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편집부




박정숙 감독과의 인터뷰만큼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자시사회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배급사에 전화를 걸었고, 연초의 약속을 파기하면서까지 이 인터뷰에 집중했다. 고백하자면 얼마 전 작고한 故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실제 주인공인 조창원 전 소록도국립병원장의 회고록 정리를 위해 조 원장님을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왔다는 점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동백아가씨>는 한센인과 소록도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근원적 문제 인식의 토대위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게다가 다큐멘터리가 흔히 범하기 쉬운 실수,(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어느 연예인 전문사진작가는 아프리카의 풍광을 담겠다며 돈을 주고는 아이들을 몇 시간씩 뙤약볕에 세워놓고 찍은 사진을 버젓이 전시하는 작태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메시지 전달을 위한 무리한 촬영 감행과 대상자의 수단화를 피하고 있으니 얼마나 바른 심성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고, 전날 VIP시사가 늦게 끝난 탓인지 감독은 피곤해보였다. 그러나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감독은 힘을 내고 있었다. 촬영기간 동안 겪은 마음고생이 피부로 다가왔다. 2시간 남짓 때론 차분하고 때론 격앙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 인터뷰에는 특정집단에 대한 이야기도 더러 포함되어 있다. 현역 정치인과 이익단체들 또한 한센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백건영(이하 '백'): 2002년 여름, 평범한 여행객으로 소록도를 찾았다는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어떤 동기에서 소록도를 찾게 된 건가?


박정숙(이하 '박'): 특별한 동기는 없었다. 당시는 <소금-철도여성 노동자 이야기(이하 소금)>의 작업이 끝날 무렵이었고 지친 상태였다. 집이 순천인데 대부분 여름휴가에 집엘 가니까 순천에 내려갔고, 마침 강원도에 사는 아는 후배가 전라도에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다고 해서 가고 싶은 곳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선암사나 송광사나 소록도 같은 곳에 대한 이야기들. 그래서 소록도에 가게 된 거다. 그때까지는 경치가 좋은 곳으로만 알고 있었다. 고흥에 사는 고등학교 친구가 있었는데, 간호사가 되어 소록도에서 봉사를 하며 평생 살고 싶다고 한 이야기가 생각나 그 친구도 함께 가게 되었다. 그렇게 소록도에 도착했고, 간호사가 되고 싶어 했던 친구의 아는 분이 소록도교회 목사님이어서 특별히 마을 안을 구경시켜주셨다. 당시 초라해 보이는 할머니가 일을 하고 계셨는데 손이 없더라. 그것이 내겐 충격이었다. 소록도서 나오는 길에 소록도 역사관에 갔더니 소록도에서 일제가 자행한 일들을 보고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아무것도 몰랐거든, 그때까지는. 경치가 좋고 나병환자들 많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우연히 가게 된 거다.


백: 1년 뒤에 소록도에 다시 찾아갔을 때는 이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갔다는 말인가.

박: 찍겠다고 맘을 먹고 간 거다. 없어지지 않는 충격을 안고 고민을 많이 했다. 내가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런 사실을 몰랐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부끄러웠다. 다만 현실적으로 너무 멀고, 계속 내가 다뤄온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힘든 점이 있었다. 때문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가 관련된 자료들을 찾아보았다. 자료를 보니 더 어마어마한 일들이 있었더라. 덜컥 겁이 났다. 1년이라는 시간을 그렇게 보냈었다. 그런데 이후에도 그 할머니가 계속 꿈에 나타더라. 드디어! 그 다음해에 카메라를 들고 소록도를 다시 찾았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봉사를 오는 분들을 만났다. 히로시마에서 오신 분들이었는데, 그분들과 같이 들어가게 된 거다. 어떻게든 찍어보겠다는 마음으로 말이지.


백: 그 당시만 해도 어떤 걸 핵심을 잡아 찍겠다는 마음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박: 여성문제에 워낙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할머니를 찍고 싶었다는 생각은 있었다. 많은 아픔들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자 분을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처음에 카메라를 들고 갔을 때) 소록도 측에서는 할아버지 세 분과 일본 분들을 모시고 나왔다.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그때 많이 잡아 놨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때도 할머니를 찍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구체적인 시안은 없었어도.


