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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애
30분이면 족했다. 30분만 집중한다면 감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직원의 안내방송 말이 맞았다. 월요일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전석매진이라는 말이 나를 의외의 기대감으로 몰아넣은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대감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알프스의 깊숙한 산 속 고즈넉하게 있는 수도원은 그 주위의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속세를 벗어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카메라는 말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카메라는 수사들의 옷자락이나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살에 초점을 맞춰 클로즈업하는데, 보이는 먼지까지도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다. 딱 거기까지, 거기까지는 영화가 좋았더랬다.

영화의 큰 흐름은 수사들이 독방에서 성경말씀을 읽으며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자란 머리를 깎고, 새로운 수사들이 주님 앞에 당신의 제자가 되겠노라 맹세를 하는 등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미묘한 계절의 변화에 맞춰 겨울에서 봄을 거쳐 여름, 가을, 그리고 다시 겨울이 되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가장 먼저 영화를 보면서 계속 방해를 받은 것은 중간 중간에 반복적으로 삽입되는 성경말씀의 일부 글이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는 말 등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되고 있었다. 영화 자체는 상당히 절제된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표현 방법은 과하게 넘치고 있었다. 비슷한 장면이나 말의 반복으로 나는 마치 지하철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대는 사람들과 이 영화가 다를 게 뭐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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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과 여러 관객들이 이 영화를 호평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그 호평이 정말 제대로 받아 마땅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유인즉슨, 이 영화는 자기만족에 빠졌기 때문이다. 엔딩부분에 눈 먼 수사가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보지 못하게 된 것 또한 주님이 나를 배려해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눈이 먼 것 또한 내가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로써 주의 사랑을 나로 하여금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주님께 가까이 갈수록 행복하다" 내가 느끼기엔 자기위안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지인과 종교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종교의 가장 큰 역할은 자기위안이라는 결론을 내린 적이 있다. 즉, 슬픔을 견디게 해준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셔서 슬프기도 하겠지만, 하나님의 곁으로 간 것이기 때문에 기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슬픈게 슬픈게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종교를 찾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

이 영화는 비슷한 위치에 있는, 그러니까 수녀, 스님, 기타 종교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위로 차원으로 만든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소통의 범주 또한 좁다. 나는 그 카테고리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그 위로를 이해하기가 버거운 부분이 많았다. 찍는 사람, 찍히는 사람, 보는 사람이 그 '위대한'이란 말을 얼마나 이 영화에 맞고, 맞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수사들은 자신의 절제를 통한 신과의 교섭이 얼마나 높아져가는지를, 감독은 16년을 기다려 앞으로도 없을 수도원의 모습을 담는 고귀한 일이라는 자기만족에 빠져서 한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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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절박한 자들(만)이 말한다

필진 리뷰 2010.01.21 06:07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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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석중

 진실의 장소

술을 먹고 들어온 중식은 형에게 말 한다. 아마도, 은모가 준비한 모종의 '이벤트' 전날의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에서 비가 내렸다. 중식은 젖어있었고, 꽤 많이 취해있었다. 귀농을 위해 자신이 떠난 뒤 '이 곳'을 부탁하는 형의 제안에, 중식은 '해서는 안 되는 말, 할 수 없는 말'을 하기 때문에 자신은 자격이 없다한다. 그리고 중식은 자신의 방에 돌아와 눕는데, 이어지는 스승의 날 시퀀스는 마치 중식의 꿈처럼, 혹은 악몽처럼 연결된다. 아이들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목덜미를 드러내고 '중식 씨, 사랑해요'라고 입을 맞추어 말한다. 중식은 놀라서 쓰러진다. 중식의 첫사랑의 기억은 재현된 악몽으로 귀환한다.

