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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옳으신 말씀이다. 사람이 언제까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반항아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가 되면 나 자신도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구성원 중의 하나임을 깨닫고,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든 이 세상에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건 매우 당연한 이야기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저 말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며 살아가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주위를 둘러보면 연륜과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스스로 책임을 지려 하는 이는 드물다. 나이만 먹었다고 어른은 아닐 것이다. 적당히 떠넘기고 회피하며 자리 보전하기에만 급급한 이들에게 어른이란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이토록 우울한 건 보수주의자가 많아서도 아니고, 진보주의자들이 나약해서도 아니다. 그건 아마도 책임 질 줄 아는 진짜 어른이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를 보았다. 이 영화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 세계를 집대성한 작품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그랜 토리노]가 어떤 영화냐고 물었을 때 이렇게 답해줄 수는 있을 것 같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것은 세상에 대해 분명한 책임의식을 갖고, 후세에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주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심해온 어느 노인의 최종 선택과 행동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이다. [그랜 토리노] 이전에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선 종종 선택의 문제가 중요한 화두로 등장했었다. 직접 메가폰을 잡은 [더티해리] 시리즈의 4편 [서든 임팩트]에서 그는 냉정한 법의 집행관 해리 캘러한 답지 않은 의외의 선택을 보여준다. 10년 전 자매가 집단 폭행을 당하고 그 충격으로 동생은 실어증에 걸렸으나 정작 가해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자 그 언니가 직접 복수에 나서는데 해리는 그녀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체포하지 않는다.




애초에 법이 제대로 집행되었다면 그녀도 범죄자가 되진 않았을 터. 그의 행동은 법에 따라 움직이는 경관으로서 법의 맹점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 결과인 듯 하다. 이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나이가 50을 훌쩍 넘긴 시점이었으니, 시간은 더티 해리에게도 법 보다 사람을 먼저 보게 하는 심안을 선물해 주었나 보다. 긴 세월, 물살에 깊이 패여 굵은 주름을 갖게 된 바윗돌처럼 그의 변화는 그렇게 묵직하게 시작되었다. [퍼펙트 월드]에서도 그는 모두가 흉악범으로 단정지은 어느 탈옥수의 내면을 꿰뚫어 본 유일한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좀 더 강하게 “아니오”라고 외치지 못한 나약한 노인이기도 했다. 통찰은 할 수 있으되 상황은 바꿀 수 없다. 살아온 세월만큼 깊어진 지혜와 그만큼의 책임의식을 통감하는 노인 앞에 놓여진 딜레마는 바로 저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이 일생에 단 한번뿐인 기회요 사랑이라고 간절히 애원하면서도 장대비를 맞으며 우두커니 서 있다가 메디슨 카운티 다리 위를 떠나고 만다. 초로의 복싱 트레이너이자 컷맨으로 분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조언을 해주고 상처를 봉합할 뿐 자신의 선수에게 갑작스레 힘을 불어 넣어줄 수도, 대신 링에 올라 싸워줄 수도 없는 입장이다.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건 상대방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인생을 결정짓도록 그 선택을 돕는 일뿐이다. 성당의 신부는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빠지라 하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 신은 세상의 비극을 방관하는 무책임한 존재, 그러나 그는 무책임할 수도, 방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오래 살고, 이만큼 꾸려 왔으며 그 일부를 후세들에게 물려준 어른이자 아버지인 스스로의 위치와,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상처 입은 자식들의 아픔을 뼈에 사무치도록 절감하기에 그는 무엇이든 선택을 해야만 한다.



개봉 당시 어느 평론가가 달았던 코멘트처럼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가장 보수적인 아버지의 가장 급진적인 선택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경지에 오른 이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세계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성향이기도 하다. 배우로서 마지막 출연작임을 선언한 [그랜 토리노]에서도 그의 근심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쩌면 잔뜩 주름지고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직접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이 마지막이기에 더더욱 뭔가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로 결심한 것 같기도 하다. 그 때문일까? [그랜 토리노]는 전작들 보다 더욱 극단적인 선택을 보여준다. [체인질링]이 ‘먼저 싸움을 걸진 않되 이미 시작된 싸움은 네가 마무리 지어라’라는 전언을 던져 놓고 그야말로 끝까지 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그랜 토리노]의 월트 코왈스키도 끝까지 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엔 클린트 이스트우드 본인이 직접 싸움의 마무리를 짓는 다는 점이랄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기하는 월트 코왈스키가 몽족 소년 타오에게 인생에 대해 한 수 가르쳐주고 유사 가족의 관계를 형성하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간만의 실력행사에 나서는 것은 어느 마초가 자신의 후계자를 키워내는 과정과 대동소이하지만 그로 인한 후폭풍을 묘사하는 것만큼은 예전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더티 해리] 시절만 같았어도 매그넘 몇 방으로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했을지도 모를 일, 그러나 노인이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돌고 도는 세상 일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지 오래다. 이는 매우 보편적인 깨우침이기도 하다. 한번쯤 겪어 보았을 법한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도록 하자. 누가 날 괴롭힌다. 그럼 난 덩치 크고 싸움 잘하는 친구, 혹은 형을 데리고 가서 복수한다. 그런데 과연 여기서 끝나는가? 천만의 말씀. 상대방 역시 더 많은 머릿수를 이끌고 와 응수하기 마련이다. 동네 꼬맹이들 싸움만 봐도 알 수 있는 자명한 진리, 폭력은 결국 더 큰 폭력을 부른다.