<동백아가씨>는 2003년도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영화 사전제작지원 작품이다. <소금>이 상영되었던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마침 ‘파로허저드’ 특별전이 있었다. 그때 상영했던 파로허저드의 <검은 집>역시 한센인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는데, 1962년에 촬영된 이란의 나환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여과 없이 찍어낸 흑백필름인 탓에 내게는 표현이 힘들 정도로 가슴 먹먹하고 불편한 영화로 기억된다. <동백아가씨>의 제작지원이 그해 부산에서의 파로허저드 특별전과도 어떤 연관이 있지는 않았을까? 마침 같은 시기와 같은 장소에서 박정숙 감독의 <소금>이 틀어졌기에 연관성을 떠올렸다.


백: 2002년도에 소록도로 가기 전에 한센병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나.

박: 지금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정도였다. 전혀 몰랐다. 호칭도 문둥병이라 알고 있었고 같이 살면 안 되고, 얼굴이 무섭게 생겼고 등등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해 교육을 받거나 들은 적이 없었고, 고등학교 때 친구가 거기가면 정말 불쌍한 분들이 계시고 그분들을 위해 살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 그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 완전 무지한 상태였다, 영화를 보신 분들 중에 한센병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아신 분들이 많을 거다. 그 분들과 똑같은 상태였다.


백: 한센병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대목이다. 사실 사람들이 한센인과 접촉하는 것 자체를 꺼려하는 것도 유전과 전염이라는 병리학적 측면을 지나치게 앞세운 까닭에 있다. <동백아가씨>를 보기 전에는 어떻게 찍었을까, 할머니의 일상을 찍었을까 애환을 다뤘을까, 할머니가 특수한 케이스에 국한되면 곤란할 텐데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보고 나니 감독님이 한센병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지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박: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혀 없었다.


백: 다큐멘터리를 미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내러티브적으로 영화를 따라가면, 처음에는 할머니의 발병원인-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어서 발병 된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부모님과의 삶이 행복인 동시에 불행인 씨앗-즉 개인사로 시작되었다가 한센의 학살, 전쟁문제 등 국가차원으로 확장하더니 육아와 출산의 개인사로 돌아갔다가 일제 보상 문제로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끝을 맺는다. 이행심 할머니의 삶은 발병과 결혼 출산, 육아와 같은, 한센인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문제들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안고 계셨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남성의 입장에선 죄송스럽다는 생각조차 불러일으킨다. 주인공 이행심 할머니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


박: <소금>같은 경우에는 계속 노동문제를 다뤄왔기 때문에 접근하기 쉽고 서로가 몰입했던 분야라서 인터뷰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동백아가씨>는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일단 너무 어렵고, 누구를 어떻게 선정해야 될 지 막막해서 처음에는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사서 다시 읽어보고 서울대 정근식 교수께 가서 청강을 하기도 했다. 각종 논문들을 보면서 대본을 어떻게 써야할지 막막한 심정도 느꼈다. 당시는 임신한 상태여서 소록도는 갈 수 없었고, 혼자 작품구상 하던 중에 추석이 돌아왔다. 내가 본 소록도 자료에는 소록도 주민들은 단종(斷種)수술을 시켰고, 임신을 해도 낙태를 시켰기에 자식이 없다고 나와 있었다. 명절이란 게 1년에 한 두 번씩 집이 북적대는 시기가 아닌가. 그런 모습과 소록도라는 모습이 대비되자 처량하게 느껴졌고, 그 느낌을 잡으면 어떨까 해서 촬영감독에게 그런 느낌을 찍어오라고 소록도로 보냈다. 카메라하고 삼각대를 들고 가니까 무겁기도 하고, 선착장에서 안까지는 한참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어떤 젊은 청년이 실어준다고 해서 차를 타고 갔다더라. 그런데 그 청년이 이행심 할머니의 아드님이었다. 아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너무 놀랐다. 그렇다면 가서 할머니를 만나보자, 그리고 난후에 그 분을 주인공으로 할지를 결정하자고 생각했다. 그때가 10월이었는데 내가 임신을 막 한 상태였다.

