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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희


(스포일러 있습니다)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한강다리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서서 통화중이다. “원금에 이자를 합쳐서 총 액수가 2억xx원이 넘는다구요… 이제야 용기가 생기네요.” 비장한 표정의 이 남자, 다리 아래로 출렁이는 한강 물 속으로 몸을 날린다. 이윽고 카메라는 섬으로 떠내려 온 남자의 주변을 훑는데 시커먼 강물에 어딘가 낯익은 풍경이다. 여기가 어디?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남자의 눈에 저 멀리 강물 너머로 63빌딩이 보인다. 그렇다. 이곳은 바로 한강 한가운데 떠있는 무인도 ‘밤섬’. 그렇게 어이없게 시작된 이 남자 ‘김 씨’(정재영)의 밤섬표류기, 영화 <김씨 표류기>는 첫 장면부터 코믹하고 명료하게 주인공의 처지를 설명한 후 시종일관 군더더기 없이 직진한다.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김 씨는 그러나 기쁘지 않다. “지지리도 못나서 죽지도 못했다”며 넥타이로 목을 매려고 한다. 그러나 갑작스런 설사로 이번에도 실패. 하지만 볼일을 보던 중 발견한 새빨간 사루비아꽃이 너무나 탐스럽다. 쭉쭉, 있는 힘껏 빤다. 달고 맛있다. “백년 만에 빨아본다”는 그 사루비아꽃이 낭패스럽던 그를 서럽게 울린다. 엉덩이를 깐 채로 엉거주춤 대성통곡하는 그의 뒷모습이 애처롭다가도 너무 웃겨 눈물이 난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몰입하게 하는 힘은, 바로 야생 배우 정재영의 열연이다.


캐스팅 못지않게 핵심을 콕 찔러주는 간결하고 재치 있는 대사도 맛깔난다. 대화할 상대가 없어 외로운 김 씨가 독백처럼 읊조리는 내레이션도 어눌한 듯 코믹하게 제 몫을 해낸다. 119에 전화를 거는 장면, ‘오리배’ 견인 장면 등의 현실 풍자에서는 감독의 유머 감각이 돋보인다. 자신의 양복을 입혀서 만든 허수아비와 대화하는 장면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의 톰 행크스와 배구공 ‘윌슨’을 연상케 하지만, <김씨 표류기>의 허수아비가 훨씬 더 정겹다.(허수아비의 머리는 30년 전통의 ‘오뚜기 케첩’ 깡통(식당용)이다. 아, 중년 관객을 배려(?)한 감독의 센스라니!)


죽지 못해 사는 남자의 밤섬 생존기

혼자서 척박한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김 씨가 벌일 고군부투는 일찍이 ‘로빈슨 크루소’로부터 <캐스트 어웨이>에 이르기까지, 이미 관객들에게 익숙한 그림들이라 자칫 식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죽어야 사는’ 남자가 죽지 못해 살다가 새로운 목표를 찾게 되면서 강한 삶의 의지를 보여주지만 그 목표가 터무니없이 사소하다는 점, 고전 멜로 영화에서 사랑의 증표로 등장하던 ‘병속의 편지’가 히키코모리인 여주인공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하는 도구라는 설정 등, 발상의 전환으로 플롯이 안고 있는 위험을 비켜나간다.


