흥으로 넘어오는 길은 험했다. 애초에 ‘걸어서 남도를 돌아다녀보자’ 라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를 조롱하듯 산길에는 버스가 아니면 지나갈 수 없도록 차도가 놓여있었다. 장흥에 도착하자마자 장흥 터미널에서 <천년학>의 촬영지로 유명한 선자마을이 있는 버스를 찾았다. 선자마을은 장흥에서 약 40분을 달려 회진에 내려 다시 30분을 걸어야만 했다.

회진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 남도에 내려온 지 이틀 만에 처음으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았다. 이곳에 내려와서 느낀 것은 주민들 대부분이 나이 드신 분들이라는 것과 공기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좀처럼 젊은이들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방이 논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길의 고요를 뚫고 버스에서 나는 엔진소리를 들으며 버스 안을 훑었다. 큼지막한 버스에 무거운 배낭을 짊어 진 여행객 복장을 갖춘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런 나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시간이 지나자 곧 고개를 돌려 당신들끼리의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버스 내에서도 역시 젊은이는 나 하나 뿐. 새삼 전형적인 시골 땅을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선자마을 가는 길이 이쪽 맞나요?”
“선자마을? 선자마을은 뭣 땜시 가려고? 아가씨, 이 더운디 거까지 걸어가려고?”
“네. 제가 선자마을에 볼 일이 있는데 방향을 잘 모르겠네요.”
“이 도로를 따라 쭉 가면 선자마을이 나오긴 하는디, 걸어가기는 좀 힘들 터인데. 가다가 사람들 나오면 또 물어보구 허라구.”





회진읍의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무작정 앞으로 걷다가 지나가시는 할아버지께 길을 물었다. 도로를 따라 쭉 가기만 하면 선자마을로 향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전라남도를 여행하면서 지도 하나 가져오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지만 길을 잃을까 걱정하는 것도 잠시, 읍내에 군데군데 놓인 표지판은 ‘천년학 촬영지’로 가는 길을 너무나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선자마을로 가는 길은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멀었다. 회진읍내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마을인줄은 알았지만 찌는 듯한 남도의 더위는 매번 앞길을 가로막으려 필사적이었다. 회색 도로에는 화물을 싣고 가는 트럭들이 질주하며 지나갔고 그 위를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몇 십 년 전만해도 흙이 구르는 길로 범벅이었을 이 도로는 <천년학>의 동호가 선학동으로 가기 위해 지나갔던 발자국이 남아있는 길이다. 무미건조한 회색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커다란 고개를 넘어가니 쭈욱 뻗은 도로 한 켠에 작은 건물이 하나 보인다. 눈에 익은 소나무. 익숙한 산의 모양새. 이곳이 선자마을의 주막, 동호가 하루를 묵고 가면서 자신의 인생을 풀어낸 그 주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포구에 물이 없고 나무가 저 모양인디 학인들 날라 들것소. 하긴 지 마음에 그 시절을 잡아 놓고 학이 다시 날라들기를 기다리는, 그런 한심한 인간도 있으니께.” -<천년학> 中


<천년학>에서 동호의 아버지 유봉은 어린 송화와 동호를 물이 흐르는 선학동으로 데리고 와서 선학동의 주축을 이루는 학 산을 보여준다. 학이 날개를 펼친 채 날아오르고자 하는 모양새를 그대로 본 딴 듯한 산을 보며 어린 동호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선학동에 다시 찾아온 그는 변해진 선학동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며 오랜 애환이 묻은 선학골의 주막에서 평생 주막을 지키던 사내와 술잔을 기울인다.