다음 해 봄이 오자 소록도에 너무 가고 싶더라. 맘이 급해서 갔는데 11시간이나 걸렸다. 임신 7개월이었는데 무리한 거지. 소록도에 내렸는데 할머니가 왜 왔냐고 물으셔서 다큐를 찍으러 왔다고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얼굴의 정면은 안 되고 옆모습을 찍는 다는 조건으로 허락해주겠다고 하셨다. 할머니가 쾌활하시기도 하시고 사람이 그리우셨던 것도 같았다. 임신한 내 배를 보고 더 잘해주신 것 같다. 하지만 얼굴을 안 찍고 다큐를 내보낸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에 100% 모자이크 처리를 하더라도 얼굴을 찍고 싶다 해서 그냥 찍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보다 닭장에서 할머니가 아이를 낳는 과정을 들으면서 아이를 가진 엄마로서 이 작품만큼은 반드시 완성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만약 내가 만들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 섬에 묻혀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백: 그때 얼굴을 그대로 촬영했다고 했는데 얼굴 공개를 허락 받은 것은 언제쯤인가?

박: 2005년. 당시 어떤 마음이었냐면 <동백아가씨>는 설령 만들더라도 언제쯤 상영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었다. 극장 개봉은 꿈도 못 꾸었고 공동체 상영은 가능하다고 했지만 막연히 10년쯤 걸리지 않을까라는 마음이었다. 왜냐면 소록도 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운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정서적 동참을 독려할 목소리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동백아가씨>를 상영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모자이크를 하더라도 그냥 얼굴을 찍었다. 처음에는 영화 초반부에서처럼 옆 라인만 나오는 컷들 위주로 찍었다. 그런데 2005년 보상재판 때문에 일본에 갔을 때 방송국기자들이 할머니께 카메라를 마구 들이대더라. 할머니가 엄청 불편해하셨다. 하지만 그때는 보상이 걸려있고 해서 여과 없이 내보낸 것 같다. 일본 다녀오시고 나서 나에게 그러시더라.(할머니는 언제나 나를 애기엄마라고 부르셨다) “애기엄마, 내가 텔레비전에 나왔다더라. 그러니 너도 나 찍어서 텔레비전에 내라”고. 할머니께서 허락하시던 순간, 정말 눈물이 흐르더라. 포기 안하고 찍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가벼워지더라.





백: 총 제작기간과 비용이 궁금해진다.

박: 정확히 산출하긴 힘들 거 같고, 대략 5천~6천만 원 사이라고 생각이 든다. 처음 할머니를 만난 건 2003년이다. 2006년 10월에 만들었으니까 3년 6개월 정도 걸렸다.


백: 그동안에 몇 번이나 소록도를 방문했나?

박: 글쎄. 10번 정도? 한번 가면 3박 4일, 4박 5일 정도 머물렀다.


백: 잠자리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을 텐데

박: 그때 임신하고 소록도에 두 번 갔던가. 소록도에 갔는데 할머니가 같이 자고 싶어 하셨다. 처음에는 사실 겁이 났다. 내레이션엔 “낯설었다”고 쓰긴 했지만, 임신 중이라 면역력이 떨어지는 시기였기 때문에 무서웠다. 그래서 의학 관련 공부를 열심히 했다(웃음). 한센병에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말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그런 공부를 한 거지. 때문에 손잡는 것도 어색하고 그랬던 경험도 있다. 내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가식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내 선에서 가능한 행동을 보여드리려고했다. 밥을 같이 한다거나 반찬을 같이 한다거나.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할머니의 집에서 같이 자게 되었다. 같이 자고 아침에 밥 같이 먹고 그 다음날은 봉사자들 숙소에서 잤다. 처음에 소록도를 밟았을 때는 겁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었다. 두 번 세 번째 내려갔을 때는 찍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럴 때는 촬영은 안하고 만날 밥하고 집안 일만 도와드린 것 같다. 내 자신이 불편해하는 걸 못 견디는 편이라 할머니와의 간격 같은 것들을 최소화 시키고 싶었고, 나 자신이 내키지 않는 것을 촬영하고 싶진 않았다. 때문에 촬영분량이 줄어든 만큼, 할머니와의 교감은 더 깊어졌다. 그 이후로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가깝게 지냈다. 할아버지가 언젠가 “기다리던 딸 왔네.”라고 하시더라. 그 말을 들으니 정말 반갑더라.