<파주>는 말에 관한 영화이다. 세상의 어느 누가 적절한 말과 부적절한 말, 할 수 없는 말과 해도 되는 말을 선별 할 수 있을까? 말이 입 밖으로 던져진 바로 그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말의 무게와 질감을, 그 생김새와 밀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바로 그 순간 자신이 한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게 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진실은 (당신과 나사이의)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은 반드시 말을 한다는 행위를 통해서 선별된다. 정확히 그 순간. 깨닫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 던져진 말은 누구도 거두어들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은 말하여질 수 없다. 진실은 침묵을 통해 남겨질 수 있는, 세상 마지막의 장소이다.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은모의 혼란은 진실과 사실을 동일한 것으로 유추하기 때문이다. 은모가 ‘형부’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말하여 질 수 없는 ‘진실’ 이었다. 은모는 진실을 아는 것이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진실이란 마음이 묶여있는, 마음이 정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진실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다른 이들은 거짓이라고 믿어도, 누군가의 마음은 그 곳에 묶일 수 있다.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것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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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라는 중식의 말은 자신의 의지로 인해 말하여진 것이 아니라, 침묵을 지킬 것을 결심한 중식이 더 이상 꺼낼 말을 찾지 못해 수동적으로 은모에 의해 끄집어내어진 말이다. 은모가 진실을 알고 싶다고 할 때, 그것은 언니가 왜 죽었는지에 관해 알려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자신이 언니의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지 중식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식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그의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를 알려는 것이다. 은모는 사랑을 갈구한 것이 아니라 용서를 구한다.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귀의 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끈질긴 모색과 탐색.

은모의 요청에 중식은 엉뚱하게도 ‘단 한 시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은모의 절망은 사랑받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용서 받지 못함에 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은모는 알고 있다. 이미 언니는 죽어버렸고 진실은 말하여질 수 없다. 말하여지는 순간 진실은 진실이 아닌 것, 듣는 이가 원하는 것, 혹은 말하는 이가 원하는 무엇이 된다. 중식은 침묵하고 (또는 진실을 감추기 위해 거짓을 말하거나, 그러니까 진실은 얼마나 연약한가. 거짓으로 감추어지는 진실은) 은모는 형부가 보험사기를 저질렀다는 (다른 이들 에게는 진실과 동의어인) 거짓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꺼내어진 거짓은 사실로 굳어진다. 딱딱하고 창백하게.

은모는 계속해서 정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길 위로 떠난다. 살아있는 자는 누구도 은모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은모는 (다른 사람의) 어떠한 말도 진실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떠돌 수밖에 없는 은모의 운명은 우리들 대다수의 운명과, 혹은 시간들과 영화 바깥에서 (필연적으로) 겹쳐진다. 영화 <파주>의 지독한 농담. 혹은 벗어날 길 없는 결정론.


말을 하지 않는 것. 침묵의 주식

영화 속에서 말들은 누군가의 입김과 함께 공기 중에 떠돌거나, 벽에 걸린 걸개위에서 펄럭이거나, 거칠게 그은 낙서로 벽 위에 남겨진다. 벽과 그 위의 말들은 시간이 지나 부서지거나 무너질 것이다. 그 위로 새로운 집과 건물과 도시가 세워질 것이다. 철대위, 이 절박한 이들이 내뱉은 말들. 그 말들은 아무것도 지켜낼 수 없(었)다. 오직 이 영화 속에서, 절박한 자들만이 말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은 하릴없이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말들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폐허와 침묵뿐이다. 희망과 절망마저도 사라져버린 명백하고 단단한 현실의 거죽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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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영이 연기한 나이트클럽 사장은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오직 '전언'의 형태로만 육화된다. 침묵함으로써 권력은 범접할 수 없는 공간을 소유한다. 부재함으로써 권력은 편재한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 설치된 CCTV의 눈초리가 상정하는, 그 뒤의 모든 감시의 체계들. 은모가 망연하고도 집요하게 응시하는 복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은모가 본 것은 말의 흔적이 아니라, 침묵이 단단히 현존하는 공간이다. 침묵은 어떠한 말들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 기형도는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있다고 노래했다. 그러나 불행이도 침묵의 주식은 누구나 가지지 못한다. (매주 '라듸오'에서 정례 방송을 하던 이명박은 마치 복화술사처럼 정운찬을 내세운다. '너무 말이 많았던' 이명박은 <올드보이>의 이진우에게 혀가 잘리기 전에 교활하게도 침묵의 주식을 사들이는 것을 선택했다. 이 기묘한 영화와 현실의 참조.)

