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어딜가나 "Made in China"이다. 정말이지 중국이라는 나라는 공산품 생산에 있어서는 최강국처럼 느껴진다. 그 많은 인구수만큼이나 숨막힐 것 같은 대량의 제품들이 중국에서, 중국 사람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다. 적은 임금으로 부려먹을 수 있는 충분한 노동력때문에 어느덧 중국은 약속의 땅이 되어버렸다. 특히나 '옷'의 생산에 관해서는 말할나위 없이 황금지대다. 그렇게 생산된 옷들은 세계 각 나라에 전해지고 우리는 상표에 표시된 "Made in China"라는 마크를 통해 우리가 입는 대부분의 옷의 생산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지아장커는 특이하게도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들(관리자가 아닌 노동자)을 관찰한다. 누구도 잘 관심갖지 않는 공장 노동자들을 포착하는 순간부터 <무용>은 시작된다. 카메라 속에는 마치 신경숙 소설의 <외딴방>에서나 등장할 법한 사람들이 핏기도 없는 얼굴로 생산라인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고단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들의 표정만으로도 '삶의 무료함'이 묻어난다. '하고 싶어서 함'이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함'이라고 써진 표정들은 닫혀진 문을 문틀과 문틀 사이로 넘고, 비좁은 구내식당에서 서서 점심을 청하며, 고질적인 병으로 보건의에게 상담을 받는다. 지아장커는 생산라인에 서서 반복적으로 똑같은 옷을 만드는 노동자들을 패닝으로 보여주는데 그 카메라 또한 그들처럼 무심하다. 패닝을 통해 라인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카메라가 이동해 나가지만 오히려 똑같은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선것처럼 그들에겐 웃음의 꽃이 없다. 웃음없이 만들어진 옷들은 이동하고 이동해서 노동자들을 결코 구원할 수 없는 중산층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두번째 이야기는 자연을 닮은 옷만들기를 이상으로 가지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마커의 일상으로 향한다. 그녀는 한참 파리에서 자신의 패션쇼를 준비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 대량생산으로 똑같이 만들어지고 인간의 숨결이 들어있지 않은 공산품은 그녀에게 악취를 풍길 뿐이다. 그녀는 일일이 수작업을 통해서 흙내음이 느껴지는 옷들을 만들고 그것을 '무용'이라는 브랜드로 승화시켜 사회에 내놓으려 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거름진 땅은 우리가 입는 옷이 놓여질 공간이 되고 하나하나의 옷에 의미를 더하게 한다. 하지만 난 그녀의 '친환경주의'적인 태도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자연에 맞닿은 자연을 보존하는 옷을 통해 혼탁해진 지구의 환경을 구하려 하지만 정작 그녀가 만들어 낸 옷들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용'되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전작인 <동>에 이어서 아티스트 2부작인 이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마커를 지아장커 역시 결코 옹호하려 들지 않았음을 난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철저하게 첫번째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반론인 두번째 이야기는 옷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 광산마을 '샨시성'으로 흘러간 마커의 고급스러운 차를 바라보고 있는 한 광부의 무표정한 모습에서 끝이 난다. 마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를 몰고 있는 마커에서 이야기는 더이상 진행되지 않고 철저하게 그녀를 배반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진행될거라 믿었던 관객들은 순간 의아해 할 것이다. 더구나 그가 즐겨 그의 영화에 등장시키는 마음의 고향같은 곳. 바로 그가 태어난 샨시성의 외딴 곳을 비추고 있다.
광부는 표정이 없지만 그렇다고 첫번째 이야기에 등장했던 고난한 공장 노동자들의 표정과는 사뭇 다르다. 그에게는 어떠한 고단함보다는 평범한 삶의 흔적들이 묻어난다. 무언가가 들어있는 봉지를 가지고 그는 길을 걷는데, 얼마 후 그가 도착한 곳은 한 허름한 수선집이다. 옷수선을 하기 위함이다.