백: 영화를 보니까 전체적으로 정적이다. 그래도 후반부에 보상 문제로 가면 영화에 속도감이 붙는다. 내러티브에서 비주얼로 이동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역동적이고 힘이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때문인지 마지막 편집 과정에서 <동백아가씨>란 영화가 한센인의 보상 문제에 집중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었다.

박: 원래 촬영할 때는 그런 재판이 진행되는지도 전혀 몰랐다. 처음 촬영 한창 할 때는 진행이 안 된 상태였고 전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할머니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를 보면 아시겠지만 <동백아가씨> 러닝타임의 50분정도는 할머니, 20~30분은 보상 문제에 대한 것들이다. 사실 비주얼은 뒤가 강하지. 고민을 많이 했다. 할머니 인터뷰는 하면 할수록 어렵더라. 그 이상의 어떤 것들은 나도 한계고 할머니도 한계여서 답답했다. 여기서 60분짜리를 만들고 끝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끝내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애를 낳고 나서 가편집까지 밖에 못했는데 무엇으로 결론을 낼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몸조리하느라 할머니께 연락도 못 드렸다. 산후우울증이 시작되기도 해서 불안감도 겹쳤던 시기다. 아주 오랜만에 연락을 했는데 할머니가 보상 문제 때문에 일본에 가신다더라. 그 말씀을 듣고 일단 뭐가 됐든 무조건 촬영을 하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일본에 간 거지. 물론 재판 내용에 대해서 잘 몰랐다. 그때 변호사들을 처음 만났는데, 변호사들은 촬영하는 걸 굉장히 싫어했다. 거기 가서 촬영하는데 구박을 많이 받았다. 1년 정도 있다가 최종판결이 있었다. 그걸 찍고 나서도 넣을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 못 하다가 그래도 현실적인 문제니까 결국 넣었는데 앞의 분위기와는 느낌이 너무나 틀린 거다. 편집해놓고 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결국 넣었다. 사실 <동백아가씨>는 만들 때 당시 나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한센병은 나에게 너무 어려웠고, (할머니하고 친하긴 했지만) 촬영하면서 마음 고생한 것들, 주변에서 촬영을 못하게 하는 등의 것들 때문에 카메라도 정적으로 찍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워낙 조용한 섬이고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 정서여서 일부러 정적으로 찍는 게 컨셉이었다고나 할까. 인터뷰도 그렇고.


백: 영화 중반 이행심 할머니가 발병하는 대목을 구술하는 시퀀스쯤 됐을 때 카메라는 돌아가는데 진술은 정지된다. 대신 안내방송 비슷한 소리를 쫓아 할머니가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 한동안 보이는데, 그 부분이 궁금했다. 극영화로 보면 NG가 분명한 장면인데 굳이 넣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박: 그건 소록도의 풍경 중 인상적이었던 두 광경 중 하나였다. 첫 번째는 맨 앞에 타이틀이 나올 때 보이듯이 방역차 지나가는 부분이었다. 소록도는 여전히 방역을 해야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웠다. 한센병의 인식에 대한 현실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다른 하나는 소록도 마을이 입구부터 간판이 있다. ‘국립소록도 병원’이라는 것. 사실 그 자체가 아이러니하잖나. 소록도에서 그 방송이 자주 나오더라. 할머니가 웬만한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시는데 그것만 나오면 귀를 쫑긋하는 게 중앙통제방식의 소통구조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다. 그게 익숙해져있고, 병실 같다는 느낌도 그 부분에서 보이더라. 한편으로 생각하면 재밌기도 한데, 그게 결국 소록도의 풍경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 식으로 살고 있는 것 자체 말이다.