철거용역들의 포크레인 공격을 막기 위해 화염병 사용을 제안하는 중식은 자신이 ‘책임을 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책임을 지지 못한다. 은모가 푸념했듯, (말은) '힘이 없'다. 중식은 자신이 '현역'이던 시절 그대로, 화염병으로 경찰이 올 때까지 용역들의 접근을 막고, 경찰이 몰려오면, 그 때 (시위 전력이 있는) 자신만 구속하는 조건으로 투쟁을 접으면 승산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더 이상 중식은 경찰이 구속하고 싶을 정도로 중요인물이 아니다. 다가오는 철거 용역들을 향해 중식이 외치는 '주거는 기본적인 인권이다'라는 구호는, 집이 주거 공간 보다는 (남들보다 빠르게 선점하고 되파는 것으로) 개인의 재화를 기형적으로 증식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시대에, 뒤늦게 도착해버린 건조한 외침이다.

‘이 일을 왜 하는 거에요? 이 일이 형부에게 무슨 보람이 되죠?’ 라는 은모의 말에, 그리고 의외로 솔직하고 담담했던 중식의 대답을 들어버린 우리가 그를 더 이상 지금까지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없었음을 기억하자. ‘처음에는 멋져 보여서 시작했던 것 같은데, 그 다음에는 내가 갚을게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지금은 잘 모르겠어. 그냥 내가 할 일이 생기는 것 같아. 끝이 안나.’ 중식의 이 말은 충분히 그 뜻을 인식 할 수 있기도 전에 창 밖에서 뿜어져 들어온 물줄기에 의해 중단된다. 그리고 물과 (쉼표) 불.


물과 불, 그리고 안개

<파주>의 안개는 말하여진 말들, 입 바깥으로 나왔으나 육체를 얻지 못했던 말들의 형상이다. 안개는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떠돈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는 안개의 말을 해독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이 안개의 형상, 말의 형상은 기화된 물이다. 물은 불을 끈다. 우리 여기에 있다. 여기에 사람이 살고 있다. 창문이 없는 창밖으로 던져진 화염병의 불길을 덮어버리는 차가운 물. 그 물이 기화되어 안개가 된다. 그것이 말이 되고 거꾸로 산자들의 말을 덮어버린다. 이것은 선한 말과 악한 말의 대립이 아닌, 그러니까 물과 불의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역학이다. 물과 불이 엮여 안개가 되고, 무거워진 안개는 물로 다시 지상에 내린다. 이 모든 외침들, 의지와 욕망과 엇갈린 시선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젖어들듯 켜켜이 쌓여버린 땅. 그곳은 파주다. 당신과 내가 살아가는 모든 장소이다.

결국 <파주>의 이야기는 땅으로 귀결된다. 토지대장에 올라가는 몇 번지 몇 호. 같은 기호가 아닌, 가장 물질적이면서 가장 근본적이고, 동시에 가장 첨예하게 정치적인 땅. 그 땅에 누가 머물 것인가, 어떻게 머물 것인가, 언제까지 머물 것인가. 그러니까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주인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의 문제. 진실이 묶여 있는 곳, 진실이 정주할 수 있는 땅을, 정말로, 마지막에는 발견할 수 있는가의 문제, 그곳에 결국엔 머물 수 있는가의 문제. 그렇다면 <파주>는 사나운 질문들만 남겨두고 등을 돌려버리는 영화인가. 아니다. 당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 질문들의 해답을. 그러니까 이제 남는 것은 이 해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의 문제. 혹은 당신은 은모처럼 철조망을 내 오른쪽 혹은 등 뒤에 둔 채로 길 위를 (언제까지나, 영원히) 떠돌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절대로 그 너머로 넘어가지 못 한 채로, 그 안에서만 떠돌게 될 때, 그것을 용납할 수, 혹은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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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봐, 당신도 여기에 아주 멋진 문서를 가지고 좋은 블로그. 당신은 속박이 날 체크 아웃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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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예 그 일을 사랑

    2012.08.29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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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