또한 주인공을 자살로 내몬 상황과 서울이라는 대도시 안에 있지만 아무도 그 존재에 대해 관심이 없는, 그 자체로 ‘외톨이’인 ‘밤섬’이라는 공간이 갖는 상징성까지, 2009년을 사는 한국인(엄밀히 말하면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정서가 관객들에게 동질감을 부여한다. 아무튼 목을 매려다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우리의 김 씨, ‘언제라도 맘만 먹으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는 무인도, 아무도 그에게 태클을 걸지 않는다. 빚 독촉을 받을 일도, 신용불량자로 마음고생할 일도 없으니 힘들게 자살을 시도할 필요도 없다. 이왕 건진 목숨, 조금 더 살아보기로 한다. 이제 살아 있는 몸뚱이는 배가 고프다고 신호를 보내는데 먹을 것이 없다. 이름 모를 버섯을 뜯어먹어 본다. 잠시 움찔했지만 먹다가 죽으면 오히려 일석이조, 죽기로 작정하니 세상에 거칠게 없다. 그야말로 “사는 게 참 편해졌다.” 일단 살기로 결심하고 나니 이 황량한 무인도 ‘밤섬’이 달라 보인다. 물살을 타고 밀려온 쓰레기 더미를 뒤지니 쓸 만한 것들이 꽤 있다. 버려진 오리배를 주워 보금자리도 꾸미고 물고기 잡는 방법도 터득해 그럭저럭 생활을 유지해나간다.


그의 일상은 나날이 새롭게 진화할 뿐 아니라 점점 흥미진진해지기까지 한다. 밤섬 주민 김 씨에게는 더 이상 목을 조이는 넥타이와 양복이 필요 없다. 사각 팬티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도시라는 인위적인 틀을 벗어나 원초적인 욕망에 집중하니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배를 채우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자발적으로 노동하는 삶, 그 단순한 일상들에서 이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씨의 섬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새로운 목표가 생긴다. 쓰레기 속에서 발견한 인스턴트 자장면의 스프 하나가 그에게 간절한 욕망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머리를 쥐어뜯던 그는 새똥을 통해 천금 같은 깨달음을 얻는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김씨, 땅을 갈고 새똥 뿌리고 물주고…. 뙤약볕에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이어도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궁리하고 몰두한다. 지금의 그에게 자장면 한 그릇은 살아갈 이유이자 ‘희망’이기 때문이다.


히키코모리 그녀의 밤섬 관찰기

밤섬이 내려다보이는 한강변의 어느 아파트, 20대 초반의 여자 ‘김씨’(정려원)가 사는 곳이다. 히키코모리 생활 3년째, 좁은 방안에서 모든 일상을 영위한다. 열성적으로 미니홈피를 꾸미고 네티즌들의 칭찬 댓글에 만족해하며 온라인 쇼핑으로 세상과 접촉한다. 칼로리를 재어 음식을 먹고 만보기로 운동하는 등 나름의 규칙을 정해놓고 하루하루 열심히 산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망원카메라로 달 사진 찍기다. “아무도 살지 않기에 아무도 외롭지 않아서” 좋아하는 달은, 그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세계다. 그런 그녀의 카메라에 어느 날 한 남자가 우연히 포착된다. 바로 밤섬의 김 씨, 덥수룩한 머리털과 수염, 팬티만 입은 그를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생명체라고 생각한 그녀는 지구인을 대표해서 그에게 안부를 전하기로 마음먹는다.


여자 김 씨의 캐릭터, ‘히키코모리’는 우리의 일상에 존재하지만 수면 위로 부각되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혹은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외톨이’다. 얼굴의 흉터와 학창시절의 따돌림이 그녀를 고립시킨 원인이라 짐작케 하지만 사연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지난 세월이 너무 외롭고 힘들었을, 그래서 자신의 세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그녀의 삶은 무채색이다. 마르고 생기 없는 김 씨 캐릭터를 배우 정려원은 최선을 다해서 구현한다. 명연기는 아니지만 캐릭터에 몸을 맞추는 성실함을 보여준다. 밤섬 김 씨의 사진을 찍으며 매일매일 살아있는 걸 확인할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드디어 그와의 교신을 위해 과감히 외출을 감행한 그녀, 몇 개월을 기다려 답장을 받고는 뛸 듯이 기뻐한다. 유일하게 편견 없이 그녀와 대화할 수 있는 상대이기에 너무도 고맙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그가 그녀를 궁금해 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 고민하던 그녀, 가짜 얼굴이 담긴 편지를 보내려다 그만 포기한다.