‘촬영지’라는 간판이 크게 써 붙여진 선자마을 입구의 작은 주막의 뒤로 영화 속 동호가 느꼈던 황량함을 보여주는 곱게 포장된 도로가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회진읍에서 이곳으로 걸어오기를 한 시간. 고개를 숙이며 익어가는 벼들 사이로 지칠 대로 지친 나와 나의 배낭은 망설일 것도 없이 쉬어야만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멀리 마을이 보이고 마을로 가면 시원한 물 한 잔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여행길에서의 냉수 한 모금은 고급 음식점의 잘 차려진 식탁보다 반갑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조그맣게 보이는 마을의 모습을 한번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보고 바깥채 쉼터에 짐을 내려놓았다. 풀들만 무성한 주막의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 살 법한 번듯한 집이라고 생각해 조심스레 창문을 닦으며 안쪽을 들여다보았지만 역시 아무도 살지 않는다. 촬영이 끝나고 발길이 뜸해졌기에 먼지가 수북하게 앉은 작은 집에 지금 숨 쉬고 있는 생물이라고는 풀들을 제외한 나와 벌레들 뿐 인 듯 했다. 마을은 멀리 있고 보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바로 왼쪽에 바다가 있고 배들도 여러 척 있었지만 배 위에 올라있는 사람도, 바다를 구경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에겐 미안하지만 거미줄을 대충 휘휘 저으며 치워버리고 배낭을 베고 먼지더미로 풀썩, 몸을 던졌다.

새벽을 꼬박 지새우던 동호의 눈빛이 떠올랐다. 동호가 가진 것이라고는 그의 인생의 굴곡을 짐작하게 하는 눈빛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남도 천지를 떠돌다가 이 작은 주막에 와서 송화의 흔적을 찾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것은 송화가 다녀갔던 곳과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몇 가지의 이야기밖에는 없었고,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술 한 잔과 묵은 김치 한 그릇이었다. 자신이 사랑했던 누이 송화를 만나기 위해 그가 이곳으로 달려온 것은 아닐 것이다. 동호가 자신의 마음을 넌지시 술잔에 토해내고 있을 그 시간에 송화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몸을 바로하고 앉아 다시 주막을 둘러봤다. 한참을 누워있는 동안 주막 앞의 도로를 지나간 차는 다섯 대가 넘지 않았다. 오늘 아침 장흥근처의 찜질방에서 물을 담아두었던 물통을 꺼내들었다. 미지근하지만 그런 것을 따지기엔 햇볕이 너무 뜨거웠다. 물을 마시다보니 문득 옆에 놓여 진 뒷간이 눈에 들어왔다. <천년학>에서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시간은 단 한번 뿐이다. 주막 주인은 밤새도록 동호와의 술자리를 마치고 이른 아침 화장실로 볼일을 보기위해 몸을 옮긴다. 그가 일을 마치고 뒷간에서 나오는 바로 그 순간 동호는 차분히 앉아서 유봉이 자신에게 남긴 북을 바로 세운다. 화장실에서 빠져나오려 했던 주인 사내는 동호의 모습을 보고 황급히 몸을 숨긴다. 동호는 북을 들고 사내는 그런 그를 바라본다. 동호가 북을 치는 순간, 논으로 바뀐 황량한 벌판에는 물이 차오르고 송화는 그의 곁에서 소리를 한다. 그리고 곧, 두 마리의 학이 함께 날아오른다.