이 영화는 대체 뭔가. 너는 대체 누구니. 반쯤 미친 채 끊임없이 분노하고 비꼬며 입을 놀리는 남자 주인공 조니와 그를 따라가는 영화, [네이키드]를 보며 계속 되물었던 생각들이다. 영화에서는 내 물음과 비슷하게, 여러 인물들이 서로에게 묻는다. 너 여기서 뭐하니. 런던에 왜 왔니. 이런 일을 왜 하니. 결국 내 질문도, 그들의 질문도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하고 영화는 끝난다. 이 영화가 걸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 애매하게 나와 성적인 분위기와 폭력적인 섹스장면 구성에만 역할을 하고 사라져버리는 몇 명의 여성들 때문에 불편한 지점도 있다. 하지만, 감독 마이크 리가 너무도 힘 있게 연출해낸 시네마틱한 장면들과 영화 전체에서 느껴지는 멜랑콜리한 정서는 분명 [네이키드]의 멋진 성취이고 주목해야 할 부분이며, 나로 하여금 [네이키드]를 곱씹게 한다.

영화는 어두운 밤 맨체스터의 뒷골목에서 시작한다. 멀리서 남녀가 비명을 지르며 섹스를 하고 있고, 카메라는 미친 듯이 그들을 향해 돌진해 간다. 스크린에 제작사와 영화사 이름이 살며시 뜨고 사라지자마자 이어지는 이 충격적인 카메라 무빙은 단숨에 '[네이키드], 보통이 아니겠는걸.' 하는 예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남자는 여자를 벽에 밀어 붙인 채 반강제적인 섹스를 하고 있다. 여자가 욕설을 날린 후 도망치자 남자는 홱 돌아서 뛰어가고, 또 다시 카메라도 그를 따라 뛴다. 남자는 차를 훔쳐 타고 도망치듯 떠난다. 런던으로 향하는 도로의 몽타주가 이어지고, "NAKED" 타이틀이 검은 바탕에 흰 거친 글씨체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펼쳐진다. 이후 런던에 도착한 남자를 허름한 집들이 이어선 길목에 홀로 세워둔 채, 카메라는 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풍경과 남자를 함께 잡으며 무빙한다. 이 오프닝 시퀀스의 놀라운 리듬감을 잊을 수 없다. 아무런 동기나 설명 없이 단숨에 관객을 사로잡으며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아니, 초대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돌진하듯 거칠게 달려가는 영화에 우리는 끌려가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조응한다. 며칠 동안을 부랑자로 런던 거리를 헤매다 옛 애인 루이즈가 사는 집으로 돌아온 조니는 그녀와 함께 맨체스터로 돌아가기로 한 약속을 저버리고, 집 안의 돈을 움켜쥐고 다시 집을 나온다. 카메라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처음 들어섰던 거리를 절뚝거리며 빠져나가는 조니의 앞모습을 담으며 무빙한다. 안정과 약속을 뒤로 하고 다시 골목을 걸어가는 남자의 얼굴과 절뚝거림으로 문을 닫는 영화는 절망적이고 스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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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시퀀스와 엔딩만으로는 [네이키드]라는 영화를 반의 반도 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말로는 도저히 다 묘사할 수 없는 배우들의 끝없는 대사와 연기, 마치 세기말 풍경을 연상케 하는 런던의 뒷골목 장면들과 같은 여러 요소들이 합쳐져 영화는 강렬한 자기만의 세계와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의 구체적인 배경이나 행동 이유에 대해 끝까지 알 수 없지만, 분위기에 이끌려 점차 그들의 삶의 고단함과 분노에 동화된다.

