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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0.02.11 10:39 Posted by 비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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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예 그 일을 사랑

    2012.08.29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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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석중

영화 관람 환경에 대한 또 다른 생각


극장. 극장에서 우리는 연극을 보거나 혹은 연주를 듣거나 또는 영화를 본다. 극장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극장은 오로지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극장의 경제적 물적 토대를 소유한 사람에게도 역시 그러하다. '극장주'라는 사람은 극장을 가졌으되, 그것을 끊임없이 극장을 찾는 이들에게 내놓아야만 하는 사람이다. 혹은 그런 척 이라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장사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예를 들자면 멀티플렉스에서 관객이 받게 되는 살갑도록 따가운 '친절함‘같은 것들.

이야기를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으로 제한시켜서. 영화가 관객을 최종적으로 만나는 곳은 극장이다. 관객이 영화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언제나 관객을 찾는다. 영화를 보고 '거기에 영화가 있다'고 말해 줄 수 있는, 기억할 수 있는 관객을 찾는다. 그렇게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극장이다. 관객은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극장은 그러니까 영화의 최전선이 된다. 그곳은 전장이며 애틋한 사랑이 맺어지는 곳이다. 악다구니를 치며 촬영한 현장에서, 편집기사와 끊임없는 신경전을 벌일 수밖에 없는 편집실에서, 기획 단계에서의 투자자와 기획사와의 끝이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들. 그런 지난한 과정들을 통해 영화는 만들어진다. - 서두르지 말자. 영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 영화는, 최종적으로 자신에게 합당한 관객을 만나야만 한다. 그 때 정말로 영화는 완성된다. 그런데 여기서. 최초의 감독의 혹은 기획자의 머릿속에서 상상되었던 영화와, 극장에 최종적으로 걸리는 영화는 같은 것일까.


영화는 위대한 타협과 우연의 산물이다. 그 타협이 행복한 것이 될 수도, 또 그 우연이 구차한 것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흔히 감독들은 자신들이 만든 영화를 개봉한 극장에서 보면 참담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화면비와 음향 때문이다. 공들여 짜맞추어낸 화면이 개봉 극장에서는 자신의 의도대로 보여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조금 감안하고 이야기하자면, 일반적으로 관객석에 경사가 있는 극장은 그 만큼 화면의 외곡과 유실이 크다. 영사기와 화면의 높이가 차이 날수록, 관객이 볼 수 있는 화면의 손실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이론적으로 영사기에서 나오는 빛은 영사막에 90도의 각도로 조사되어야 화면의 왜곡이 최소화된다. 또한 영사기는 화면정중앙에 위치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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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부분의 멀티플렉스가 이런 기준을 준수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무엇보다 건물 설계 과정에서 영사기의 위치와 극장 내부 설계가 함께 진행되어야 하지만, 멀티플렉스는 안전한 입지 확보를 위해 상가건물에 함께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극장 전용의 건물로 설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이 경우, 건물의 내구성 확보를 위한 기둥과 자잘한 설비 배선으로 인해 영사기가 화면 정중앙에 위치할 수 있는 확률은 적어진다. 기둥을 피하거나, 또는 배선 관계로 인해 영사기가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우도 발생한다. 심하면 영사기의 치우침으로 인해 화면 왼쪽에 들어가는 자막의 포커스가 맞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반대로 자막의 포커스를 맞추면 오른쪽으로 갈수록 화면의 포커스가 맞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예가 아닌, 실제로 영업중인 어떤 멀티플렉스의 경우이다.

신촌에 위치한 멀티플렉스 아트레온의 경우 심한 키스톤 현상으로 인해 농담처럼 '스타워즈 극장'이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아래에서 위로 갈수록 심하게 좁아지는 화면은 마치 스타워즈의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리게 한다. 우스갯소리 같지만 웃을 수 없는 현실이다. 이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최초 설계 단계부터 잘못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아무리 만곡 스크린을 사용하고, 스크린 아래쪽을 조금 들어 올려서 영사각도를 맞춘다 해도, 근본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심하게 경사진 멀티플렉스 상영관은 이러한 왜곡 현상을 제어 할 수 없다. 결국 이것은 아트레온만의 문제가 아니다.