<천년학>은 ‘소리’를 아낀다. 송화의 목소리는 <서편제>에서와 같이 여전히 애절하지만 그것 자체가 마음을 움직이지는 않는다. <서편제>를 달려온 동호와 송화의 이야기는 <천년학>에서 이어지나, 사실은 그들의 마음속에 응어리진 한을 토해내기보다는 서로를 향한 마음을 더 많이 보여준다. 송화와 동호에게 아버지였던 유봉이 가르쳐준 ‘소리’라는 것은, 반드시 지나가야 할 길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길 위에서 사랑을 노래한다. 이복누이 송화를 향한 동호의 사랑, 동호를 그리워하는 송화의 마음, 그리고 그 주변에서 그저 자신의 사랑을 태울 수밖에 없던 주막 사내의 이야기가 교차할 때 선학동에는 학이 날아든다. 태풍을 맞고 을씨년스럽게 변한 소나무도, 그리고 동호가 어깨에 짊어진 세월의 굴레 또한 학이 날아오르는 그 순간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과거도 미래도 생각하고 싶지 않게 하는 바로 이 순간은 <천년학>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한참동안 생각에 빠져 있다가 시끄러운 오토바이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며 주막 뒤편을 가로지르는 오토바이는 얼마 달리지 않아 아까 보았던 주인 없는 배들이 있는 작은 방조제 앞에서 멈추었다. 커다란 배낭을 풀고 휴식을 취하는 이방인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아저씨의 시선을 뒤로하고 다시 한 번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급하게 걸어온 아까와는 달리 제법 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주막 주변에는 코스모스도 피어있었고 잡초라고 살아 있는 것들에도 꽃이 피어있었다. 아까 내가 없애다시피 해버린 거미줄에 매달려 있었던 거미는 열심히 다시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동호가 다녀간 이후 이 작은 건물에는 많은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기둥을 잡고 이따금씩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혹시 <천년학> 때문에 주막을 찾지는 않을까 기대하며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이곳에 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될 수 있다면 내가 앉아있는 이곳에서 노을이 지는 것을 보고 싶다. 가능하다면 이곳에서 별이 뜨는 것을 보고 싶다. 그러나 마음은 움직였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했다. 누군가 작고 보잘 것 없는 이 건물에서 발길을 쉽게 떼지 못하는 나를 본다면 아마도 ‘청승맞다’라고 했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는 마을버스도 하루에 한두 번 들어오는 것이 전부이고 지나가는 사람조차 뜸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존재하던 그들은 선자마을의 주막을 떠난 지 이미 오래다. 겉멋만 잔뜩 들은 것처럼 나도 이 주막에서 조용히 탁주에 작은 안주를 곁들여 밤을 지새우고 싶었다. 동호처럼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도 이곳에서 풀어내버린 것일까. 오늘 내에 반드시 완도로 넘어가야 하는 나의 일정과는 달리 처음 왔던 그때처럼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회진에서 선자마을로 넘어온 지 벌써 세 시간째. 입구에서 주저하는 나에게 회진으로 갈 예정이면 태워주겠다는 선한 인상의 아저씨가 요란한 트럭소리를 내며 나를 불렀다. 걸어왔던 길이니 다시 한 번 걸어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아저씨는 버스는 이미 끊겼고 힘든 일도 아니니 어서 타라며 재촉했다. 갈등 끝에 트럭에 오른 나에게 아저씨는 어쩐 일로 발길 뜸한 이 동네로 왔냐며 말을 걸었다. 트럭의 백미러로 학산이 어스름히 보였다. 이것저것 질문을 하는 아저씨와 대화를 하면서 덜컹거리는 트럭 뒤로 고개를 내밀어 슬그머니 다시 학산을 눈에 담았다.

(편집자 주: 강민영의 남도여행기는 다음 주 <서편제>의 촬영지로 이동합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기대와 열독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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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용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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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구에서 불꽃을 튀며 튕겨져 나간 탄환이 반대편에 날아온 탄환과 맞부딪혀 일그러진다. 인간의 반사신경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에 틀림없다. 대상을 정조준 하지 않고 팔의 스윙과 팔목의 스냅을 통해 내던져지듯 총구를 벗어난 총알은 곡선의 궤적을 그리며 장애물 너머의 과녁에 명중된다 회전력에 의해 날아가는 탄도의 관성적 움직임은 아무렇지 않게 간과된다. <원티드>는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혹은 그것을 철저히 무시하는 방식으로 독창적인 스타일을 완성한다. 말이 되지 않음은 <원티드>의 동선을 옭아매는 제한요소로 작동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은 현실이라는 중력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하는 반작용의 질서로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심장박동처럼 두근거리듯 울렁이는 화면이 말해주듯 웨슬리(제임스 맥어보이)는 지나치게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을 지녔다. 과도한 업무와 지독한 타박에 시달리는 그는 쳇바퀴 돌아가듯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에 짓눌려 자신의 삶을 명명될 의미조차 없는 가치라며 좌절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의 앞에 정체불명의 여인 폭스(안젤리나 졸리)가 나타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총격전에 휘말린다. 그리고 그의 권태로운 일상에 거대한 금이 가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집을 나간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자신이 분당 400회가 넘게 뛰는 심장을 지닌 덕분에 뛰어난 반사신경을 지녔음을 간파하게 된 그는 피가 튀고 살을 깎는 고도의 수련을 통해 ‘결사단(The Fraternity)’의 킬러로 육성된다.