영화를 보면서, (재작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상영했었던)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 할 하틀리의 초기 연출작 [심플맨]과 일정 부분 닮아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두 영화 모두 1990년대 초반에 나온 영화들이며, 그 시기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혼란과 절망적인 기운을 담아내고 있다. [심플맨]이 좀 더 형식적으로 진보적이며 정치적인 반면, [네이키드]는 좀 더 본능적이고 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영화는 현재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고 있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상영작이다. 아직도 두 번의 상영이 더 남았고, 오프닝 시퀀스는 꼭 극장에서 봐야 진가를 느낄 수 있다. 할 하틀리의 [심플맨]을 본 관객이라면 1990년대 초반의 현실을 묘하게 비틀어 담아낸 두 영화를 비교하며 감상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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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원
친구들 영화제에서 박찬욱 감독의 추천작으로 니콜라스 뢰그의 <쳐다보지 마라 Don't Look Now>(1973) 를 보았다. DVD로 봤을 때의 날카로운 충격을 상대적으로 느낄 수 없었다. 영화가 나른한 공포감처럼 몰려왔다. 무척이나 강렬한 해체주의적 영화인데 예민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력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는 빨간 옷의 아이가 강물에 빠져 죽는 신으로부터 시작한다. 가족들은 아이의 죽음을 현재의 일상 속에서 목도한다. 인상적인 일상과 사건의, 집 안과 집 밖의 교차편집 오프닝 시퀀스는 그 이후 이어지는 영화의 모든 내러티브를 이 지점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 시퀀스는 죽음이 발생하는 과정을 마치 도미노처럼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인 물리적인 반응처럼 묘사한다. 마치 죽음을 위해 완벽하게 짜여진 각본처럼 죽음은 순차적인 불길한 이미지들의 누적으로서 발생한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를 소금기의 바닷물에 의해 부식하는 도시 베니스에서 찍은 가장 인상깊은 영화중의 한편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몰락하는 유럽의 문화와 도시의 비장미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등장인물들 모두가 실제로는 유령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비쳤다. 줄리 크리스티가 식당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며 쓰러질 때, 그리고 도널드 서덜랜드가 성 니콜라스 성당의 복원 현장에서 사고를 당할 때 그들은 이미 죽은 것이며, 그 스스로의 죽음 이미지를 강 위에서 목도한 것이다. 그들은 이미 죽었고, 유령이 되었고, 그들이 좇는 심령술사 맹인 자매와 빨간 옷의 정체 모를 아이는 그들이 만들어 낸 환상이라는 것이다. 박찬욱 감독은 플래시 포워드 기법을 인상 깊게 사용한 부부의 정사신을 이야기하면서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것에 대한 영화라고 말했다. 특히 미래가 개입하고 있는 현재성에 대해 언급하며 이러한 시각은 숙명론적인 것이자 현재를 현재화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실패의 이미지, 즉 현실과 현재의 바깥, 온통 포커스 아웃된 것들의 이미지들의 총체적 결합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해석은 미래에 대한 현재적 나르시시즘과 같다. 그것은 이미 본 것(과거)에 대한 죄의식이자, 그것으로부터 발생된 미래의 심판 이미지이다. 현재는 이미 본 것과 앞으로 볼 것 안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에 점점 잠식당해가고 있다. 현재는 과거의 반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식당에서 남편이 창문을 닫자 출입문이 열린다. 그 문으로 티끌이 들어와 맹인의 눈에 박힌다. 아내는 맹인을 돕는다. 과거의 행동에 반작용처럼 지배당하는 현재를 우리는 우연이라는 명목상으로 목도하고 경험한다. 현재는 온통 어지럽고, 목졸리고, 피를 토한다. 지금 보는 이미지는 과거로부터 투영된, 이미 보았던, 이미 겪었던 것의 반영체이다. 완전히 새롭고 낯선 것은 현재의 조망권에 포착되지 못한다. 남편이 보았던 자신의 장례식은 자신의 미래 이미지일 수 있지만 이미 죽은 아내의 현실 이미지일 수 있다. 그가 좇게 되는 빨간 우비의 정체 모를 아이는 이미 목도한 자신의 아이의 죽음, 그 빨간 색에 대한 죄의식의 이미지를 투영한 자의식적 결과물이다. 그것은 현재에 와 완전히 낯선 이미지(연쇄 살인마)로 포커스 아웃되지 못한다. 그의 누적된 과거 이미지들의 시각성이 이 연쇄 살인마를 친숙한 자신의 핏줄로서 포커스 인하는 것이다. 죽음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이런 그야말로 시각적 영매일지 모른다. 이 영화에서 눈먼 영매는 어쩌면 맥거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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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호 감독은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 개막식에서 '영화를 통한 진정으로 강력한 체험이란 감독이나 작가가 자기의 삶에서 몸과 마음으로 절실히 느낀 체험을 관객들과 함께 느끼고 공유해서, 관객의 생각과 마음을 깊고 넓게 확장시켜주는 그런 체험이다'라는 말을 했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눈이란 성숙된 것이다. 친구들 영화제에서 감독들이 추천한 영화를 함께 보고, 그들과의 시네토크를 듣고 있으면 감독의 시각이란 관객보다 훨씬 정제되어 있고 밀도 있으며 입체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끊임없이 조망권역과 그 바깥의 영역을 나눈다. 영화의 화면을 만드는데 있어서의 내화면과 외화면, 즉 선택과 배제라는 영역을 항상 언급한다. 그들이 쇼트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심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영화를 확장시키고, 풍부하게 만드는 것은 영화의 기술적인 효과가 아니다. 그것은 시각의 고도화에 대한 체험이자 그 훈련이다. 고도화는 공감각적인 감각과 과학적 공간지각능력과 인문학적 정신의 깊이까지를 포함하는 단어일 것이다.