점점 덩치를 불려 오는 폭력 앞에서는 누군가가 날 지켜준다는 것도, 스스로를 지켜나간다는 것에도 한계가 드러날 수 밖에 없는 법. 코왈스키 영감이 자책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에서이다. 비록 나이가 들긴 했지만 멋지게 컴백한 카우보이처럼 자신이 쳐놓은 울타리를 지켜냈다고 여겼는데 자식들 앞에 되돌아오는 건 가속화 되는 폭력의 순환 구조이다. 설령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일이라 해도 코왈스키는 자책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곧 세상을 살만큼 살아온 어른으로서의 책임의식이기 때문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와 마찬가지로 그의 앞에 사제복을 입은 신부님이 등장하지만 그때와 달리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신 앞에서 고민을 털어놓고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짓 따윈 하지 않는다. 한 세상 제대로 살아왔다는 자부심만큼이나 강한 그의 책임감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선을 그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건 신 앞에서 지난 날을 참회하는 때가 아니라 홀로 어두운 방 안에 앉아 아버지가 만든 세상에서 상처 입은 자식의 아픔을 곱씹는 순간일 것이다. 그가 고해성사를 하고 용서를 비는 대상 역시 신이 아니라 자식들이어야 할 것이다. 거창하게 사내임을 자부하는 남자들은 웬만해선 잘 울지 않는다. 특히 스스로 제법 강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남자들은 더더욱 울지 않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운다. 자식들의 아픔 때문에 울고 그들이 아픈 것이 자신이 쌓은 세상의 업보 탓인 것 같아서, 그 죄의식 때문에 운다. 참고 참고 또 참다가 우는 방법 조차 잊을 무렵에 간신히 터뜨리는 울음이기에 그 눈물의 양은 적으면서도 염도는 지독히 높다. 짜다 못해 쓰디 쓸 만큼.

영화의 마지막, 코왈스키가 몽족 갱들의 아지트를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며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은 [서든 임팩트]에서 악당들과의 결전을 준비하던 그때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20여 년의 시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생생히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이 기시감. 그때나 지금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여전히 고집불통이다. 딱히 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가 믿는 것은 신의 계시 따위가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고수해온 자기만의 방식이다. 앞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이 있다면 기꺼이 부딪힌다. 지켜야 할 건 반드시 지켜 낸다. 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 더 적극적으로 발포명령을 저지하지 못했던, 그리고 이것이 일생에 단 한번뿐인 기회임을 알면서도 쓸쓸히 돌아서야 했던 과거의 그 노인은 이제 확실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긴다. 물론 외골수 노인네의 선택에 동조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 그렇게 고집불통이냐고, 왜 그리도 유연하지 못하냐고 책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막힘 없이 전능한 ‘모든’ 아버지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책임을 다 하는 ‘어떤’ 아버지이다. 코왈스키가 타오에게 해주는 것도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길을 벗어나 시원하게 내달리게 만드는 정도일 뿐. 그러나 진정 위대한 카우보이라면 총 대신 애마를 유산으로 남기지 않을까? 자신의 업과 함께 총성마저 거둬간 거리를 자식들이 좀 더 편하게 활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누군가 머물렀던 자리엔 그 사람의 흔적이 남게 된다. 그리고 소임을 다한 자가 남긴 그 흔적은 후세들에게 유전자처럼 각인되어 낮고 묵직한 진동음과 함께 쉼 없이 박동할 것이다. 낡고 오래되었으나 여전히 그르렁대며 힘 차게 나아가는 차, 그랜 토리노처럼. 클린트 이스트우드 할아버지,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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