<원티드>는 현실이란 중력에 저항하듯 무중력에 가까운 영화적 스타일을 구사하는 영화다. 손목의 스냅을 통해 곡선의 궤도를 그리고 날아가는 탄환,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주행실력으로 매섭게 달리는 스포츠카, 그 비상식적 행동반경을 과감히 돌파하는 캐릭터들의 반사신경은 가히 초인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거듭되는 살인적인 훈련을 통해 익혀지는 후천적 기능에 가깝다. 생의 의지를 질식시킬 정도로 무기력한 삶의 굴레를 되감아 돌리듯 살아가던 웨슬리가 자신의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깨닫고 뼈저린 고행 끝에 최고의 킬러로 성장한다는 설정은 성장스토리의 클리셰와 닮았지만 복제된 것이 아니다.

파격적인 액션의 미학적 양식은 <매트릭스>를 떠올리게 한다. 동시에 그 이미지로부터 구축되기 시작하는 세계관의 양태 역시 그것과 유사하다. 평범한 비즈니스맨의 일상을 두르던 일개 청년의 삶이 실은 위장된 것이며 그 잠재력을 은폐시키는 환경으로부터 깨어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획득하게 된다는 일련의 과정이 그렇다. 다만 ‘매트릭스’라는 가상 시스템의 작동을 통해 초현실적 자아와 실존적 자아 사이의 간극적 물음을 방대하게 되새김질하던 <매트릭스>와 달리 <원티드>는 훈육을 통해 재발견되고 숙성되는 인물의 초자아성을 부각한다. 세련됨의 여부를 넘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장황하게 느껴질 만한 액션에 설득력이 부여되는 건 그 덕분이기도 하다. 현실로부터 질식할 것만 같던 평범한 비즈니스맨이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자신을 붙잡고 있던 중력 같은 현실을 거부하며 운명에 눈뜬다는 스토리텔링은 비상식에 가까운 스타일리쉬와 결착되어 작동하는 덕분이다. 스타일리쉬한 이미지는 전시적 기능을 넘어 내러티브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도구적 기능으로써 작동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심하던 찌질이가 자신의 비범함을 깨닫고 용 된다, 가 <원티드>의 전부는 아니다. 그가 자신의 비범함을 깨닫게 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삶을 거머쥐게 되면서 이야기의 양상은 플러스 극에서 마이너스 극으로 부호를 바꾼다. 전반부가 웨슬리의 성취담이었다면 후반부는 웨슬리의 극복담이다. 그가 속한 결사단(The Fraternity Bible)은 방직공장을 아지트로 삼은 노동자 계급으로 이뤄져 있다. 그들의 암살 대상은 방직기계로부터 지정되며 이는 마치 신으로부터 내려오는 계시처럼 부여된다. 이를 해독하는 건 슬론(모건 프리먼)이다. 그 체계는 절대적인 것을 숭상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그만큼 일방적이다. 사제와 신도의 관계처럼 묘사되는 그들의 하위 일방적 시스템은 그 첨탑에 선 자가 이를 남용하게 될 때의 폐해를 드러낸다. 권력에 대한 견제가 불가능한 체제가 지닌 모순은 <원티드>의 후반을 지탱하는 반전의 매개로 작동할 음모의 성립조건이기도 하다.

