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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진

[그랜 토리노]에 대한 백건영 편집장님, 신은영님, 류태희님의 글을 읽었다. 한결같이 너무 좋은 글들이었다. 좋은 영화에 좋은 글들을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 비단 이곳 네오이마주뿐 아니라 다른 비평 사이트에서도 [그랜 토리노]에 대한 좋은 평들은 쉬이 찾아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좋은 평들을 써주신 분들께 감사함을 느끼면서, 한결 가벼운 맘으로, 비겁하게 살짝 묻어가는 느낌으로 시시콜콜한 감상평을 적기로 했다. 굳이 필요가 없는 조악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꼭 몇 자 끄적이고 싶은 것은, 좋은 영화를 보면 늘 그렇듯 무언가 글로 작게나마 화답하고 싶은 경외감의 욕구일 것이다.


엔터테인먼트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의 미덕은 일단 재미있다는 데에 있다. 나는 [체인질링]을 보는 내내 울었다. 아이를 찾으려는 어머니의 눈물겨운 모정에도 그랬지만, 국가와 기관이 한 개인에게 가하는 지극히 촉각적인 폭력을 보면서 눈물을 참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랜 토리노]를 보면서는 시종일관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마지막 숭고한 죽음 장면에 이르기 전까지 나는 관객도 몇 없는 극장에서 민망하게 큰 소리로 웃어댔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같은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사례는 전에는 없었다.

류태희님의 말대로 컨벤션의 집합이면서도, 또는 장르에서 쉽게 찾기 어려운 내러티브의 지연이 일어나면서도 너무 재미있는 이유는 뭘까? 같은 감독의 영화를 보며 마치 민망한 부위에 털이 무성하게 솟아날 만큼 울었다 웃었다 할 수 있는 건 왜일까? 실제로 대부분 워너의 협력을 받으며 멜파소에서 고집 있게 만든 클린트 옹의 영화들은 한결같이 섭섭하지 않은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의 수많은 영화들. 언뜻 떠올려봐도 다들 너무 재미있었다.



아우라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에는 아우라의 파괴가 일어난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근대 예술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여기는, 매우 낙관적인 시각을 유지했다. 그는 영화가 이런 아우라의 파괴에 한 몫을 단단히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영화는 대단히 불연속적인 제작 단계를 거치는 예술이기 때문이리라. 실례로 연극에서 지녔던 배우의 아우라는 영화에서 모두 걷히게 되었다. 관객이 없는 세트장에서 거듭되는 테이크를 찍으며 배우가 가진 아우라는 상실되고 배우는 무언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된다.

그러나 벤야민도 그 파괴된 배우의 아우라가 다시 쌓여가게 되는 현상에 대해선 미처 예측하지 못했나 보다. [그랜 토리노]를 보면 클린트 옹의 아우라가 철철 넘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더티 해리]의 클린트 옹, 그보다 앞서 황야를 누비던 카우보이로서의 클린트 옹의 아우라. 신은영님의 글에 의하면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애초에 출연까지 할 생각은 없었으나, 자기 연령대의 인물을 다룬 작품이고 해서 주연을 맡을 결심을 했다고 한다. 잘한 결심이다. 클린트 옹의 아우라가 없는 [그랜 토리노]는 상상할 수도 없다.



카우보이

존 포드 시대의 서부극에서는 주인공이 마을을 위협하는 외부의 세력과 대치한다. 적은 늘 마을 외부에 있다. 이는 분명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일어났던 골드러시와 무관하지 않을 게다. 서부를 차지하기 위해 동부인들은 토착민들(인디언족)을 몰아내야만 했고, 그렇게 차지한 마을을 지키기 위해 외부의 적들과 끊임 없는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의 적은 보통 백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악은 외부가 아닌 마을 내부에 존재하게 된다. 서부극의 주인공은 방랑자이며 우연히 마을에 머물게 되었다가 악의 세력을 접하게 된다. 이윽고 외로운 카우보이는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고 홀연히 마을을 떠난다. 서부극이 기존 서부극을 패러디하던 이 시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그 시대 서부극의 둘도 없는 아이콘이었다.

[그랜 토리노]에서 이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카우보이 아우라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백건영 편집장님이 [체인질링]에서 수사관들이 살인범의 집으로 조사를 나가는 장면에서 서부극의 진한 징조를 느꼈듯이, [그랜 토리노]에서 수를 구하려는 월터의 모습은 숨막힐 정도로 서부극 시대의 클린트 옹을 떠올리게 한다. 주머니에서 손가락 총을 꺼내어 놈들을 차례로 겨누는 장면은 상투적이기는 하나,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동시에 전율적이다.