위에 예로 든 사운드의 문제도 있지만, 관객이 보는 것만으로 국한 시켜 이야기 하자면, 결국 관객은 감독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화면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것 역시 처음에 이야기한 '위대한 타협과 우연'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극장 측에서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다르다.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의 화면 사이즈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비스타 비전(1.85:1)과 시네마 스코프(2.35:1) 두 가지가 있다. 멀티플렉스는 이 두 개의 화면 사이즈를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것 말고도 영화에는 다양한 화면 사이즈가 있다. 4:3, 1.33:1, 1.37:1, 1.66:1, 1.75:1, 1.85:1 이렇게 다양한 사이즈의 화면 모두를 지원하는 극장은 현실적으로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맞는 렌즈와 관련 부품이 구비되어야 하며, 영사막의 다양한 세팅이 가능해야 한다. 여기에 영사기사의 실무교육과 운용능력 배양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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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대중영화는 비스타 비전과 시네마 스코프 둘 중의 하나로 만들어진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대중영화의 시각은 위의 두 개의 사이즈로 ‘표준화’ 되어 있다. 물론 표준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표준화는 영화처럼 다양한 ‘공정’을 거쳐야만 하는 작업의 효율성을 더해준다. 그러나 만드는 이의 시야와 보는 이의 시야가 이렇게 단촐하게 표준화 되는 경우,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영화를 통해 보는 세계의 더 다양한 시각적 가능성들을 놓치게 될 수도 있다.

이제부터 이 글의 핵심. 구스 반 산트는 몇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데뷔 이후 계속해서 4:3의 비율로 영화를 촬영했다. 그것은 자신의 영화가, 자신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세계가 관객에게 4:3의 비율로 보여지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그의 데뷔작 <말라노체>는 4:3의 비율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한국에서 개봉된 <말라노체>는 1.85:1, 비스타 비전 사이즈의 <말라노체>다. 결론적으로 두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다. 왜냐하면 화면의 아래위가 (거기에 더해 양 옆 까지) 잘려나간 그것에서 우리는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영화를 수입했으면서 또한 상영주체이기도 한. 그러니까 수입사이면서 극장 운영 주체이기도 한 스폰지 측에서 말 한 것처럼 이 영화의 해외 배급을 총괄하는 회사와, 영화를 만든 감독의 '상영권고방식'이 특별히 없는 경우 해당 극장의 사정에 맞추어 상영을 해도 문제는 되지 않는다. - '문제는 되지 않는다.' 라는 부분에 주의 - 그러나 상영권고방식을 예로 들어 해명 할 수 있는 것은 '영화사이자 수입사 스폰지'의 경우에만 해당된다. 극장으로서의 '스폰지 하우스'라면 좀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위에 장황하게 늘어놓았듯이, 극장은 영화가 관객을 만나는 최전선이다. 극장은 영화를 감독의 의도에 최대한 가깝도록 상영할 의무가 있다. 아무리 특별한 상영권고방식에 대한 부분이 없었다 하더라도, 극장에서 실제로 상영되는 화면을 검토해서 4:3 화면이 무리 없이 전체적으로 1.85:1의 화면 속에서 소화가 될 수 있는지의 범위를 결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말라노체>속의 세계는 아래위가 좁은 1.85:1의 화면에 들어가기엔 지나치게 가깝고, 가파르다. 이 영화는 인물들의 표정보다는 그 들의 몸이 가지는 세부의 흔적들을 스케치하듯 스쳐가는 것처럼 잡아내었지만, 그 모두를 보기에 우리가 만나고 있는 시야는 너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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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 전의 <라스트 데이즈>가 그러했으며, 스폰지 하우스가 아닌,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열렸던 '팡테옹 드 시네마' 특별전에서 상영된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가 그러했다. 장 폴 벨몽도와 진 셰버그가 함께 샹젤리제 거리를 걸어가는 유명한 롱테이크 장면에서, 벨몽도의 춤추는 것처럼 주름진 멋들어진 이마는 영사막의 위쪽, 어둠속에서 넘실거렸으며, 도망자의 것 치고는 지나치게 여유작작한 발걸음은 자막 아래 어디쯤에서 사라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광화문 시네큐브는 아트플러스 라인에 등록되어 있는 극장이며, 흔히 말하는 ‘예술 영화’를 집중적으로 상영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의 상영 환경은 일반 멀티플렉스 극장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결국 광화문 시네큐브, 또는 스폰지 하우스 모두 일반적인 멀트플렉스 수준의 극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보여주기만 하는 곳이 아니다. 아니, 이 보여준다는 단어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있는가. 극장은 영화를 ‘제대로’ 보여주어야만 한다. <말라노체>는 1985년, 미국 포틀랜드의 어느 거리에서 촬영 되었다. 그 후로 이십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우리는 서울의 한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본다. 그 만큼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감독이 보고, 생각하고, 꿈꾸었던 것과 거의 동일한 모습으로 영화를 본다는 것. 그것은 영화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기쁨이면서 동시에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비이기도 하다. 하나의 영화를 통해 우리는 얼굴도 잘 알지 못하는 지구 건너편의 누군가와 동일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감독의 의도한 사이즈, 감독의 생각한 세부가 포함된 화면을 최대한 살려내는 것. 그것이 바로 극장이 '하는' 것이며 할 수 있는 것, 해야만 하는 일이다.