백: 개인적으로 『소록도 70년사』 『80년사』를 읽을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동백아가씨>가 완전 다른 세계 같은 거부반응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놀랐던 것은 할머니와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질문하는 방식에 있어 엄청나게 적나라하더라. 예를 들어서 “팔이 언제쯤 없어졌냐”는 질문들. 질문을 저렇게 해도 될까라고 생각했다. 너무 단도직입적이어서 말이다. 이게 진짜 다큐멘터리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할머니가 상처받지 않을까 걱정되더라.

박: 그런가? (웃음)


백: 내가 감독이었으면 아마 “언제 그렇게 되신 거예요”라고 돌려서 말했을 것 같다. 그런데 박 감독은 “언제 다리가 없어진 건가요”라는 식으로 직접적으로 질문을 하더라. 깜짝 놀랐다.

박: 그런 질문은 상처 받으셨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백: <동백아가씨>를 찍으면서 제일 힘들었던 게 무엇이었나? 소록도 안에서 찍을 때 말이다.

박: 촬영 당시에는 주변의 조건이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3박 4일 동안 소록도에 있으면 휴식시간이 전혀 없다. 임신 상태에서 그게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2년쯤 지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내 스스로가 너무 힘들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던 거다. 그때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그랬다. 촬영 저지 같은 것에 대항하느라 기운이 없었다. 지금생각해보면 새로운 주제를 접하는 두려움, 자신감에서 과연 이 주제를 내가 할 수 있는 주제인지 고민하는 게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끝까지 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들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들 말이다.


백: 자치회에서 촬영을 못하게 한 근본적인 이유가 뭐였나?

박: 처음에 갔을 때에는 얼굴을 못 찍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 너무 놀랐다. 어떻게 얼굴을 안 찍고 다큐멘터리를 진행한다는 것인가. 어떻게 촬영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 할머니 주변 분들이 경계를 하기도 했다. 할머니 자체는 힘들게 하시지 않았다. 당사자가 아닌 주변인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같이 해결이 되지 않잖나. 할머니는 바닷가에서 엄청난 양의 조개를 캐는 걸로 동네에서 매우 유명한 분이셨다. 촬영 때 할머니께 바닷가에서 조개 잡는 걸 보여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할머니가 늙으셔서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할머니가 가장 많이 활동했던 바다에서 일하는 걸 찍을 수 없으니 촬영할 게 거의 없었다. 사실 내가 계획했던 그림은 <동백아가씨>내에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강압적으로라도 끌고 가서 촬영을 할 수 있는 나이가 이미 지났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처음 세운 계획을 버려야했다. 한 번은 애를 낳고 다시 소록도로 갔더니, 자치회의 위원장이 바뀐 상태였다. 신임 위원장이 자기에게 보고를 하지 않고 찍었다면서, 더 이상 찍을 수 없다고 말했다. 위원장이 면박을 주고, 스태프들은 몰래 숨어서 촬영하는 기분에 죄인처럼 행동했어야 하니까 힘들었다. 촬영하러 들어가는 사전승인과 일반상영 전에 반드시 자신들이 먼저 봐야한다는 ‘한빛복지협회’의 요구 등 마지막으로 들어온 경계와 의심과 검열의 눈초리가 그치질 않았다. 마지막까지 하루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편집자 註: 한빛복지협회는 한센인 병력자의 인권과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영리법인으로 2003년부터 회장으로 재직 중인 임두성은 지난 총선 한나라당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백: 그럼 부산국제영화제에도 한빛복지협회의 허락을 받고 상영한 건가?

