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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연찮게도 자주 마주치게 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다. 거의 매주 항상 그 시간에 텔레비전을 켜면 기이하게도 그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거나 혹은 방송될 채비를 하고 있다. 다름 아닌 <콘서트 7080>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나 자신에 흠칫 놀란다. 혼이라도 뺏긴 채 넋을 잃고선 브라운관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흘러간 옛 가수의 옛 노래들에 나는 그만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음악에는 확실히 사람을 일순간에 사로잡는 마력이 있는 게 분명하다. 음악을 듣고 있는 어느 순간 갑자기 존재의, 세계의 충일감을 느낄 때가 있지 않은가. 정말 그렇지 않은가! 음악은 그렇게 인간을 속절없이 ‘감염’시키고 마는 것이다.

음악이 인간에게 전이되는 과정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건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정체불명의 힘에, 나라는 존재의 속절없는 내맡김을 경험하는 것과 같다. 아니 그 경험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그건 결코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 버린 정말이지 ‘몹쓸 사람’, 고(故) 김광석.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공연을 한 번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적이 없다. 창피한 고백이지만, 그의 부고를 방송에서 접하기 전까지 내겐 그의 존재감조차도 극히 희박했던 듯하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비.극.이다. 소극장 학전에서 레코딩된 그의 기록적인 1000회 기념공연은 아직도 그리고 여전히 꾸준한 나의 애청음반이다. 그 음반에서 김광석은 자신의 두 가지 이야기 꾸러미를 맘씨 좋은 아저씨마냥 좌르르 풀어 놓는다. 김광석, 그의 ‘노래 이야기’와 ‘인생 이야기.’

그는 공연 중간 중간 자신의 구수한 이야기보따리를 관객에게 던져준다. 마치 어느 추운 겨울날, 아랫목에 꼭꼭 몸을 동여맨 채 할머니의 재미난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다.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연주하기 전엔 그 노래에 얽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김목경의 원곡인 그 곡을 어느 날 우연히 버스 안에서 듣게 되었는데, 순간 벅차오르는 감정에 그만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토해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버스 안인지라 죽을힘을 다해 눈물을 참으려 노력하면서, ‘끄으응’거리면서 말이다.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가진 그의 미국 공연을 본, 당시 유학중이던 한 선생님으로부터 그 때 그 뉴욕 공연 이야기를 얼마 전 전해들은 기억이 난다. 공연장에 있던 관객들은 물론, 노래를 부르던 김광석 그 자신까지도 그만,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공연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는 노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그는 정말이지 그런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노래 하나로 사람을 울리고 웃길 수 있는 목소리를 가진 기이한 재능의 사람, 김광석. 마치 일제 강점기 어느 명창이 일본 순사들 앞에서 했다던 호언장담이 떠오른다. 자신의 노래로 당신들을 울리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내놓고야 말겠다던 이야기. 그리고 그 차가운 심장을 가진 이들에게서조차 눈물을 쏟아내게 만들었다는 그 거짓말 같은 놀라운 이야기. 김광석의 ‘소리’에는 그런 원초적 순수함이 있었던 것이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한 북측 병사(송강호)의 의미심장한 말을 기억하시는지. “갸는 와 그리 빨리 죽었다냐?” 다시 한 번, 몹쓸 사람 같으니라구.

<콘서트 7080>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언어라는 기호적 메커니즘으로는 결코 재현할 수 없는 그 무엇. '원-음악(archi-musique)'. 그것이 예술의 원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말이다. 니체 또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음악이 모방하는 대상이란 전혀 없다”고. 그가 전부라 생각하시는지. 아니, 모든 것은 ‘리듬’이라 말한 독일의 위대한 낭만주의자 횔덜린도 있다. 독일 낭만주의의 세례를 받은 필립 자꾸-라바르뜨, 장 뤽 낭시는 또 어떤가.(불운하게도 이들의 사상은 우리나라에 거의 소개가 되지 않았다. 제대로 된 번역서 하나조차 없는 상황이다) 그들은 ‘음악성’을 낭만주의 정신에 비유하며, “낭만주의는 우리의 순수함이다”라 하지 않았던가. 그 무언가에 대한 감염, 박동, 숨결, 울림, 공명, 스크래치, 바이브레이션.

오늘 다시 한 번 김광석의 음악을 꺼내 들어야겠다. 당신은 김광석의 어떤 음악을 사랑하시는지. 나의 베스트는 <그날들>과 <혼자 남은 밤>이다. 당신의 베스트도 알려주시길. 당신의 베스트가 궁금하다. 더불어 그 노래에 얽힌 당신의 사연들도. 김광석의 음악은 단지 음악을 넘어 ‘인생’의 동치항이었잖은가.