이 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언급했듯 깨지는 이미지, 유리의 잔상같은 영화적 이미지들을 동반하여 시작한다. 참을 수 없는 시각의 유혹층, 그 얇디 얇은 층에서 미끄러지듯 깨질 듯 시작하는 영화는 본 것을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부정하지 못하는 곤경의 심안의 이미지체로 들어선다. 그 안에서 목도하게 되는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영혼의 이미지에서 감독은 이미지에 대한 영안에 도전하려한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시각의 가장 바깥층에 있는 유리의 깨짐으로부터 발생한다. 그 죽은 육체가 물안에 깊숙히 잠긴다. 얇은 시각층을 깨고 죽음을 목도한 시각이 물 속을 유영하며 아이의 시신을 찾아 건져올린다. 그는 이 물 속의 입체성을 통과하며 심안을 획득한다. 이 심안은 평안한 유리체로 구성된 현재의 이미지를 깨고 들어온 과거의 이미지를 찾아 유영한다. 그것은 이미 깨진 현재 바깥에 있었던 미래의, 보이지 않는 영역의 이미지들을 불러들인다. 이것은 영안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는 이미 목도한 것에 대한 윤리적인 질문들을 시각의 시간적, 공간적 층을 넘나들며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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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ondage.dwc.cc BlogIcon bondage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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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8.09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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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원

홍형숙 <경계도시2>

2003년에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 영화로서의 형식에 대한 논의를 하기엔 우선적으로 껄끄러운 지점이 있다. 영화가 소재주의에 함몰된 경향을 운운할 수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은 대상에 대한 무지, 즉 송두율 개인에 대한 삶을 언론을 통해서 보도 받은 대로 알고 믿고 있었던 역사적, 정치적 무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의 부끄러움을 사실 스스로도 숨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국내의 독립 다큐멘터리 운동의 시작이 된 공동체 중 하나인 서울영상집단에서 영화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사회 정치적인 운동으로서의 다큐를 만들어오는 홍형숙 감독은 이 영화의 카메라를 여러 사람에게 옮겨 다니면서 찍게 한다(촬영자만 5-6명은 되었던 것 같다). 그녀가 카메라를 들지 않았을 때는 스스로 카메라에 등장해보이기도 한다. 여러 사람이 든 카메라에 담기는, 이 영화의 소재이자 주제인 송두율의 모습은 어떤 함축적 경계를 두고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감독의 관찰자적 내레이션이,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송두율의 말보다 더 신뢰가 가는 광화문 전광판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헤드라인이, 그가 검찰에 출두할 때만 쫓아다니는(즉 국내에서 주로 이루어진 그의 학술활동 등엔 관심이 전무하다시피 한) 기자들의 무식한 폭력에 가까운 취재 행태가 그를 계속 경계선 위로 몰아세우는 느낌을 준다.


