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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와 이명세의 ‘첫사랑’

필진 칼럼 2007.11.12 15:40 Posted by woodyh98

‘아저씨’ 김성호의 ‘빛나는’ 머리와 ‘소녀’


가수 김성호를 아시는지. 그를 떠올릴 수 있으려면 아마도 그의 이름 뒤에 ‘회상’이란 수식어를 붙여야할 것이다. ‘김성호의 회상’, 이렇게. 가수의 존재감보다 그가 부른 노래의 멜로디나 곡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경우가 있는데, 김성호가 꼭 그렇다. 사람들은 방송 출연이 거의 없었던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실제로 그의 곡 <회상>은 TV가 아닌 라디오를 통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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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얼굴 없는 가수’ 김성호의 얼굴을 <콘서트 7080>에서 볼 수가 있었다. <회상>을 부를 때 처음 본 그의 모습 자체도 감동이었지만, 뒤이은 <당신은 천사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있습니까> 때의 그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의 머리, 아니, 머리 중에서도 그의 이마다. 이마가 ― 송구스럽지만 ― 훤히 벗겨져 계셨던 것이다. 그날 난 그의 이마에서 빛을 보았다. 꽤나 강렬한, 쉬 잊혀지기 힘든 어떤 광채를.

<당신은 천사와> 때 김성호는 ‘소녀’를 노래하고 있었다. 상상이 되시는지. 벗겨진 그의 광채 나는 머리와 함께, 소녀를 조곤이 불러대는 그의 모습이 말이다. 천사의 마음을 가졌다는 그녀를, 자기의 더러운 것이 묻을까 보아 가까이 다가가기조차 망설여졌다던 그녀를, 단 한번 커피를 같이 한 기억에 그만 병이 들어버리고야 말았다던 그녀를, 김성호가, 머리가 벗겨진 ‘아저씨’ 김성호가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천사와>를 부르던 김성호의 모습 ― 이마 ― 에는 확실히, 감동을 넘어선 무언가의 울림이 있었다. 약간의 충격을 동반한 어떤 울림의, 지워지지 않는 상흔이. 과거 어느 때의 어느 첫사랑을 떠올리던 ‘아저씨’ 김성호의 모습에 말이다.


이명세, 기어이 다시 불러낸 첫사랑

또 한명의 ‘아저씨’ 이명세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오랫동안 잊었던 혹은 묻어두었던 ‘첫사랑’을 영화 [M]에서 이야기했다. 93년 그가 찍었던 영화 <첫사랑>으로도 모자라 그는 기어이 다시 한번 ― 앙코르! ― ‘첫사랑’을 소환해냈다. 왜일까. 최근 인터뷰에서 이명세는 말했다. “삶이든 사랑이든 스러져 가는 기억으로만 남는다는 게 슬퍼. 애통하고 가슴이 미어져.”

그래, 문제는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인 ‘시간’이다. 결국 ‘시간’과 ‘기억’의 문제인 것이다. 이명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폭풍의 언덕> 등 첫사랑과 관련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이 땅에 존재함과 관련해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첫사랑에 대해 쓴 사람이 많은 이유는 그 안에 비밀이 있기 때문이야. 우리가 잃어버린, 지금은 돌아가려야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첫사랑엔 있어.”