차가운 현실 틈 속 희망 한 조각

한편, 김 씨는 나뭇가지 위에 걸린 병 속의 편지를 우연히 발견하게 되면서 얼굴도 모르는 이와 교신을 주고받게 된다. ‘완벽하게 심심’하던 삶에 찾아온 예기치 않은 만남은 새로운 설렘과 기대를 가져다준다. 강너머 어딘가에서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음을 알게 되자 강가의 흙위에 답장을 쓴다. ‘How are you?’로 시작된 인사는 어느새 ‘Who are you?’로 바뀐다. 처음엔 인사를 주고받는 것만으로도 기뻐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궁금해진 것이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진다. 그런데 답장이 없다. 기다리는 김 씨는 괴롭다. ‘Why?’라고 신호를 보내고 고민한다.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니 삶이 다시 복잡해진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지 어언 몇 개월이 지나고 결국 메마른 밤섬의 땅에 기적이 일어난다. 드디어 옥수수가 열린 것. 그렇게 손수 만든 자장면을 먹는 날, 김 씨의 두 볼엔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그래 나도 꽤 쓸모 있는 사람이었던 거야.’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안식처란 없는 법일까. 김 씨는 환경정화를 위해 들이닥친 이들에 의해 밤섬에서 쫓겨난다. 그렇게 빈손으로 떠났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도시, 그는 잠시 유보되었었던 현실세계로 돌아가야 한다.


그에게 닥친 위기를 지켜보던 그녀, 일생일대의 결심을 한다. 그를 만나야 한다. 이대로 그와의 끈을 놓아 버리면 영영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 그녀는 자신을 가두었던 세상 밖으로 뛰쳐 나간다. 환한 햇살도 사람들의 시선도 두렵지 않다. 상처 입은 그가 또다시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자신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아마도 그녀는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고, 당신이 내 삶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 넣어 주었다’고 그에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외톨이들,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딛다

영화 <김씨 표류기>는 한정된 공간, 두 명의 주연배우, 단선적인 플롯이라는 소박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단조롭거나 지루하지 않다. 도심 속 실제 무인도에 고립된 남자와 아파트숲 속 자신만의 무인도에 갇혀 있던 여자와의 만남이라는 소재는 신선하고, 일상을 꼼꼼하게 묘사하는 솜씨도 성실하다. 물 흐르듯 잔잔하게 이어지는 영화의 리듬감을 살려 주는 코믹한 대사와 세태 풍자는 정겹다. 캐릭터 묘사와 에피소드에서 재치 있는 아이디어가 번뜩이지만 산만하지 않고 짜임새 있다.


물론 인물들의 사연이 축소되고 현실을 단순화시키면서 깊이가 결여된 점과 뒷심이 딸리는 듯한 엔딩은 아쉬움으로 다가 온다. 하지만, 곁가지를 과감히 쳐내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투박함은 듬직하면서 여유롭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진솔한 유머와 위로는 따뜻하다. 외롭고 지친 인생을 격려하는 감독의 진심이 마음을 짠하게 한다. 삶의 풍랑 속에서 외롭게 표류하던 두 ‘김 씨’가 서로의 존재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지만, 소통을 시작하고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딛기까지는 적극적인 의지와 실천이 필요했다. 그는 주체적으로 경작하는 인생의 맛을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해 희망의 의미를 깨달은 그녀는 자신을 억누르던 타인의 시선에서 탈출해 그녀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할 용기를 얻게 된다.


비록 현실은 여전히 시궁창일지라도, 오래도록 지켜보며 손을 잡아주고 싶은 한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조금 덜 외로울 것이다. 그런 사람을 찾고 싶다면 지금 당장 눈을 크게 뜨고 창밖을 내다볼 일이다. 용기를 내어 움직이지 않는다면 인생이라는 거대한 풍랑 속에서 계속 표류하게 될지도 모르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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