- 이 글은 스폰지 하우스 카페 혹은 또 다른 관련 공간에 등록할 수도 있을 있을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한 영화사 스폰지측에서는 더 이상의 의견 개진에 대해 난색을 표명했다. 신기하게도 그 이후 이 건에 대한 회원들의 게시물은 아예 올라오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 문제는 (적어도 스폰지하우스 카페라는 온라인 공간에서는)더 이상 이야기 되어서는 안되는 문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문제이다.

이 글이 이러한 '정책'에 대한 우회 공격,혹은 뒤통수치기 같은 것이 될 수 있을까? 받아들이는 쪽에 따라서는 그렇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극장 스폰지 하우스뿐만 아니라, 이 땅위의 모든 '극장'이라면, 그것도 예술 영화 전용관을 표방한다면 더욱 더 짚고 넘어가야만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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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애
30분이면 족했다. 30분만 집중한다면 감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직원의 안내방송 말이 맞았다. 월요일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전석매진이라는 말이 나를 의외의 기대감으로 몰아넣은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대감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알프스의 깊숙한 산 속 고즈넉하게 있는 수도원은 그 주위의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속세를 벗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카메라는 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카메라는 수사들의 옷자락이나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초점을 맞춰 클로즈업하는데, 보이는 먼지까지도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다. 딱 거기까지, 거기까지는 영화가 좋았더랬다.

영화의 큰 흐름은 수사들이 독방에서 성경말씀을 읽으며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자란 머리를 깎고, 새로운 수사들이 주님 앞에 당신의 제자가 되겠노라 맹세를 하는 등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미묘한 계절의 변화에 맞춰 겨울에서 봄을 거쳐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이 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가장 먼저 영화를 보면서 계속 방해를 받은 것은 중간 중간에 반복적으로 삽입되는 성경말씀의 일부 글이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는 말 등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되고 있었다. 영화 자체는 상당히 절제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표현 방법은 과하게 넘치고 있었다. 비슷한 장면이나 말의 반복으로 나는 마치 지하철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대는 사람들과 이 영화가 다를 게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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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여러 관객들이 이 영화를 호평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호평이 정말 제대로 받아 마땅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유인즉슨, 이 영화는 자기만족에 빠졌기 때문이다. 엔딩부분에 눈 먼 수사가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보지 못하게 된 것 또한 주님이 나를 배려해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눈이 먼 것 또한 내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로써 주의 사랑을 나로 하여금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행복하다" 내가 느끼기엔 자기위안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지인과 종교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종교의 가장 큰 역할은 자기위안이라는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즉, 슬픔을 견디게 해준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셔서 슬프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곁으로 간 것이기 때문에 기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슬픈게 슬픈게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종교를 찾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 영화는 비슷한 위치에 있는, 그러니까 수녀, 스님, 기타 종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위로 차원으로 만든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소통의 범주 또한 좁다. 나는 그 카테고리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그 위로를 이해하기가 버거운 부분이 많았다. 찍는 사람, 찍히는 사람, 보는 사람이 그 '위대한'이란 말을 얼마나 이 영화에 맞고, 맞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수사들은 자신의 절제를 통한 신과의 교섭이 얼마나 높아져가는지를, 감독은 16년을 기다려 앞으로도 없을 수도원의 모습을 담는 고귀한 일이라는 자기만족에 빠져서 한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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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절박한 자들(만)이 말한다

필진 리뷰 2010.01.21 06:07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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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석중

 진실의 장소

술을 먹고 들어온 중식은 형에게 말 한다. 아마도, 은모가 준비한 모종의 '이벤트' 전날의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 비가 내렸다. 중식은 젖어있었고, 꽤 많이 취해있었다. 귀농을 위해 자신이 떠난 뒤 '이 곳'을 부탁하는 형의 제안에, 중식은 '해서는 안 되는 말,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에 자신은 자격이 없다한다. 그리고 중식은 자신의 방에 돌아와 눕는데, 이어지는 스승의 날 시퀀스는 마치 중식의 꿈처럼, 혹은 악몽처럼 연결된다. 아이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목덜미를 드러내고 '중식 씨, 사랑해요'라고 입을 맞추어 말한다. 중식은 놀라서 쓰러진다. 중식의 첫사랑의 기억은 재현된 악몽으로 귀환한다.