박: 아니다.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마 다른 단체였으면 싸웠을 거다. 그런데 특수한 단체다보니 그럴 수 없었기에 최대한 존중하려고 생각을 했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을 했고, 후에 문제제기를 한다면 싸우든지 하겠다고 마음의 결정을 했고 먼저 상영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런 얘기가 없었다. ‘인디다큐페스티벌’ 때 공식 초대장을 보냈는데 오시지 않더라. 이번 VIP시사에도 초대장을 보냈는데 오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결정하는데 에너지 소모가 상당했던 것 같다. 일단 그 이후에는 상영의사가 없었다. 어차피 10년 내엔 상영할 수 없다 생각을 했는데 욕심내지 말자는 생각에.(웃음)


백: 국회의원이 되니까 정작 자신이 무엇 때문에 누구의 힘으로 의원이 된 건지 잊어버렸나보다. 영화 속 일본 재판장면을 보니 임두성 한빛복지협회장은 뒷짐만 지은 채 휠체어 한 번 미는 법이 없더라.

박: 그분? (웃음) 솔직히 말하면 재판결과만 보고 가버렸다.


백: 개인적으로 <동백아가씨>가 각별했던 것이 있기도 하지만, 맘에 들었던 것 중 하나는 대부분 방안에서 찍었다는 것이다. 활동적인 장면을 찍을 수 없는 할머니의 연령적 한계도 있었겠지만 작위적이지 않음이 좋더라. 영화나 뉴스나 미디어에 나오는 해당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끊이질 않았었다. 한센인 역사란 기득권층들에게 수탈당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아픔이 뼛속 깊이 사무친 분들이다 보니 쉽게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촬영에 대한 제약도 그런 정서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단조롭지만 할머니가 할 수 있는 현재상태 내에서 촬영을 했다는 사실이 좋게 다가오더라. 촬영을 내세워 할머니를 힘들게 하지 않은 게, 억지스럽지 않음이 좋았다는 말이다.

박: 내가 생각했던 장면은 촬영 들어가면서 다 좌절 되었다. 나는 좋은 마음을 가지고 갔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일수도 있었다. 피해가 될 수도 있고 내 욕심에 불과하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다큐멘터리라는 건 ‘내 작품’ 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욕심을 일단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원래는 할머니의 아들을 만나고 와서 많은 고민을 했는데, 막상 아들을 인터뷰하지 못해서 좌절감을 느꼈다. 아들 인터뷰는 포기를 하고 고민하면서 촬영 분을 붙여놓고 나니까 전체적으로 너무 단조롭더라. 그런데 이건 한센인들이 살아온 과정하고 현실의 단면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 이상 욕심을 내는 게 무리라는 생각을 촬영이 거의 끝난 다음에 하게 되었다. 찍는 사람으로서는 물론 욕심이 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백: 결혼, 육아, 임신을 이야기하는 대목에 보면 조창원 원장 얘기가 나오면서 그 분 재임시절 이것저것 혜택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데, 조 원장과 후임 원장을 비교하는 장면이 있다. 할머니가 매우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하셨기 때문에 혹시 후임 원장이나 그의 가족이 보면 섭섭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웃음).

박: 그 부분에 신 원장이라고 호칭하는 부분이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얘기를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백: 촬영만큼이나 준비과정에서도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많았을 것 같다.

박: <동백아가씨>는 2003년 영진위 제작지원작에 선정된 영화다. 최종 인터뷰를 하는데, 심사위원이 계속해서 이 소재를 가지고 정말 영화로 만들 수 있겠냐고 묻는 거다. 실현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느꼈던가보다. (웃음) 사실 한센인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그것도 여자감독이 찍겠다니 걱정스러웠게 뻔하다. 게다가 영진위 같은 공공기관의 자금이란 게 집행되면 완성된 결과물이 뒤따라야 하는 법이잖나. 아마도 그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 달리 보면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척도를 보여주는 것도 같더라. 뭐, 하지만 결국 지원작에 선정되었고 이렇게 완성하지 않았나.


백: <동백아가씨>를 찍으면서, 둘째가 태어났다. 내면적으로 변화는 어떤 것인가?

박: 제작기간이 3년이었는데, 준비과정에서 한센병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머리로 공부했다면, 촬영이 시작된 이후는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할머니의 손을 쉽사리 잡을 수 없었는데, 즉 내 마음에서 우러나는 만큼만 접촉을 했는데, 이후는 편하게 잡을 수 있게 되더라. 무엇보다 한센인에 대한 편견이 해소되었고, 이전까지는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항상 소재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번 영화를 찍고 나니 세상에 못 찍을 영화가 없겠더라. 배짱이 생긴 거지.