송두율의 통일철학에 대한 핵심론은 변두리로 몰려나고 그의 배후 세력 캐기에 온통 집중하는 이 나라의 주류 언론들은 그를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가십거리에 열 올리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서 대한다. 당시엔 진실처럼 우리 위를 군림했던 이들의 명제와도 같은 주장들은 1년도 채 안되어 거짓임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당시 진실로 받아들였던 자신의 기억에 보다 절대적인 우위를 둔다. 송두율이 구속되는 이미지가 남았을 뿐, 그가 무죄가 되어 언론과 그로 인해 좌우지되던 남한 사회를 향해 가했던 일침을 제대로 본 사람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문 것이다. 게다가 그가 독일로 결국 돌아간 것, 남한 사회에서의 통일 관련 일을 접은 사실은 거의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 된 것이다.


송두율은 남한으로의 귀국을 결심했을 때 어차피 스스로는 경계인이기 때문에 국내의 어느 정도 부정적인 반응을 예상했겠지만 그것은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었다. 남한에서 사상적 경계선은 곧 회색지대나 다름없다. 대한민국의 경계엔 군사적 긴장(군인과 철조망)만이 흐른다. 그 곳은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다. 그 곳은 이 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지대이다. 자신의 identity에 대한 질문에 가장 먼저 nationality(대한민국 국민임)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만큼 우리는 한반도 경계선의 남쪽을 '내부(자아)'로, 북쪽을 '외부(타자)'로 인식한다. 우리는 이 경계의 '안'에 속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그런데 밖에 소속된 자가 신분을 버젓이 유지한 채 이 안에 오려고 한다. 안과 밖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며,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자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identity의 존재적 근거를 위협하는 자의 그러한 발언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 나라의 국경선을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원이다. 우리에게 이 나라의 정체성은 비판적이던 친화적이던 우리의 영원한 소재이자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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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2>에서는 송두율에 대해 친화적이던 비친화적이던 누구나가 훈수를 두려고 한다. 사람들은 개인 철학자 송두율 교수를 마치 사회의 대안적인 영역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그 자체의 존재에 대한 찬반을 표명하는 것처럼 군다. 철학자 세미나를 마친 리셉션 자리에서 대표적 보수인사인 한홍이 송두율에게 건배를 제의하며 '당신 피엔 예수의 피가 흐른다.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다. 사오로가 바오로가 됐듯이 당신도…….' 운운하고(이날 한홍은 거의 전향을 선언했다?), 송두율의 귀국 후 긴박하게 돌아가던 검찰 수사에 대한 비대위에 모인 사람들은 '당신은 어떤 사람이다', '대한민국은 당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당신은 이처럼 행동해야만 한다'고 끊임없이 제의하고 주장한다. 송두율은 거의 침묵으로 일관한다. 사실 관계를 묻는 질문(자신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임을 북한 방문 전에 알았는가에 대한 문제 등)에도 헛갈리는 대답들을 내놓는다. 37년 만에 밟은 고향 땅에서 송두율은 스스로의 identity로 여겼던 borderer에 대해 근본적인 위협을 받는다. 이 나라엔 '대한민국 국민'과 '북조선 인민'만이 존재한다(외국인 노동자와 탈북자, 교포2세들의 문제도 여전히 있겠지만 그들의 출신이 어디든 이 '고귀한' 땅을 선택한 이상 엄연히 이전의 사상을 버리고 대한민국 헌법 사상으로 전향한 사람이다). 그것의 선택은 자유이다. 다만 제3의 변수는 없다.


송두율은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의 땅을 밟고 싶어 했다. 그리고 민족주체철학자로서, 남과 북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경계인으로서 고국을 방문해야만 했다. 남한이 보수 세력의 집권에 눌려있을 시절 북한에서의 활동이 있었고 2000년 들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그는 이 화해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더 늦기 전에 남한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 학자의 철학적 소신에 따른 행동적 실천은 국가 전체의 이데올로기를 뒤흔드는 일대 혼란적인 이슈가 된다. '당신이 무엇이기에 남한에 와서 스스로를 'borderer'로 말하느냐?', '북한 노동당원이 국내 간첩으로 대대적으로 귀화하는 뻔한 공작에 우리가 또 속을 것 같으냐?' 언론과 여론은 하나가 되어 송두율의 남한 귀국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이 기회에 우리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이데올로기적 근거들을 쏟아내며 이 나라의 border를 또 한 번 단체적으로 그려나가는데 집중하기 시작한다. 송두율은 어떤 사람이냐를 이야기하는 것은 곧 송두율은 '대한민국'에서 어떤 사람이냐를 말하는 것과 같아진다. 세계적으로 그는 유명한 주체철학자이자 민족평화운동에 앞장서는 지식인인데 이 나라에선 노동당에 가입된 북한 공작원 김철수로서 당연히 분리조치(구속수감)되거나 추방되어야할 사람일 뿐이다.