<파주>는 말에 관한 영화이다. 세상의 어느 누가 적절한 말과 부적절한 말, 할 수 없는 말과 해도 되는 말을 선별 할 수 있을까? 말이 입 밖으로 던져진 바로 그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말의 무게와 질감을, 그 생김새와 밀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자신이 한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진실은 (당신과 나사이의)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은 반드시 말을 한다는 행위를 통해서 선별된다. 정확히 그 순간.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던져진 말은 누구도 거두어들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은 말하여질 수 없다. 진실은 침묵을 통해 남겨질 수 있는, 세상 마지막의 장소이다.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은모의 혼란은 진실과 사실을 동일한 것으로 유추하기 때문이다. 은모가 ‘형부’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말하여 질 수 없는 ‘진실’ 이었다. 은모는 진실을 아는 것이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진실이란 마음이 묶여있는, 마음이 정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진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은 거짓이라고 믿어도, 누군가의 마음은 그 곳에 묶일 수 있다.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것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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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는 중식의 말은 자신의 의지로 인해 말하여진 것이 아니라, 침묵을 지킬 것을 결심한 중식이 더 이상 꺼낼 말을 찾지 못해 수동적으로 은모에 의해 끄집어내어진 말이다. 은모가 진실을 알고 싶다고 할 때, 그것은 언니가 왜 죽었는지에 관해 알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자신이 언니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지 중식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식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그의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를 알려는 것이다. 은모는 사랑을 갈구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구한다.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귀의 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끈질긴 모색과 탐색.

은모의 요청에 중식은 엉뚱하게도 ‘단 한 시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은모의 절망은 사랑받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용서 받지 못함에 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은모는 알고 있다. 이미 언니는 죽어버렸고 진실은 말하여질 수 없다. 말하여지는 순간 진실은 진실이 아닌 것, 듣는 이가 원하는 것, 혹은 말하는 이가 원하는 무엇이 된다. 중식은 침묵하고 (또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거짓을 말하거나, 그러니까 진실은 얼마나 연약한가. 거짓으로 감추어지는 진실은) 은모는 형부가 보험사기를 저질렀다는 (다른 이들 에게는 진실과 동의어인)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꺼내어진 거짓은 사실로 굳어진다. 딱딱하고 창백하게.

은모는 계속해서 정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길 위로 떠난다. 살아있는 자는 누구도 은모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은모는 (다른 사람의) 어떠한 말도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떠돌 수밖에 없는 은모의 운명은 우리들 대다수의 운명과, 혹은 시간들과 영화 바깥에서 (필연적으로) 겹쳐진다. 영화 <파주>의 지독한 농담. 혹은 벗어날 길 없는 결정론.


말을 하지 않는 것. 침묵의 주식

영화 속에서 말들은 누군가의 입김과 함께 공기 중에 떠돌거나, 벽에 걸린 걸개위에서 펄럭이거나, 거칠게 그은 낙서로 벽 위에 남겨진다. 벽과 그 위의 말들은 시간이 지나 부서지거나 무너질 것이다. 그 위로 새로운 집과 건물과 도시가 세워질 것이다. 철대위, 이 절박한 이들이 내뱉은 말들. 그 말들은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었)다. 오직 이 영화 속에서, 절박한 자들만이 말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은 하릴없이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말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폐허와 침묵뿐이다. 희망과 절망마저도 사라져버린 명백하고 단단한 현실의 거죽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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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영이 연기한 나이트클럽 사장은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오직 '전언'의 형태로만 육화된다. 침묵함으로써 권력은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을 소유한다. 부재함으로써 권력은 편재한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설치된 CCTV의 눈초리가 상정하는, 그 뒤의 모든 감시의 체계들. 은모가 망연하고도 집요하게 응시하는 복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은모가 본 것은 말의 흔적이 아니라, 침묵이 단단히 현존하는 공간이다. 침묵은 어떠한 말들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기형도는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있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불행이도 침묵의 주식은 누구나 가지지 못한다. (매주 '라듸오'에서 정례 방송을 하던 이명박은 마치 복화술사처럼 정운찬을 내세운다. '너무 말이 많았던' 이명박은 <올드보이>의 이진우에게 혀가 잘리기 전에 교활하게도 침묵의 주식을 사들이는 것을 선택했다. 이 기묘한 영화와 현실의 참조.)