맹신과 복종으로 유지되는 체제의 음모에 맞서고 권력적 구조를 타파하는 건 체제에 대한 맹신을 통해 조직에 유입되지 않은, 오로지 자신에 대한 가능성과 목적의식을 통해 조직의 전체주의적 결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를 통해 이뤄진다. <매트릭스>의 네오와 <원티드>의 웨슬리가 각기 선택 받은 자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그들의 역할수행이 각각 내부를 위협하는 외부적 시스템에 대한 극복과 내부적 시스템의 오류를 파기로 엇갈리는 건 그 시스템이 갈망하는 발전양상의 차이로 인한 것이다. 전자가 구원을 통해 시스템을 복원하고자 한다면 후자는 유지를 위해 시스템의 오류를 제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주문처럼 들리는 이름을 지닌 티무르 베크맘베토브(Timur Bekmambetov) 감독은 러시아 자국에서 큰 흥행을 거둔 <나이트 워치>와 <데이 워치> 시리즈로 독창적인 스타일을 인정받았다. 제작환경의 열악함을 감안한다면 두 작품에 담긴 묵시록적인 세계관과 스타일리쉬한 비쥬얼은 창조적 재능을 인정받을만한 매물이 되기 충분했나 보다. 할리우드로 건너간 그는 두둑한 명성을 자랑하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고가의 장비와 숙련된 기술을 활용하여 비현실의 오차범위를 확장시키는 영상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전작들에 비해 화려하고 깔끔해진 영상의 때깔이나 스타일의 세련미는 자본의 투자에 따른 결점의 보완 수준을 실감하게 한다. 또한 <원티드>는 안젤리나 졸리의 육중한 매력이 고스란히 발산되는 영화다. 그녀의 캐릭터는 그녀가 지닌 장점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그 매력을 완전히 담아낼 만한 그릇으로 완성됐다. 제임스 맥어보이보다도 그녀가 매력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동시에 이는 그의 불찰이나 미숙에서 비롯된 바가 아니란 점에서 더욱 그녀를 돋보이게 하는 사안이다.

<원티드>의 궁극적인 목적은 마지막 물음에서 발생한다. 동명의 그래픽 노블에서 모티브를 얻은-그로부터 소스를 얻었을 뿐, 전체적인 컨셉은 확 바뀌었다 한다.- <원티드>는 만화적인 양식을 대거 차용하며 그것을 영화적 실사로써 능숙하게 다루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것이 과학적인 법칙과 현실적인 논리를 배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이미지는 가히 공격적이며 매력적이다. 영화는 현실을 배제하지 않되 그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는 현실에 대한 스트레스와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의 중력에 얽매여 살아가는 누군가를 위한 충고처럼 보인다. 영화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완성하되, 관객에게 되묻는다. ‘너는 무엇을 했는가?’ 현실이라는 자신의 독자적 가능성을 간과하게 만드는 현실의 중력에 저항하듯 스타일리쉬한 액션은 무중력적 쾌감을 선사한다. 물론 그 현란한 이미지에 비해 단순해 보이는 내러티브가 그 물음을 간과하게 만들 수 있음을 배제할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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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티드 - 졸리에 뒤쳐지지 않은 맥어보이의 카리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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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봉전부터 안젤리나 졸리의 출연으로 워낙 관심을 많이 받았던 영화가 개봉됐고 일단 개봉 후의 흥행 성적도 꽤나 좋게 나오고 있다. '티무르 베크맘베토브' 라는 생소한(따라 읽기도 쉽지 않은) 이름의 감독은 러시아 출신으로 '러시아 최고의 비주얼리스트' 란 칭송과 함께 '러시아의 쿠엔틴 타란티노' 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그의 헐리우드 첫 진출작으로 보이는 이 영화가 최근에 나온 블록버스터중에 제일 흠잡을데 없이 기대치에 부응한 영화였다. 많은 영화들이..

    2008/07/04 18:02
  2. 원티드 ( Wanted, 2008 )

    Tracked from 게으름 기록  삭제

    2008 l 액션 l 티무어 베크맘베토프 l 안젤리나 졸리 l 제임스 맥카보이말도 안되는 과장 액션을 부풀리고 부풀린다음 돈들여 깔끔하게 뽑음 이런 영화가 나온다. 낄낄.내가 이 친구 나이트 워치 때부터 알아봤다규! ㅠㅠ티무어 베크맘베토프(어렵군;)감독님하는 나이트 워치 찍을때도 별거 없이 그저 스타일로만 막나가는 모습을 보였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막나가주신다. 그동안 레벨업도 했을거고, 이번엔 돈도 많았을거고, 배우도 좋았고. 이전보다 결과물이 꽤...