송두율은 이 같은 남한 사회에 대해 할 말을 잊은 듯 사람들의 훈수와 인터뷰 요청에도 거의 어떠한 제스처도 하지 않다가 기자회견을 통해 결국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국내 귀화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대한민국 헌법을 따라서 북한에서 편향된 활동을 한 점을 사과하고 사법처리 되어야할 부분은 엄중하게 받겠다는 것이다.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하던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는 이 '대국민 사과'에 진정성이 부족했다는 여론의 채찍을 맞고 수차례의 검찰 조사를 더 받은 후 결국 구속 수감된다. 송두율은 2003년 귀국 시점부터 신문과 뉴스의 톱을 장식하며 일대 이슈 메이커가 되었지만 스스로의 반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부로 밀려났다. 그가 구속된 바로 그 시점부터 언론과 여론은 일제히 그에게서 관심을 접는다. 몇 개월 후 항소심에서 승리하고, 노동당원으로서 활동한 적이 없음을 확인받아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미 사람들의 관심밖에 멀어진 후의 일이었다. 그 당시 우리의 반응과 대처는 옳았고, 송두율은 국내에서 사상 검증을 받은 후 감옥에 갔었던 사건으로 기억돼있을 뿐이다.


전편의 <경계도시>가 송두율이 국내 귀국을 시도하다 좌절된 사건을 그의 베를린에서의 일상적인 모습들과 함께 스케치하며 마치 일기같은 형식으로서 기록했다면 <경계도시2>는 본격적인 국내 다큐멘터리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 한다. 영화는 정치적 민감함을 건들인 개인, 그 집단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개인의 모습을 철저하게 따라가며 사회적 활동가의 기록물로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영화는 당시 KBS에서 제작 방영한 송두율 관련 다큐의 편파성 논란으로 인해 KBS사장까지 해임되는 사건을 보여주면서 이에 따라 <경계도시2>영화를 TV 방송분으로 내보내려했던 계획을 접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국영 방송이 허용하는 미디어 활동과 영화의 다큐멘터리 활동사이의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하지만 2003년에 벌어진 민감한 정치적 상황을 기록한 영화가 2009년에 와 상영(완성)될 수 있었던 것을 본다면 독립 다큐멘터리로가 가진 운동의 한계성도 분명 느껴지는 것이다.

이 당시의 생생한 활동의 영화가 2009년의 지금에 와 과거의 기억과 망각을 사유하는 영화가 된 것은 기획 의도로 보았을 때 좀 아이러니하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송두율의 과거 영상을 끄집어 내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지난 영화를 지금 트는 것이다. 이것은 엄연히 말해 다큐 집단의 다큐멘터리 운동의 일환으로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다. 영화는 생생한 현장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쫒으며 가려진 진실의 이면을 드러내고자 애쓰는데 이 지점에서의 감흥은 6년이란 시간이 지나 우리에게 이 시간을 '기억'하는가의 또 다른 화두를 제시하며 그 날의 진실을 알지 못했던 현재의 관객을 반성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한다. 이 지점은 송두율이 석방 후 소회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언론이 '계몽'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는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의 운동성은 결국 소재적이고 주제적인 것으로부터의 운동성에서 멈추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지나 형식적인 운동성이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계몽'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실에서 실패한 운동을 기록한 영화를 뒤늦게 볼 때 이 영화는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필름 위, 우리의 망각, 그 시절에만 군림했던 언론, 혹은 나올 수 없었던 국영 텔레비전 화면 위. 아니면, 2003년의 상상적 스크린. 그도 아니면 그냥 보이는 그대로 2009년의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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