철거용역들의 포크레인 공격을 막기 위해 화염병 사용을 제안하는 중식은 자신이 ‘책임을 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책임을 지지 못한다. 은모가 푸념했듯, (말은) '힘이 없'다. 중식은 자신이 '현역'이던 시절 그대로, 화염병으로 경찰이 올 때까지 용역들의 접근을 막고, 경찰이 몰려오면, 그 때 (시위 전력이 있는) 자신만 구속하는 조건으로 투쟁을 접으면 승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이상 중식은 경찰이 구속하고 싶을 정도로 중요인물이 아니다. 다가오는 철거 용역들을 향해 중식이 외치는 '주거는 기본적인 인권이다'라는 구호는, 집이 주거 공간 보다는 (남들보다 빠르게 선점하고 되파는 것으로) 개인의 재화를 기형적으로 증식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시대에, 뒤늦게 도착해버린 건조한 외침이다.

‘이 일을 왜 하는 거에요? 이 일이 형부에게 무슨 보람이 되죠?’ 라는 은모의 말에, 그리고 의외로 솔직하고 담담했던 중식의 대답을 들어버린 우리가 그를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없었음을 기억하자. ‘처음에는 멋져 보여서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 다음에는 내가 갚을게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냥 내가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끝이 안나.’ 중식의 이 말은 충분히 그 뜻을 인식 할 수 있기도 전에 창 밖에서 뿜어져 들어온 물줄기에 의해 중단된다. 그리고 물과 (쉼표) 불.


물과 불, 그리고 안개

<파주>의 안개는 말하여진 말들, 입 바깥으로 나왔으나 육체를 얻지 못했던 말들의 형상이다. 안개는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떠돈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는 안개의 말을 해독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 안개의 형상, 말의 형상은 기화된 물이다. 물은 불을 끈다. 우리 여기에 있다.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 창문이 없는 창밖으로 던져진 화염병의 불길을 덮어버리는 차가운 물. 그 물이 기화되어 안개가 된다. 그것이 말이 되고 거꾸로 산자들의 말을 덮어버린다. 이것은 선한 말과 악한 말의 대립이 아닌, 그러니까 물과 불의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역학이다. 물과 불이 엮여 안개가 되고, 무거워진 안개는 물로 다시 지상에 내린다. 이 모든 외침들, 의지와 욕망과 엇갈린 시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젖어들듯 켜켜이 쌓여버린 땅. 그곳은 파주다. 당신과 내가 살아가는 모든 장소이다.

결국 <파주>의 이야기는 땅으로 귀결된다. 토지대장에 올라가는 몇 번지 몇 호. 같은 기호가 아닌, 가장 물질적이면서 가장 근본적이고, 동시에 가장 첨예하게 정치적인 땅. 그 땅에 누가 머물 것인가, 어떻게 머물 것인가, 언제까지 머물 것인가. 그러니까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주인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의 문제. 진실이 묶여 있는 곳, 진실이 정주할 수 있는 땅을, 정말로, 마지막에는 발견할 수 있는가의 문제, 그곳에 결국엔 머물 수 있는가의 문제. 그렇다면 <파주>는 사나운 질문들만 남겨두고 등을 돌려버리는 영화인가. 아니다. 당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질문들의 해답을. 그러니까 이제 남는 것은 이 해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 혹은 당신은 은모처럼 철조망을 내 오른쪽 혹은 등 뒤에 둔 채로 길 위를 (언제까지나, 영원히) 떠돌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절대로 그 너머로 넘어가지 못 한 채로, 그 안에서만 떠돌게 될 때, 그것을 용납할 수, 혹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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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ondage.dwc.cc BlogIcon bondage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봐, 당신도 여기에 아주 멋진 문서를 가지고 좋은 블로그. 당신은 속박이 날 체크 아웃 좋아해요.