수선을 마치고 2위안을 달라고 하는 주인앞에서 그는 3위안을 주려고 하면서 웃지만 그렇다고 주인은 더 받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카메라 속에서 지아장커의 여유가 묻어난다. 생각해 보면 그의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가난한 서민들이었고, 작은 도시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욕심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예전에는 옷도 만들었다는 한 광부와 그의 아내는 이제는 돈이 없어서 다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이미 평범한 삶이 제 옷에 맏기 때문에.남성의 몸을 다루는 데에 이미 익숙한 지아장커는 석탄가루로 인해서 온 멈이 까맣게 된 광부들의 샤워장면을 통해서 굉장한 몸의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감동'과 비슷한 것이다. 손톱까지 까맣게 된 광부들은 마치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때를 밀고 있는 것처럼 몸을 닦고 있다. 그들의 더럽혀진 몸에서 살아가는 흔적이 느껴지는데 그래서인지 전혀 누추해 보이지 않고 아름다워보이기까지 한다. 전율은 그들이 벗어난 작업복에 카메라가 비추어졌을 때 '절정'을 이룬다. 그들의 작업복은 매일같이 더럽혀져 빨아도 빨아도 소용없을 만큼 색깔이 변해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살아가는데 정말로 필요한 보물인 것이다. 마커의 눈에는 무시의 대상이었던 같은 표정의 공장 노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업복이 그들에게는 살아가는 땅의 흙이 묻어있고 땀내가 가득한 꼭 있어야 될 물건이라는 것이라는 걸 확인했을 때의 카메라는 역시 무심하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자는 이미 떨리고 있다. 그래서 마커가 이야기 했던 '무용(쓸없음)'이라는 브랜드는 여기서 철저히 '무용지물'이 되고 누구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 작업복이 '유용(쓸있음)'이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정작 지아장커가 전율의 순간을 세번째 이야기에 와서야 포착해 내는 것도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가난한 민중들의 소세계에 가깝다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무용'이라는 제목이 상징하는 의미는 남다르다. 디자이너 마커는 동명의 브랜드를 창조해 내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쓰지만, 실상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소수뿐이고, 절실히 필요한 것은 환경을 생각하는 옷이 아니라 누군가가 편히 입고 살아갈 수 있는 옷이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난 지아장커가 왜 엉뚱한 길을 계속해서 가려고 할까 의문을 가져봤다. 누구보다도 중국의 급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던 그가 예술가에 대한 3부작을 이어나간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용>은 완전히 내 생각이 빗나갔음을 반성하게끔 하는 작품이었다. 그는 오히려 그들을 통해서 자기가 그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다시금 사실적으로 정리하려고 함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광부들이 씻는 샤워실에 아무렇게나 올려진 땀내 가득한 옷이 절실히 쓸모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분명 누군가는 맘 속 깊이 감동하게 된다는 것이 그를 누구도 제1의 시네아스트에서 내려놓지 않는 이유이다
이제는 어딜가나 "Made in China"이다. 정말이지 중국이라는 나라는 공산품 생산에 있어서는 최강국처럼 느껴진다. 그 많은 인구수만큼이나 숨막힐 것 같은 대량의 제품들이 중국에서, 중국 사람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다. 적은 임금으로 부려먹을 수 있는 충분한 노동력때문에 어느덧 중국은 약속의 땅이 되어버렸다. 특히나 '옷'의 생산에 관해서는 말할나위 없이 황금지대다. 그렇게 생산된 옷들은 세계 각 나라에 전해지고 우리는 상표에 표시된 "Made in China"라는 마크를 통해 우리가 입는 대부분의 옷의 생산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지아장커는 특이하게도 그것을 생산하는 사람들(관리자가 아닌 노동자)을 관찰한다. 누구도 잘 관심갖지 않는 공장 노동자들을 포착하는 순간부터 <무용>은 시작된다. 카메라 속에는 마치 신경숙 소설의 <외딴방>에서나 등장할 법한 사람들이 핏기도 없는 얼굴로 생산라인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고단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들의 표정만으로도 '삶의 무료함'이 묻어난다. '하고 싶어서 함'이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함'이라고 써진 표정들은 닫혀진 문을 문틀과 문틀 사이로 넘고, 비좁은 구내식당에서 서서 점심을 청하며, 고질적인 병으로 보건의에게 상담을 받는다. 지아장커는 생산라인에 서서 반복적으로 똑같은 옷을 만드는 노동자들을 패닝으로 보여주는데 그 카메라 또한 그들처럼 무심하다. 