    2008/07/06 21:31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와킨 피닉스는 한때 리버 피닉스의 형제로 먼저 알려졌지만 이미 그 이야기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 같다. 수많은 배우들이 영화제목 앞에 '누구누구의-' 라는 형용사를 붙일 정도로 하나의 보증상표가 되었지만 내게는 와킨 피닉스가 그렇다. 배우로서의 얼굴이 만약 있다면 그는 정말 그런 얼굴이다. 에드워드 노튼이 마치 백지같은 얼굴 속에 수많은 다층적 인물을 숨기고 있어서 하나씩 카드를 뒤집어 보여준다면, 와킨 피닉스는 강한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창백한' 표정을 보여주기에 오히려 어떤 캐릭터도 그 안에서 가능하다. 특히 [글래디에이터]에서의 코모두스와 [퀼스]의 신부 역할을 맡았을 때의 와킨 피닉스의 창백한 에너지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의 얇은 입술은 강인하면서도 불안하고 예민한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역할에 걸맞았다.

[위 오운 더 나잇]의 바비 그린 역할도 그런 역할들과 궤를 같이 한다. 아버지와 형이 모두 뉴욕 경찰의 수뇌부임에도 바비는 인기 나이트클럽의 지배인으로 자신의 길을 간다. 문제는 바비의 고용주이자 유사 아버지와도 같은 러시아 마피아 출신 사장이 마약유통에 손을 대고 있다는 것이며, 이 때문에 바비의 아버지와 형은 바비를 가운데 두고 마약소통 작전을 펼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바비는 러시아 마피아 일당이 생각보다 크고 강한 조직임을 알게 되고 형이 공격을 당하게 되면서 아버지와 형 편에 서서 경찰의 작전에 가담하게 된다.

마약을 사이에 둔 경찰과 조직의 대치는 새롭지 않은 구도지만 그 사이에서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을 흘리며 악몽을 꾸어대는 바비의 심리상태는 영화의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경찰쪽에 정보를 주기로 마음먹으면서 바비는 여자친구의 보호를 위해 둘은 경찰관의 보호아래 비밀리에 모텔을 전전하는데, 이 역시 마피아들이 곧 알아내고 따라붙어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어느 나라나 범죄조직 앞에서 공권력은 무기력하다손 치더라도, 아버지와 형이 경찰 수뇌인 바비의 입장에서는 화 조차 낼 수 없는 상태다. 여자친구는 서서히 지쳐가고, 바비는 다시 짐가방을 싼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속에 그들은 또다른 모텔로 장소를 옮기느라 매우 지쳐버린 상태에서 출발하지만 이 때 마피아들의 차가 따라붙고 만다.

비 속에서 보여주는 이 자동차 추격씬은 매우 인상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에너지로 가득 찬 여느 헐리웃 범죄영화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범죄를 소탕해야 한다는 의지로 가득찬 경찰/형사와 악질적인 에너지(악당 역시 에너지로 가득차 있다)로 폭발할 듯한 상대편이 서로를 밟아죽이지 못해서 총을 쏘아대고 차를 따라붙고 도로의 사방이 자동차 폭발과 전복으로 가득 차 버리는 그런 헐리웃식 에너지가 여기에는 없다.

다만 끊을래도 끊을 수 없고, 마치 그림자 밟기처럼 끝이 없이 맴맴 도는 범죄와의 악순환에 지쳐버린 탈진의 에너지가 여기에 있다. 한순간 [살인의 추억]에서 비를 맞고 망연자실하던 송강호의 얼굴이 떠오른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져버린 바비와 그의 애인, 더이상 도망칠 곳이 없도록 막다른 데로 몰린 그들이 뿜어내는 지친 탈진의 에너지가 80년대의 혼란스럽고 붕 떠 있는 뉴욕의 분위기와 중첩된다. 이 자동차 추격신 전까지 영화는 액티브 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추격신이 나오기전까지 쌓아온 인물들의 심리적인 피곤과 갈등때문에, 이 추격신은 정점에서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헐리웃 영화들 속에서 자동차 추격신은 웬만한 폭발과 충돌을 동반하지 않으면 시각적인 충격조차 주기 힘든 요즘이다. 그러나 이 추격신은 그렇게 물량공세를 퍼붓지는 않는다. 다만 폭우 속에서 직접 핸들을 잡은 듯 인물들의 흔들리는 시야가 충분히 느껴지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성과 판단력마저 흔들리는 상황이 감각적으로 만져진다.