백: 사적인 이야기도 좀 듣고 싶다. 다큐멘터리(영화)를 시작한 동기가 궁금하다.

박: 처음엔 영화를 시작 했다기보다는 영상운동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리는 방법으로서 영상을 선택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노동자들의 삶이 투쟁하는 모습으로만 비춰지는 것이 아쉬웠고 그래서 인간으로서 그들의 모습을 찍기 시작하면서 다큐멘터리 영화가 시작된 거 같다. 노동자들끼리 공유하는 교육용 영상에서 벗어나 일반국민들이 공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 지금까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백: 주부로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박: 카메라를 처음 들었을 때 내 나이 24살이었다. 28살에 결혼을 했고 서른하나에 아이를 낳았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영화작업에 시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특히 야간촬영이나 지방촬영을 위한 출장은 아이를 낳은 후 어려워졌다. 그래서 몇 년 동안 출장을 가지 못했다.


백: 아이들은 영화감독인 엄마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가?

박: 아이들은 엄마가 출장 가는 걸 무척 싫어한다. 출장은커녕 저녁에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난리가 난다. (인터뷰 중간 중간 박정숙 감독은 아이에게 귀가 시간을 알려주어야 한다면서 몇 차례 문자를 보냈다) 중요한 일이 있어 일주일에 하루정도 늦게 가는 편인데, 아이들은 그것도 싫어한. 8살인 큰아이는 가끔 물어본다. “엄마는 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왜? 그냥 집에 있으면 안 돼?” 두 아이를 키우면서 영화를 만드는 일은 무척 힘들다.


백: 오프닝크레딧에 ‘다큐희망’이라고 나오는데, 설명을 부탁한다. 

박: ‘다큐희망’은 1996년 12월 노동자영상사업단 희망이라는 이름을 시작을 한 나름 역사가 있는 집단이다. 초반에는 노동자문제에 대한 작업을 주로 했고, 그 후 여성노동문제, 여성문제, 그리고 역사 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며 작업을 하고 있다. 당시 멤버들은 내가 유일한데, 현재는 나를 포함한 3명이 일을 하고 있다. 꾸준한 다큐멘터리 제작계획을 가지고 있고, 더불어 다양한 영상물제작도 함께 하고 있다. <소금>이나 <동백아가씨>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문제들을 계속 만들 계획이다. 세상을 바꾸는데 조그마한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백: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당시 관객의 반응이 궁금하다.

박: 좌석은 꽉 찼지만 처음 공개되는 자리라서 긴장도 많이 되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마침 내 뒤에 여학생 둘이 앉았는데, “이 영화 지루할 것 같아. 나 졸면 깨워줘”라는 말이 들렸다. 신경이 곤두서더라. 그런데 영화의 중반쯤 되니까 이 아이들이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졸기는커녕 말이다. 의외로 일반 관객은 지루하지 않게 보아주신 것 같다.


백: 이후에도 공개된 적이 있었나?

박: 인디다큐 페스티벌에서 상영되었다. 이때는 한센인보상운동에 도움을 준 변호사들을 모셨었고 이후에도 몇 차례의 상영회가 있었다. 대체적인 반응은 몰랐던 사실을 알게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이왕이면 한센병에 대한 의학적 지식을 좀더 가미시켰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뒤섞였다고 해야 하나. 인상 깊은 것은 <동백아가씨>를 관람한 이후 소록도에 자원봉사를 결심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다. 너무 고맙고 감격스러운 일 아닌가.