패닝을 통해 라인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카메라가 이동해 나가지만 오히려 똑같은 사람들이 줄지어 늘어선것처럼 그들에겐 웃음의 꽃이 없다. 웃음없이 만들어진 옷들은 이동하고 이동해서 노동자들을 결코 구원할 수 없는 중산층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두번째 이야기는 자연을 닮은 옷만들기를 이상으로 가지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마커의 일상으로 향한다. 그녀는 한참 파리에서 자신의 패션쇼를 준비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 대량생산으로 똑같이 만들어지고 인간의 숨결이 들어있지 않은 공산품은 그녀에게 악취를 풍길 뿐이다. 그녀는 일일이 수작업을 통해서 흙내음이 느껴지는 옷들을 만들고 그것을 '무용'이라는 브랜드로 승화시켜 사회에 내놓으려 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거름진 땅은 우리가 입는 옷이 놓여질 공간이 되고 하나하나의 옷에 의미를 더하게 한다. 하지만 난 그녀의 '친환경주의'적인 태도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였다. 자연에 맞닿은 자연을 보존하는 옷을 통해 혼탁해진 지구의 환경을 구하려 하지만 정작 그녀가 만들어 낸 옷들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용'되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전작인 <동>에 이어서 아티스트 2부작인 이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마커를 지아장커 역시 결코 옹호하려 들지 않았음을 난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철저하게 첫번째 이야기에서 등장하는 공산품을 만들어내는 것에 대한 반론인 두번째 이야기는 옷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 광산마을 '샨시성'으로 흘러간 마커의 고급스러운 차를 바라보고 있는 한 광부의 무표정한 모습에서 끝이 난다. 마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를 몰고 있는 마커에서 이야기는 더이상 진행되지 않고 철저하게 그녀를 배반하는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진행될거라 믿었던 관객들은 순간 의아해 할 것이다. 더구나 그가 즐겨 그의 영화에 등장시키는 마음의 고향같은 곳. 바로 그가 태어난 샨시성의 외딴 곳을 비추고 있다.
광부는 표정이 없지만 그렇다고 첫번째 이야기에 등장했던 고난한 공장 노동자들의 표정과는 사뭇 다르다. 그에게는 어떠한 고단함보다는 평범한 삶의 흔적들이 묻어난다. 무언가가 들어있는 봉지를 가지고 그는 길을 걷는데, 얼마 후 그가 도착한 곳은 한 허름한 수선집이다. 옷수선을 하기 위함이다.
수선을 마치고 2위안을 달라고 하는 주인앞에서 그는 3위안을 주려고 하면서 웃지만 그렇다고 주인은 더 받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는 카메라 속에서 지아장커의 여유가 묻어난다. 생각해 보면 그의 영화들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가난한 서민들이었고, 작은 도시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욕심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예전에는 옷도 만들었다는 한 광부와 그의 아내는 이제는 돈이 없어서 다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이미 평범한 삶이 제 옷에 맏기 때문에.
남성의 몸을 다루는 데에 이미 익숙한 지아장커는 석탄가루로 인해서 온 멈이 까맣게 된 광부들의 샤워장면을 통해서 굉장한 몸의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감동'과 비슷한 것이다. 손톱까지 까맣게 된 광부들은 마치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때를 밀고 있는 것처럼 몸을 닦고 있다. 그들의 더럽혀진 몸에서 살아가는 흔적이 느껴지는데 그래서인지 전혀 누추해 보이지 않고 아름다워보이기까지 한다. 전율은 그들이 벗어난 작업복에 카메라가 비추어졌을 때 '절정'을 이룬다. 그들의 작업복은 매일같이 더럽혀져 빨아도 빨아도 소용없을 만큼 색깔이 변해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살아가는데 정말로 필요한 보물인 것이다. 마커의 눈에는 무시의 대상이었던 같은 표정의 공장 노동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작업복이 그들에게는 살아가는 땅의 흙이 묻어있고 땀내가 가득한 꼭 있어야 될 물건이라는 것이라는 걸 확인했을 때의 카메라는 역시 무심하지만 그것을 보고 있는 자는 이미 떨리고 있다. 그래서 마커가 이야기 했던 '무용(쓸없음)'이라는 브랜드는 여기서 철저히 '무용지물'이 되고 누구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 작업복이 '유용(쓸있음)'이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정작 지아장커가 전율의 순간을 세번째 이야기에 와서야 포착해 내는 것도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가난한 민중들의 소세계에 가깝다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무용'이라는 제목이 상징하는 의미는 남다르다. 