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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10/31 [경계] 소통과 공생의 땅을 향하여

[궤도]가 안겨준 특별한 경험

필진 칼럼 2008/07/08 12:09 Posted by 우디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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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모름지기 영화란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에 따라 컴퓨터 모니터로 DVD를 보곤 했는데, 지난 6월 말 이사를 핑계 삼아 텔레비전을 장만했다. 물론 당분간 시사회나 극장출입이 수월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제법 큰 화면에 화질 좋은 영상으로 감상해 보니 진즉에 결행치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고 또 절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였다. 어찌 알았는지 개봉예정인 <궤도>의 PREVIEW용 DVD가 도착한 것도 이때 즈음의 일이다. 텔레비전을 들여놓고도 짐정리로 보름 남짓 허비한 후에서야 제대로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특별히 김광호의 <궤도>가 인상적이면서 흥미로웠으니, 잊혀져가는 영화형식을 환기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연변출신의 감독 김광호가 연출한 <궤도>는 한마디로 지독하게 느리고 지루하게 응시하다 집요하게 주시하는 영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려 3번을 시도하고서야 끝까지 보았을 정도로 감상자체가 쉽지 않은 영화였는데, 이것은 대사가 없기 때문이 아닌 너무나 단순하게 구성된 영화형식에 기인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나는 <궤도>를 카메라가 주도하는 드문 영화라고 말하고 싶고, ‘응시’에서 ‘주시’로 변화하는 영화미학을 보여주었다고 규정하고 싶다.

감독은 영화 속 인물의 심리적 변화를 카메라의 위치변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말없음으로 일관하며 끌고 가는 이 영화에서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이 변화하는 과정이 인물의 행동뿐 아니라 대상을 잡는 카메라의 위치로도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그다지 어렵거나 심오한 기교는 아니며 과거 무성영화시대의 감독들이 즐겨 썼던 기법이다. 하지만 그간 우리가 보아온 많은 영화들에서 이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은, 인물이나 화자의 입을 통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설명해왔고 이러한 설명을 통해 내러티브가 완성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즉, 서사를 통해 묘사를 대치시켜온 근래의 영화형식과 비교할 때 김광호의 <궤도>는 특별한 이야기를 내놓지 않고도 시공간의 다각적인 변화 없이도 묘사만으로도 서사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할 것이다.

예컨대 벙어리 귀머거리인 여자가 팔 없는 남자의 집에 머물면서 남자의 내적변화를 끌어내기 이전까지를 보여주는 카메라는 언제나 남자의 시선이 여자 위쪽에 위치하는 반면, 어느 순간엔가 카메라의 위치가 뒤바뀜을 통해서, 즉 여자가 남자를 내려다보는 신들을 통해서 여자가 남자 마음속에 자리 잡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때 인물들의 변화에 맞춰 좀 더 세밀하게 보여주고자 감독이 선택한 것은 ‘응시’와 ‘주시’이다. 그러니까 남자의 집에 머물게 된 여자를 바라보고 또 그 남자를 바라보는 둘의 시선의 시작은 ‘응시’에 가깝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것은 ‘주시’로 변한다는 것이다. 막연히 바라봄에서 시작하여 감정이 담긴 시선을 던지고 관찰하는 행위로 이어지는 과정을 통해 감독은 둘의 심리적 변화를 말 한마디 없이도 근거리에 놓지 않고도 살 부딪힘을 제거하고도 일궈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남녀의 심리적 단절을 물리적 거리와 위치로 치환시켜낸 영화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점철되는 가운데 사랑과 애증이 뒤범벅되는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멜로드라마를 아련한 연변의 초록 위에 펼쳐놓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비록 곰살궂은 것과는 거리가 멀고 온전한 대사하나 없을지라도 낯익은 연변의 풍광은 끝 모를 지루함을 상쇄시켜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분명 어디선가 보았을 법한 너무나 평범해서 지루하고 그럼에도 자꾸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초록과 나지막한 언덕아래의 풍경들. 그러나 이것은 관계의 단절 속에서 소통에 목말라 허우적대는 우리들의 낭만적 상상적이 그려낸 전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감독이 선택한 배경이란 겉은 연변이로되 몇몇 장면을 뺀다면 세상 어디라고 해도 무방할, 인간을 둘러싼 보편적 삶의 환경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내가 <궤도>를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은 인물들의 내적 변화와는 무관하게 변함없는 푸름을 보여주었던 어느 마을 풍경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정말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반복적 영상이 부리는 마법이라니!

덧붙여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장광설에 지쳤다면, 너무 빠르게 많은 것들을 보여주는 영화에 식상했다면 연변에서 날아온 김광호의 <궤도>를 볼 일이다. 말 한 마디 없이도 이어지는 감정의 파동과 지루한 동어반복적 카메라 워크에 오기가 나서라도 눈 부릅뜨고 영화를 보는 희귀한 경험을 할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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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소통과 공생의 땅을 향하여

필진 리뷰 2007/10/31 17:15 Posted by 우디79



장 률 감독의 영화에는 배경 음악이 없습니다. 음악은 영화 연출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부분과 전체의 리듬을 조율해주는 수단인 동시에 각 장면의 의도를 관객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매우 효율적인 장치입니다. 따라서 배경 음악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영화란 관객들에게 불친절한 영화입니다. 울라는 건지 웃으라는 건지, 긴장하라는 건지 감동을 받으라는 건지를 미리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스스로 판단하며 영화를 감상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장 률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말이 별로 없습니다. 표정들도 하나 같이 무뚝뚝하기만 합니다. 등장 인물들 간에 대사가 많지 않고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법도 없으니 관객들로서는 이보다 피곤한 일이 따로 없습니다. 그들의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니 장면마다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다양한 사건 사고가 일어나 주는 것도 아닙니다. 카메라는 그저 멀치감치 떨어져서 인물들의 단답형 대사와 행동들을 우두커니 지켜볼 뿐입니다.