영화의 결론은 바비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매우 교훈적일 수 있는 선택이지만, 아무튼 모두가 '범인은 독 안에 든 쥐' 라고 하며 손을 털고 나왔을 때 바비가 끝내 자신의 손으로 상대편을 처단하는 모습은 인간의 '피폐한 밑바닥'을 보여준다.

와킨 피닉스는 매우 안정적이고 꾸준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지만, [위 오운 더 나잇]은 [앙코르]에 못지 않게, 그의 고유한 얼굴이 매우 가까이 드러난 영화중 하나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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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여배우를 다루는 방법

필진 칼럼 2008/06/16 12:22 Posted by 우디79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열광했던 얼치기 영화광시절, 뻔질나게 같이 영화를 보러 다니던 선배가 있었다. 그는 영화계 안팎을 속속들이 꽤 뚫고 있어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는데,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의 지루함을 없애주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너만 알고 있으라는 듯이 “어느 어느 감독과 여배우가 보통사이가 아니더라.”는 유의 출처 없는 소문을 무용담처럼 떠들어대곤 했다. 그가 말하는 스캔들의 배경이라는 것이 사실은 감독이 특정배우를 지속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기용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대체로 감독의 페르소나로 여배우가 선택될 때 이런 오해가 종종 벌어지곤 하는데, 실제로 이것은 상호부조를 통한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킬 때가 더 많은 법이다. 어떤 감독을 만나느냐에 따라 배우의 연기가 결정되고 영화의 완성도가 판가름 나며 종국에는 그들의 인생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공리가 장이모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로버트 드니로가 스콜세지를 만나지 못했다면,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코엔 형제와 함께 작업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오늘이 가능했을까?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감독마다 선호하는 배우가 있고 배우 또한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하도록 숨겨진 면면을 찾아내주는 감독을 원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배우, 특히 톱스타들이 감독과 영화를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은 다 이런 까닭이고, 출중한 외모만으로도 승부할 수 있는 몇몇 배우를 지칭해 “감독 운이 없다. 영화 고르는 눈부터 길러야한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오랜 만에 한국영화 <걸스카우트>를 보았다. 내용이랄 것도 없이 곗돈을 떼먹고 달아난 미용실 원장을 찾아 나선 네 명의 여성이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며 슬랩스틱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전부다. 이쯤 되면 “별 볼일 없는 영화인가보다”라고 눈치 챌 이도 있을 터. 고생한 배우(분명 나문희를 필두로 배우들의 연기는 충분히 현실감 넘치고 밀도 있게 펼쳐지고 있다)와 스태프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사실이 그렇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곗돈에 담긴 남루한 일상과 경제범죄와 공범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신을 통해 경제만능시대의 부작용을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 따위를 찾아내려 한다면 그야말로 억지스런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런 거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걸스카우트>의 역할, 즉 관람자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잠시 동안이나마 카타르시스를 안겨줌으로써 장르영화 공식을 이행하려는 시도 자체를 문제 삼으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관람자에 따라서 충분한 재미있다고 여길 수 도 있는 이 영화에 대하여 필요 이상의 논점을 들이대며 비판할 마음도 없거니와 난도질하며 영화지식을 뽐내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다. 그러나 중반까지 장르공식에 충실하던 영화가, 이름 모를 동네에서 시작된 추격전이 후반으로 가면서 가족로망스를 뒤집어쓰고는 미사리 일대를 뺑뺑 돌다 원점으로 돌아오는 일대 촌극으로 마무리된 것에는 참아낼 방도가 없었다.

물론 <걸스카우트>에도 몇 개의 인상적인 장면들은 존재한다. 이를테면 줌인-아웃을 번갈아 사용하며 몇 차례 트래킹쇼트를 이용해 긴장감을 고조시키려는 장면들과 영화 종반 슬로모션으로 처리된 비눗방울 위의 가방쟁탈전이 자아내는 판타지효과가 그것인데, 이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부정적 시선을 거둘 수 없는 근본적인 까닭은 여배우를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에 기인하며 이는 전적으로 감독의 연출력 부재 때문이라 하겠다.