첫사랑에는 ‘비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사랑의 비밀은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 잃어버린 무언가가 하도 원통하고 안타까워 벗겨진 머리의 아저씨(김성호)에게마저도, 머리가 희끗희끗 센 아저씨(이명세)에게마저도 느닷없이 다가와 말을 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첫사랑’에는, 보다 정확하게는, ‘첫사랑의 기억’에는, 이명세의 말처럼, 근본적으로 어떤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있다. 그건 ‘재현’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그저, 단지, ‘기억’할 수밖에, ‘추억’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기억과 추억은, 안타깝게도, 과거라는 원본을 일백 퍼센트 충실히 복제해낼 수 있는 메커니즘을 결여하고 있다는 인식론적 결격사유를 가진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슬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저 과거를 더듬어 그것의 근사치와 조우할 수 있다면 그것에 그만 만족해야 하므로 슬프다는 것이다.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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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민우(강동원)와 미미(이연희)의 첫사랑을 보여주던 과거 씬들에 있다. 미미의 미용실을 방문한 민우, 그의 머리를 감겨주던 미미, 자전거를 타고 데이트를 나가던 두 연인, 같이 보았던 영화, 그리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목격한 해지던 어느 저녁노을의 기억들. 특히 미미를 자전거 뒷자석에 태운 채 ‘방구차’의 연기를 뚫고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지던 민우의 자전거 장면이 매혹적이었다. 미용실 안쪽에서는 미미의 어머니가 “어디 가니?”라고 물었다. 미미는 대답한다. “네. 어디 가요.” 정말이지 그 둘은 어디론가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애써 ‘잊혀낸’ 기억의 근원을 기어코는 찾아내려 어디론가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전 장면에서 미미는 루팡 바(bar)에서 창작력의 고갈로 힘들어하던 민우에게 담배를 건넸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냥’과 함께, 그 순간, 그어진 성냥의 마찰력과 함께 민우의 시간은 과거 어느 때로 튀어 올랐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 순간, 우리가 믿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적 시간관은 해체된다. 현재에서 미래가 아닌 과거로, 시계의 바늘이 휘어버리는 것이다. 시간이 돌연 미쳐버린다.(들뢰즈의 ‘순수과거’)

이 때 소환된 과거는 과거를 온전히 ‘재현’하지 못한다. 재현할 수 없다. 미미는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민우에게 “네가 슬픈 영화를 볼 때가 아니라 기쁜 영화를 볼 때마저도 나의 부재를 슬퍼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자신을 온전히 기억해달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불완전하게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과거가 이미 현재와 부지불식간에 얽혀 있기 때문이다. 현재라는 필터를 거친 과거가 온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세 번이나 반복-변주되는 횟집 씨퀀스를, 루팡 바를 찾아 헤매는 민우의 여러 번 반복되는 방황을, ‘10월 28일’이라는 특정 날짜가 민우의 기억 속에서 어떻게 소환되고 있는지를 떠올려보시길.) 그래서 이명세는 슬픈 것이다.


이명세의 ‘미쳐버린 시간’

다시 한번 물어봐야 한다. 이명세는 왜 ‘첫사랑’으로 회귀했을까. 그가 ‘스타일리스트’이기 때문이다. 그가 ‘내용-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명세가 왜 에서 첫사랑의 문제를 다루었는지, 그 해답을 푸는 결정적 단초가 되지 않을까. 흐르는 시간, 불완전한 기억.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좋았던 느낌이 있잖아. 꼭 내용이 좋아서 좋은 건 아냐. 그날 햇빛이 좋았을 수도 있고, 바람이 간지럽게 잘 불어줬다든지, 흔한 얘기였는데 참 편안했다든지 그런 느낌이 있지. 기억은 그렇게 남는 거 같아. 인생의 구조가 그래.”

이명세는 인간-기억의 메커니즘을 근본적으로 결정짓는 것이, 내용이 아닌 스타일 ― 형식 ― 임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유니트 오브 액션’이 아니라 ‘유니트 오브 이펙트’. ‘행동(액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후적으로 초래하는 ‘효과(이펙트)’야말로 ‘인생의 구조’라는 것이다.

민망하지만, 창피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벗겨진 머리의, 소녀를 노래하던 <당신은 천사와>의 김성호 앞에서 그만 엉엉 꺼이꺼이 곡소리를 내고 울어버리고는 말았다. 세상에, 맙소사. 뜬금없이, 맥락 없이, 내 ‘첫사랑’ R이 화르륵 내 눈앞에, 내 머리 속에 불려와졌던 것이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나는 내 첫사랑 R과의 구체적인 ‘내용’을 떠올리고 곡소리를 냈던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저 내 첫사랑이라는 순수‘형식’이 있었을 뿐이다.
이명세는 언젠가 한 영화지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93년도 당시엔 심드렁하게 흘러 넘겼던 그의 영화 <첫사랑>이, 이유도 모르게(!) 갑자기 생각이 나서는 울고 말았다는 한 통의 전화를. 아마 그 기자는, 김성호와 <당신은 천사와>가 느닷없이 내게 소환시킨 내 첫사랑 R의 ‘형식’과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러니 이명세는 젠체하는 스타일리스트도, 현실감각 없는 완고한 에고이스트도,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거짓말쟁이’도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이 땅 위에서 이명세는 적어도 어느 측면에서 심하게 과소평가되거나 오해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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