백: 곧 개봉이다. 극장에서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관객과 만나게 될 것이다. 감독의 희망대로 온 국민이 그리고 어린 학생들이 많이 보면 좋겠다. 또 많은 이들이 관람함으로써 한센인과 한센병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키는 일도 의미 있겠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왕이면 한센인들도 이 영화를 꼭 보았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제껏 기득권층에 속고 이용당해온 역사로 인해 피해의식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는 한센인들이, 진심이 담긴 이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다. 앞으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질 또 다른 소록도와 한센인의 이야기에 보다 협조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기 위해서는 한센인들 스스로 이 영화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극장에서야 힘들지라도.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박: 사실, 한센인을 상대로 한 상영을 한 적이 있다. 한센인 정착촌에서 몇 차례 상영을 가진바 있는데, 익산의 마을에서는 대체로 평온한 분위기에서 상영이 이루어졌는데, 상영 도중 “그만 꺼!”라는 소리가 들려 사정을 설명하고는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 그날 밤 끄라고 말했던 분이 우릴 자기 집으로 초대하더라. 낮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영화를 보니 옛날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아파서 그랬노라고 말하면서 “이런 영화 만들어줘서 정말 고맙다”고 하시더라. 또 (내가 참석하지 못한) 다른 곳에서는 의견이 둘로 갈렸다는 얘길 들었다. 말한 대로 2009년에는 수도권역 한센인 정착촌을 우선적으로, 한센인과 봉사자들을 대상으로 한 공동체상영을 시작할 생각이다. 나자로 마을의 상영도 확정되었다.


백: 이 사람들은 꼭 봐줬으면 하는 대상이 있을 것 같다.

박: 사실 이전 작품들은 관람대상이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동백아가씨>는 모든 국민이 봐주었으면 한다. 관객 수의 차원이 아니다. 특히 중, 고등학생, 그러니까 학생계층이 보기를 희망한다. 나이가 어릴 수 록 특정 대상에 대한 편견의 해소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중, 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상영회를 계획 중에 있다.


백: 장시간 고생 많았다. 끝으로 현재 준비 중인 프로젝트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

박: 올 초부터 시작한 작업이 있다. 가제목은 <스미다의 기억>으로 20년 전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다. 1989년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스미다 전기라는 회사가 있었는데, 전기코일을 만드는 회사였다. 70년대 한국에 들어와서 많은 흑자를 냈던 회사였으나, 87년 이후 한국 사회 변화로 인한 임금 상승과 노조가 활성화되면서 동남아로 회사를 옮기게 된다. 문제는 자본을 철수하는 과정에서 팩스 한 장으로 일방통지하고 퇴직금등 임금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채 일본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당시 노조 간부였던 4명의 여성들이 동경으로 건너가 8개월가량 투쟁을 하고 많은 성과를 얻어 돌아왔다. <스미다의 기억>은 바로 그녀들의 이야기와 그 투쟁을 지원했던 많은 일본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질 것이다. 재밌을 것 같지 않나? 내년 완료 예정이니 기대해도 좋다. 다만 최근 엔화가 너무 비싸져서 동경 촬영을 못 가고 있다는 것이다. (웃음)



소록도의 역사는 세상에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아니 마땅히 알려져야 할 것들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야 맞다. 희망과 치유와 기적이 이루어져야 할 그곳에서 벌어진, 비탄과 수난의 역사가 소록도 한센인들의 입을 봉인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비록 세월이 흘렀어도 인류가 소외된 이들을 상대로 저질러온 과오는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과거 한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행되었던 멸시와 박해가 다시금 에이즈 같은 질병을 앓는 이들에게로 옮겨갔을 뿐이다. 약자들의 역사를 묻어두고 가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다. 과거를 치유하지 못한 역사는 결코 희망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동백아가씨>는 한센인들의 마음속에 아직도 진행 중인 역사를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다. 그것은 끝나지 않은 전쟁과도 같고, 다 쓰여 지지 않은 역사책과도 같다. <동백아가씨>가 가치 있는 것은, 이행심이라는 한 사람의 삶을 통해 한센인이기에 겪어야 했던 비탄과 슬픔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박정숙 감독의 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부디, 많은 이들이 보게 되기를 바란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BLOG main image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영화 비평 매거진 '네오이마주'의 공식블로그입니다. 더 많은 글은 http://neoimages.co.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y woodyh98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21)
필진 리뷰 (260)
필진 칼럼 (149)
사람과 사람들 (55)
문화와 세상 엿보기 (10)
그리고... (41)

달력

«   2019/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 3,158,697
  • 85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woodyh98'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