2. 얼마 전 나는 여기서 김광석을 이야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노래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내 안에 촉발되는 ‘음악성’을. 김광석의 ‘뜨거운’ 음악을 통해 우리에게 느닷없이 찰나의 순간 감지되는 ‘음악성’을 이야기했다. 말하자면 이번 이야기도 이전 이야기의 연속선 상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때 ‘음악성’이란, 꼭 물리적 차원에서 실제 우리의 두 귀를 통해 들을 수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물론 음악은 그 어떤 예술장르보다도 더 유리하게 ‘음악성’을 체감하게 하는 데 가장 훌륭한 방법적 도구가 될 수 있다. 음악이야말로 가장 비재현적인 장르이기 때문에.

생각해 보시길. 음악을 들을 때 탈아(脫我) 혹은 무아(無我)의 지경으로 우리를 빠져들게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지.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디오니소스적 도취 상태로 이끄는 것인지를.

귀가 아니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들을’ 수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숨을 쉬면서 또 다른 차원에서 ‘듣고’ 있다. 문학에서도 우리는 그 음악을 느낄 수가 있다. 기형도의 시를 읽고 말할 때 바로 그 ‘소리 없는’ 음악을 말이다. ‘들리지 않는’ 음악을 우리는 ‘듣는다’. 시야 원래 음악적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편견은 접어 두시길.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신화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자신이 아버지를 살해한 패륜아인데다 자신의 친어머니와 부부의 연을 맺은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우리는 두 눈 뽑혀진 그의 절규가 기록돼 있는 ‘문자’를 통해서도 그 소리를 ‘듣는다’.

사이렌의 아름답지만 죽음으로 유혹하는 소리 앞에 마주한 오디세우스의 여정에서도 우리는, 그야말로 ‘듣는다’. 한번 더, ‘문자’에서(도) ‘소리’를 듣는다(!). 그 밖에도 그런 구체적인 예는 수도 없어 이루 다 열거할 수조차 없다. 그래서 차라리 이때의 음악을 ‘원-음악’(archi-musique)으로 고쳐 쓰는 것이 낫겠다. 이 때 우리가 느끼는, 감지하는, 감염되는 ‘음악성’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들리지도 않는 소리, 리듬, 박동이라니.

나는 이 정체불명의 ‘개념으로 포획 불가능한’ 그 무엇이 ‘낭만주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때 낭만주의는, 세인들로부터 너무나 쉽게 매도되고 평가절하 되는 그런 값싸고 알량한 부르주아적 ‘취향’의 그것이 아니다. 차라리 실은 우리 모두는 '항상-이미' 낭만주의자였고 낭만주의자다.

인간의 머리 혹은 합리적 이성을 통해 ‘개념’으로 통합되는 완전무결한 실체로서의 예술을 적어도 나는 (낭만주의) ‘예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개념으로서의 예술을 믿는 이는, 적어도 오늘날, 항상 그리고 이미 ‘심미적 인간’이 아니다. 느끼기 이전에 이미 사고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감성에 일백 퍼센트 솔직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텔레비전 심야 음악 방송에서 서세원의 친아들 서동천이 보컬로 소속돼 있는 ‘미로밴드’의 공연을 볼 기회가 있었다.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을 불렀는데 솔직히 객관적으로 말해 그의 라이브 실력은 함량미달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물리적으로 내 귀에 들리는 그의 가창력은 외려 브라운관 앞에서, 그것도 녹화방송으로 듣고 있음에도 불구, 지켜보는 내가 내내 불안하고 심지어는 애처로워지기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나는 보컬의 그 갈라지는 (들리는) 목소리에서, 어느 사이 핏대가 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보컬의 얼굴에서, 어느새 ‘다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일종의 ‘빠시옹’(passion), 즉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정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적어도 어떤 순간만큼은 나에게 (놀랍게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미로밴드의 이날 공연이 방송되고 여러 비난의 소리들이 인터넷에 올라왔다고 한다. 국내는 물론, 유튜브를 통해서 해외에까지 그 공연 동영상이 퍼져 국제적 망신이 되었다느니, 국내에서 활동하는 모든 음악인들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들.

서동천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부끄럽고 창피하다”라는 글을 올렸다고 한다. 하지만 왜 부끄럽고 창피해 하는가. 혹은 누가 부끄럽고 창피하게 만들고 있는가.

나는 적어도 서동천이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 신념의 구체적 내용물이 무엇이건간에, 자신이 믿는 신념에 자신을 온전히 내던졌다는 바로 그의 태도에서 나는 어떤 낭만주의적 순수성을 감지하게 된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그 즉각적인, 그 무언가에 대한 감염, 박동, 숨결, 울림, 공명, 스크래치, 그리고 바이브레이션. 그러니 비난과 손가락질은 있었어도 그 신념을, 태도만큼은 잊지 않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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