이 영화를 클린트 서부극의 확장판이나 완결판으로 본다면 마을 내부에 존재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마을을 떠난다는 식의 도식 또한 고찰할 여지를 남긴다. 월터가 직면한 문제는 표면적으론 기존 서부극에서처럼 한 마을 안에서 일어난 일이긴 하다. 그러나 비단 한 마을만의 국지적 문제로 치부하기엔 사안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일까. 그는 싹 쓸어버리고 떠나는 대신 희생적인 죽음을 택하게 된다. 그 죽음은 방법론적인 타당함을 떠나서 숭고하게 느껴진다.




 

숭고

숭고는 가늠할 수 없는 압도적인 것을 맞닥뜨렸을 때 발생하는 감정이다. 신이나 자연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경외감 같은 것 말이다. (이러한 아우라는 벤야민도 깨지길 원치 않았다.) 월터의 죽음에선 숭고가 느껴진다. 우선 그가 영웅적인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극에서 수는 성조기를 집 앞에 버젓이 걸어놓은 마초 참전 용사에게 영웅이라고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미국, 영웅, 성조기. 이것들은 미국 수퍼히어로물에 물리게 등장하는 요소들이다.

그러나 클린트 옹의 히어로는 수퍼히어로와는 다르다. 히어로긴 히어로인데 ‘수퍼’가 빠져있다. 앞에 수퍼-가 붙은 히어로는 전인류를 구원한다. 미국으로 치환되는 한 영웅이 전인류를 구하기 때문에 역겹다. 하지만 클린트의 히어로는 대상부터가 다르다. 적은 아랍이 아니라 미국 내부에 있다. 월터가 구하는 것은 고작해야 옆집 몽족 식구들뿐이다. 그것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희생 제의로 여겨지는 죽음이다. 성조기를 꽂은 폴란드계 이민자의 영웅적 모습에선 진솔한 감동이 밀려온다.

또 한가지. 구약 시대 희생 제물은 주로 흠 없는 어린 양이었다.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예수의 희생 역시 흠 없는 신의 아들의 희생 제의였다. 이것은 숭고한 의식이다. 죄가 없는 제물이 죄를 지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극 중 월터는 흠 없는 희생양이 아니다. 그는 과거 한국전에서 어린 아이를 포함한 많은 사람을 죽였고, 현재 여전히 인종 차별과 마초적인 남성상, 배타적인 성향을 간직하고 있는 외로운 늙은 인간일 뿐이다. 온갖 정비 도구를 수집하여 수많은 다른 사물은 척척 고쳐도 정작 자신의 죄의식은 손을 대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듯 완전치는 못하지만 희생 제물로 자기를 기꺼이 바치는 그의 마지막 선택에선 여느 희생 제의와 마찬가지로 경외감이 느껴진다. 아니, 오히려 흠 없지 않기에 더욱 숭고하게 느껴진다. 그는 장례식에서 신부가 말했던 것처럼 삶과 죽음을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마침내 신부도 하지 못한 희생을 위해 몸을 던진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엔 엄숙함과 비애감이 동시에 담겨있다.



보수

세상엔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사실 변할 수 없는 것, 이른바 절대 진리가 과연 존재하느냐의 여부는 여간 골치 아픈 문제가 아니다. 진리 개념은 철학을 뛰어넘어 종교적인 문제이기도 한 연유이다. 기독교의 유일신,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 등, 서양사상사는 불변의 진리에 대한 철학적, 종교적 탐구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양에선 얘기가 다르다.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법은 절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것이 생겨날 때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없어질 때 저것이 없어진다는 연기법의 관점에서 만물은 상대적인 우연의 법칙에 의해 생성되고 영겁한다.

이렇듯 진리에 대한 개념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그 자체로는 변할 수가 없는 지극히 자명한 개념인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학문을 뛰어넘는 믿음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에 있다. 흔히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려는 걸 일컬어 보수라고 한다. 보수는 본래 더 없이 아름다운 단어이다. 단지 마땅히 변해야 할 것을 변치 않아야 한다고 고집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변치 말아야 할 것을 변해야 한다고 고집한다면 그 또한 문제가 될 것이다.

클린트 옹의 보수는 아름답다. 그는 마땅히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키려는 보수주의자이다. 이를테면 사랑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이 아가페적이든 에로스적이든 어떤 형태가 되었든 간에 소중히 지키려는 행위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래서 [그랜 토리노]는 아름답다. 이 영화는 타 문화에 대한 극진한 경외심을 잃지 않는 반면, 미국 내의 문제를 피해가지도 않는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확히 구분하며, 그 안에서 자신이 죽음과 바꿔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눈물 나게 고백하는 진중한 영화이다.


씨네 21의 20자평에 어떤 평론가가 클린트 할아버지 제발 무병장수하시라고 적은 걸 보았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류태희님의 말처럼 클린트 옹과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다소 격한 감정으로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살아서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행운이다.” 클린트 옹이 너무 좋아서 이런 살가운 문자도 아깝지 않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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