    2011.08.09 00:44
  2. Favicon of http://nikebearsjerseyswholesale.com BlogIcon wholesale jerseys china  수정/삭제  댓글쓰기

    광고위치가 아주 자연스럽고 좋네요~ 저도 한번 시도해봐야 되겠습니다.....^^

    2012.07.19 16:33
  3. Favicon of http://fungames.im/games/driving/ BlogIcon Driving Games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 예 그 일을 사랑

    2012.08.2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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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

이 영화는 대체 뭔가. 너는 대체 누구니. 반쯤 미친 채 끊임없이 분노하고 비꼬며 입을 놀리는 남자 주인공 조니와 그를 따라가는 영화, [네이키드]를 보며 계속 되물었던 생각들이다. 영화에서는 내 물음과 비슷하게, 여러 인물들이 서로에게 묻는다. 너 여기서 뭐하니. 런던에 왜 왔니. 이런 일을 왜 하니. 결국 내 질문도, 그들의 질문도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하고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가 걸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 애매하게 나와 성적인 분위기와 폭력적인 섹스장면 구성에만 역할을 하고 사라져버리는 몇 명의 여성들 때문에 불편한 지점도 있다. 하지만, 감독 마이크 리가 너무도 힘 있게 연출해낸 시네마틱한 장면들과 영화 전체에서 느껴지는 멜랑콜리한 정서는 분명 [네이키드]의 멋진 성취이고 주목해야 할 부분이며, 나로 하여금 [네이키드]를 곱씹게 한다.

영화는 어두운 밤 맨체스터의 뒷골목에서 시작한다. 멀리서 남녀가 비명을 지르며 섹스를 하고 있고, 카메라는 미친 듯이 그들을 향해 돌진해 간다. 스크린에 제작사와 영화사 이름이 살며시 뜨고 사라지자마자 이어지는 이 충격적인 카메라 무빙은 단숨에 '[네이키드], 보통이 아니겠는걸.' 하는 예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남자는 여자를 벽에 밀어 붙인 채 반강제적인 섹스를 하고 있다. 여자가 욕설을 날린 후 도망치자 남자는 홱 돌아서 뛰어가고, 또 다시 카메라도 그를 따라 뛴다. 남자는 차를 훔쳐 타고 도망치듯 떠난다. 런던으로 향하는 도로의 몽타주가 이어지고, "NAKED" 타이틀이 검은 바탕에 흰 거친 글씨체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펼쳐진다. 이후 런던에 도착한 남자를 허름한 집들이 이어선 길목에 홀로 세워둔 채, 카메라는 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풍경과 남자를 함께 잡으며 무빙한다. 이 오프닝 시퀀스의 놀라운 리듬감을 잊을 수 없다. 아무런 동기나 설명 없이 단숨에 관객을 사로잡으며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아니, 초대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돌진하듯 거칠게 달려가는 영화에 우리는 끌려가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조응한다. 며칠 동안을 부랑자로 런던 거리를 헤매다 옛 애인 루이즈가 사는 집으로 돌아온 조니는 그녀와 함께 맨체스터로 돌아가기로 한 약속을 저버리고, 집 안의 돈을 움켜쥐고 다시 집을 나온다. 카메라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처음 들어섰던 거리를 절뚝거리며 빠져나가는 조니의 앞모습을 담으며 무빙한다. 안정과 약속을 뒤로 하고 다시 골목을 걸어가는 남자의 얼굴과 절뚝거림으로 문을 닫는 영화는 절망적이고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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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시퀀스와 엔딩만으로는 [네이키드]라는 영화를 반의 반도 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말로는 도저히 다 묘사할 수 없는 배우들의 끝없는 대사와 연기, 마치 세기말 풍경을 연상케 하는 런던의 뒷골목 장면들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합쳐져 영화는 강렬한 자기만의 세계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의 구체적인 배경이나 행동 이유에 대해 끝까지 알 수 없지만, 분위기에 이끌려 점차 그들의 삶의 고단함과 분노에 동화된다.

영화를 보면서, (재작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했었던)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 할 하틀리의 초기 연출작 [심플맨]과 일정 부분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두 영화 모두 1990년대 초반에 나온 영화들이며, 그 시기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혼란과 절망적인 기운을 담아내고 있다. [심플맨]이 좀 더 형식적으로 진보적이며 정치적인 반면, [네이키드]는 좀 더 본능적이고 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영화는 현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고 있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상영작이다. 아직도 두 번의 상영이 더 남았고, 오프닝 시퀀스는 꼭 극장에서 봐야 진가를 느낄 수 있다. 할 하틀리의 [심플맨]을 본 관객이라면 1990년대 초반의 현실을 묘하게 비틀어 담아낸 두 영화를 비교하며 감상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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