여배우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 이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언제나 프랑수아 트뤼포의 <줄 앤 짐>과 잔느 모로를 이야기해왔다. 트뤼포만큼 여배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킨 감독이 있었을까? 그의 영화 속에서 여배우를 바라보는 트뤼포의 애정 어린 시선이 담겨 있음을, 형식주의를 무력화시킨 그녀들의 당당한 여성성이 트뤼포의 애정 어린 카메라 속에서 자유와 죽음을 향해 무한질주 할 수 있었음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에 버금가는 인물로는 왕가위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인데, 그러니까 잔느 모로가 트뤼포의 영화 속에서 女神으로 존재하듯, 장만옥은 왕가위의 시선을 빌어 또 모니카 비티는 안토니오니의 눈을 통해 절정의 미를 뽐내왔다는 말이다. 같은 맥락으로 장 자크 베넥스는 그로테스크한 외모의 신인 베아트리체 달을 가리켜 “카메라가 가장 사랑하는 배우,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카메라를 움직이게 만드는 배우”라며 극찬한 바 있으니, <베티블루>의 ‘베티’ 또한 배우를 향한 감독의 애정 어린 시선에서 탄생한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여배우에 대한 감독의 태도에서 비롯된 결과물들이다. 진심어린 애정을 담은 시선이 피사체를 향할 때 대상은 천상의 미를 품어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반면 <걸스카우트>의 여배우들은 장르영화에 걸 맞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철저하게 오락성과 상업성을 위해 연출된 모습으로 치장되고 있다는 점에서 확연하게 구분된다. 주요인물을 연기하는 네 명의 여배우 중 신인이며 젊디젊은 고준희를 제외하고는 모두 30대 중반을 넘긴 배우들이다. 즉 젊음과 미모와 몸매보다는 연륜과 연기력으로 승부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며 여배우에 대한 관객의 판타지도 시효를 다해가는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때문인지 카메라는 고준희와 나머지 세 명을 의도적으로 구분 짓고는 의도적인 쇼트를 감행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나문희는 물론이고 이경실과 김선아를 잡는 카메라의 위치가 상체와 얼굴에 집중되는 반면 고준희의 경우 하체를 위주로 그것도 앙각쇼트를 빈번하게 사용하면서 그녀의 핫팬츠를 전시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카메라의 시선이 대상을 객체화시킬 때 캐릭터는 존재의 의미마저 퇴색되기 마련인 법이거늘, 시종 몸빼와 바지만으로 버티며 억센 여성상을 연기한 세 명과는 달리, 하늘하늘한 원피스와 아슬아슬한 팬츠를 수시로 바꿔 입고는 늘씬한 각선미를 과시한 고준희의 역할을 볼거리 차원으로 전락시키는(그러나 한국오락영화에서 너무도 쉽게 포착되는)무책임한 연출이라니!

이렇다보니 <걸스카우트>라는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영화에는 여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줌마와 젊은 여자로 구분된 역할 분담이 전부일 따름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미사리 하늘 위에 울려 퍼지는 아줌마의 악다구니가 듣기 싫다면 간간이 등장하는 젊은 여자의 늘씬한 몸매를 감상하면 그만이고 그러다 다시 현실이 궁금해지면 아줌마의 억센 생명력에 고개를 끄덕이면 될 일이다. 다수가 공감할만한 소재를 가지고 뚝심 있게 밀어붙인 영화에서 감독의 연출이 퇴색된 것도 이렇듯 특정 캐릭터를 대상화시켜버린 설정과 무관치 않다. 어찌하여 이토록 쉽사리 여배우를 소비시켜 버린단 말인가.

어차피 영화도 산업의 한 부분이고 수익이 생겨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행을 위한 적당한 눈요깃거리를 무조건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치면 영화에 해가되고 감독에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올 수 도 있다. 하물며 신인배우임에랴! 거칠게 말해 (배우에 대한 애정 없이 완성된)영화에 돈이 투자되고 와이드릴리즈 방식으로 개봉되는 것을 보면 한국영화의 위기론이 무색할 지경이다. 볼만한 한국영화가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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