영화도 만들기에 따라서는 책 읽는 일 만큼이나 무척 고단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작가가 바로 장 률 감독입니다. 관객들도 그의 영화를 볼 때 만큼은 좀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움직이고 소리를 들려주는 영상물이긴 하지만 연출자가 관객의 손을 부여잡고 주변 사정을 설명해주며 처음부터 끝까지 찾아갈 길을 안내해주는 그런 경험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책을 읽거나 그림을 감상하듯이 관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만 합니다. 장 률 감독의 세번째 장편 <경계>도 일정 부분 관객의 노동을 필요로 하는 작품입니다.

데뷔작 <당시>(唐詩, 2004)에서 아파트 안에만 머물던 감독의 자아가 밖으로 나와 찾아간 곳은 중국의 변방 지대였습니다. 문화혁명 당시 아버지의 투옥으로 어머니와 단 둘이 타지를 떠돌아다녀야 했던 감독 자신의 실제 경험은 <망종>(芒種, 2005)의 조선족 모자 최순희(류연희)와 창호(김박)로 형상화되어 냉혹한 중국 대륙의 현재를 경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경계>에서 최순희 모자(서 정, 신동호)는 다시 한번 바깥 세상에 던져집니다. 탈북자인 젊은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이번에는 중국 국경을 넘어 몽골 땅에 도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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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변방의 조선족이나 국경을 넘어 몽골에 도착한 탈북자나, 남편을 잃은 젊은 여인과 그의 어린 아들이란 필요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주변인이자 이방인입니다. 이들에게 주변 남성들의 존재는 잠재적인 보호자인 동시에 남편과 아버지의 지위를 차지하려 달려드는 위협이기도 합니다. <망종>과 <경계>가 보여주는 설정과 내러티브 상에서의 차이는 중국 남성과 몽골 남성 간의 차이(또는 감독에게 이들에게서 발견한 이미지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타인의 자식들을 친절하게 받아주는 몽골 남성들의 품성이 <경계>의 분위기를 조금은 긍정적으로 이끌어주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경계>의 최순희 모자는 고립된 섬과 같았던 <망종>에서와 달리 어디론가를 향해 이동하는 존재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들은 울란바토르의 한국 대사관을 통해 남한으로 보내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인 탈북자들입니다. 여기에 언어와 문화적 차이는 있지만 자신들을 받아주고 지켜주는 기러기 아빠 항가이(O. 바트을지)가 또 다른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이들이 함께 소통과 공생이라는 희망의 땅으로 나아가는 일은 여전히 쉽지가 않습니다. 그나마 바늘 같은 숨쉴 구멍 조차 허락하지 않으며 절망의 밑바닥을 박박 긁게 만들었던 전작과 달리 <경계>는 이제 저 앞에 다리 하나만 건너면 희망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으리라는 한줄기 빛을 보여줍니다.

김기덕 감독의 <섬>(1999)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 있던 서 정이 두번째 최순희를 연기했습니다. 단발 머리에 시선과 고개를 똑바로 쳐드는 법이 없고 특이한 종종 걸음을 걷곤 하던 <망종>의 최순희가 서 정의 연기를 통해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아들 창호는 <망종>을 보신 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실테지만 어쨌거나 <경계>에서는 좀 더 자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막연한 희망의 고난 길을 계속 걷기 보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아버지 곁에 머물기를 원하며 어머지 최순희와는 여전히 상반된 태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 심정이란 모자가 한결 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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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인근의 초원 지대에 사는 중년의 항가이는 몽골의 국민배우 O. 바트을지가 연기했습니다. 아픈 딸을 데리고 아내가 울란바토르로 간 사이 최순희 모자를 자기 집에 머물도록 허락해줍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그 곳 땅에 초원을 살리기 위한 묘목을 사다 심는 일입니다. 남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이사를 서두는 와중에 혼자 고집스럽게 희망의 나무를 심고 물을 퍼다 나르는 인물 항가이는 다름 아닌 장 률 감독의 또 다른 자아입니다. 어쩌면 감독의 새로운 자아가 전작에서의 자아와 만났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내는지를 지켜보는 일 또한 <경계>를 바라보는 관전 포인트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전작에서와 달리 <경계>의 카메라는 패닝을 자주 합니다. 먼 거리에서 인물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따라가며 좌우를 둘러보는 식입니다. 사람이 자리를 옮긴다고 해봤자 고개 한번 돌리면 금방 찾을 수 있다는 몽골의 초원, 그곳의 환경을 작품 속에 반영시킨 결과입니다. 이처럼 장 률 감독의 작품들은 언제나 감독 자신이 느낀 내면적 풍경을 작품 속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공간과 작가 사이의 변증법적 산출물이 바로 장 률 감독의 영화입니다. 이제 적막 속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 률 감독의 영화와 보다 적극적으로 영화를 읽어내려가는 관객들 사이의 정반합이 이루어질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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