디자이너 마커는 동명의 브랜드를 창조해 내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쓰지만, 실상은 그것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소수뿐이고, 절실히 필요한 것은 환경을 생각하는 옷이 아니라 누군가가 편히 입고 살아갈 수 있는 옷이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난 지아장커가 왜 엉뚱한 길을 계속해서 가려고 할까 의문을 가져봤다. 누구보다도 중국의 급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던 그가 예술가에 대한 3부작을 이어나간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무용>은 완전히 내 생각이 빗나갔음을 반성하게끔 하는 작품이었다. 그는 오히려 그들을 통해서 자기가 그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다시금 사실적으로 정리하려고 함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광부들이 씻는 샤워실에 아무렇게나 올려진 땀내 가득한 옷이 절실히 쓸모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분명 누군가는 맘 속 깊이 감동하게 된다는 것이 그를 누구도 제1의 시네아스트에서 내려놓지 않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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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6세대 감독들이란 누구인가. 저자들은 "1960년대 생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 사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 활동을 시작한 젊은 영화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1989년 천안문 운동을 직접 경험한 세대로 상업주의 문화, 탈이념화, 탈정치화 조류 속에서 개인의 생존 체험과 불안정한 심리 상황에 관심을 갖는다"고 정의한다. 문화대혁명으로 폐쇄 당했다 다시 개교한 베이징영화학교에서 공부한 첫 세대들인 이들에게 천안문 운동은 더 없이 중요하다. "복잡한 문화현실과 불만스러운 5세대에 대한 전복으로서 등장한" 6세대 감독들은 자본주의 상업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개성적인 영화관을 드러내는 동시에 주선율 영화와 같은 주류 상업 영화를 거부한다.
우선 2006년 베니스 영화제 금사자상을 수상한 <스틸 라이프>의 배경은 지난 2006년 완공된 샨샤(三峽)댐에 묻혀버린 펑지에 지방. 영화 속 공무원이 "물론 문제는 있죠. 2천 년 된 도시가 단 2년 만에 헐렸으니까요. 문제가 있으면 천천히 해결합시다"라고 말하는 곳이다. 주인공은 광부 한산밍과 간호사 션홍. 두 사람은 16년 전 돈을 주고 사와 자신의 딸까지 낳았지만 곧바로 헤어져야 했던 전처와 바람을 핀 남편을 만나러 각기 이 지역을 찾는다. 중국식 개발의 극단을 보여주는 샨샤댐은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이 아닌 국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선택권"을 잃게 했다. 담배, 술, 차, 설탕 등 중국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네 가지 필수품으로 챕터를 나눈 이 작품은 한산밍과 션홍의 여정 사이로 파괴와 개발이라는 중국 전체의 변화상을 은유한다. 
한국에서도 일찌감치 소개된 <귀신이 온다>는 <붉은 수수밭>의 배우 출신 지앙원(姜文)의 연출작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항일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우화 같은 드라마다. 또한 권총을 잃어버린 소도시 경찰관을 주인공으로 삼은 루추안의 <사라진 총>은 여전히 국가와 권력에 대해 탐구하지만 소재는 여느 상업영화만큼이나 친숙하다. 실직 노동자와 창녀의 보듬음을 그린 노동자 출신 시인 감독 왕차오(王朝)의 <안양의 고아>는 산업화가 낳은 타자들을 어루만진다. 그리고 동성애를 주제로 삼은 장위엔의 <동궁, 서궁>과 다이스지에(戴思杰)의 <식물학자의 딸>, 상하이의 젊은이들을 주인공으로 택했지만 작가주의에 가까운 몽환적 백일몽과 일본인과의 낭만적인 로맨스로 갈리는 로우예(婁燁)의 <슈주>와 장이바이(張一白)의 <상하이의 밤>까지. 이렇게 중국 6세대 영화는 한마디로 단정 짓기에는 힘들지언정 분명 동시대성을 잃지 않는 힘과 함께 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고 있다.
조금씩 나이를 먹고 있는 그들의 영화를 다시금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급속도로 자본주의와 민족주의를 찬양하고 있는 중국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대중적 예술가들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중국 6세대 감독들은 점점 더 할리우드 산업과 닮아가며 동시대성과 비판정신을 잃어 가고 있는 한국 영화계와 우리 관객들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가까운 이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화'라는 민족주의에 함몰되고 있는 중국 젊은 세대들이 무협과 코미디 일색으로 현실을 지우는 주류 다이엔 영화보다 6세대 감독들을 응원해야하지 않을까. <중국 6세대 영화, 삶의 본질을 말하다>는 이들 6세대 감독들에 대한 친절한 길라잡이 역할을 해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