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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0. 열면서- <신성가족>에서 <나의 친구, 그의 아내>까지의 거리

신동일 감독의 두 번째 장편연출작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처음 본 것은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였다. 당시 약간의 감흥과 다소 강한 충격 그리고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던 기억이 난다. 물론 감독 입장에서 거북스러우리만치 혹평에 가까운 평가를 써댔었다. 잦은 클로즈업의 효용성을 지적했고 그 원인으로 감독의 연출력을 문제 삼았다. 적어도 그때의 느낌은 분명 그러했다. <방문자> 개봉 이후 그의 영화에서 내가 놓친 것이 있음을 알았다. 다시 보고 싶어졌다. 금년 2월 명보극장에서 열린 모니터시사회를 포함해 6번을 보았으니 결코 적게 본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이 완전히 휘발되자 이제는 전혀 다른 관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2001년 칸 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에 출품되었던 <신성가족>을 본적 있는 사람이라면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상정되는 지점을 쉽사리 알아챘을 것이다. 그러니까 비 내리는 헤어 숍 창가에 선 여주인공과 옛 남자가 둘 사이에서 만들어졌을 법한, 그러나 세상에 없는 딸아이의 기일을 배경삼아 진행되는 11분짜리 단편영화에 함축시킨 사연의 근원을 찾아가는 영화가 <나의 친구, 그의 아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굳이 장편을 통해 신동일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칼 마르크스 Karl Marx의 논문 제목을 인용한 <신성가족>과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관류하는 논리적 배경은 무엇이고, 우정의 이름으로 포장되어 대극적 캐릭터 사이를 유영하는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제부터 나는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우정과 욕망과 사랑과 배신이 뒤엉킨 혼돈 속을 헤집고 다니며 개입하는 ‘권력’을 집중 조망할 것이다. 부디 나의 견해가 영화를 만든 신동일의 생각과 정면으로 배치되지 않길 바랄 따름이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은, 영화가 말하는 권력이란, 선명하게 구분지어진 ‘계급투쟁의 대상’으로서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 무엇이 권력인가?

일찍이 푸코 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 에서 시선의 관점에서 본 권력의 속성을 얘기했다. 권력은 곧 사람 사이의 관계이다. 이때 푸코가 말하는 권력이란 지배-피지배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제도적인 동시에 사적 개인들 간의 인간관계이기도 하다. 우리 일상의 사소한 모든 관계는 그래서 권력을 동반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권력이 미치는 힘이 균형적이지 않고 비대칭을 이룬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를 영화에 대입시켜 보면, 경제를 포함한 일상의 모든 영향력 즉 권력은 예준과 재문의 우정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음이 발견 된다. 권력은 ‘아는 것’ 즉 지식에서 비롯되고 ‘시각’으로 지속되며 ‘진실’을 자양분삼아 키워지기 마련이다. 결국 <나의 친구, 그의 아내>에서 보여 지는 권력은 ‘앎의 권력’이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자본’과 ‘진실’이라는 것이다.


1-1. 자본은 권력이다
“힘이 있어요. 예준 씨는”

지긋지긋했을 것이고 한심했을 것이다. 미국에 가서 잘 살아보려고 했던 희망이 한 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도 따지고 보면 순진하고 용의주도하지 못한 남편의 무능력 때문이었다. 그러니 힘들 때마다 백기사처럼 나타난 남편의 친구가 어찌 고맙고 든든하지 않겠는가. 서로의 속내를 처음으로 확인하던 밤, 지숙은 말한다. “참 명확하군요. 힘이 있어요. 예준 씨는”

남자의 힘. 성공한 지성이 보여주는 안정감처럼 여자를 안심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그렇다면 그 힘, 권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예준의 권력은, 적어도 영화 속 관계망을 작동시키는 힘은 그가 이룬 경제적 기반에서 발로한다. 하지만 그 부가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권력화 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므로 달리 말하자면 권력은 재문과 지숙이 부여한 권력이고 상호작용 속에서 키워진 권력이다.

동기와 선배를 제치고 항상 수익률 톱을 달리는 외환딜러에 한 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운 주거 공간이 예준의 현재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까다로운 성격 탓에 결혼은 뒷전일 정도로 일에만 매달려 사는 인물이다. 문제는 조직에서 따돌림 당하고 변절한 운동권으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인 그에게 있어 유일한 친구가 재문이란 것이다. 자신을 인정해주고 자신이 영향을 미치는 대상이 유일할 때 그 대상의 이탈을 방지하는 행위로 경제적 호의만큼 확실한 게 또 있을까? “적어도 지숙씨 정도는 돼야지, 아니면 평생 연애만 하고 살 거”라던 예준은 어쩌면 애초에 물심양면의 지원을 통해 그들의 생활에 깊숙이 관여하려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재문 부부에게 둘 도 없는 친구요 삶의 조력자 역할을 자처한 예준의 호의는 부부의 자생력을 소멸시켜버린다. 때문인지 예준을 거치지 않고 부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어 보인다. (심지어 섹스마저도 예준의 호출에 가볍게 깨지는 현실을 보라)

여기서 주목할 것은 포장마차 신인데, 그러니까 이 장면은 둘의 관계가 우정이 아닌 자본권력에 의해 작동됨을 알려줌과 동시에 재문을 바라보는 예준의 속내가 담긴 장면이기에 흥미롭다. 아내 지숙과의 섹스 도중 예준의 호출을 받고 뛰쳐나간 재문은 예준의 술값을 지불하게 된다. 이때 “4만 2천원”이라는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둘의 관계에서 재문이 돈을 낸 것은 처음일 게 빤할 테니 경제적인 것에 관한한 전적으로 의존해온 재문으로서는 당황하는 게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한 구석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적지 않은 분량의 장면 어디에도 술값 계산에 관한 둘의 대화는 없다. 나는 이 시퀀스가 영화 전체를 통해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베푼 게 얼마인데, 굳이 고마움을 표시할 필요가 있나?’라는 조건 없이 베풀기만 하던 자의 무의식이 드러나는 장면이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영화의 후반부 다시 한 번 보여 지는 예준의 속마음. 이처럼 신동일의 연출은 어떤 장면이라도 전체의 맥락을 관통하거나 횡단하는 방식으로 개연성을 확보하고 있다. 말하자면 큰 의미 없어 보이는 신 하나에도 철두철미한 계산이 담겨있다는 말인데, 그의 영화가 뒤로 갈 수 록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1-2. 아는 것은 권력이다
“그런데 넌 아직 쿡(cook) 이지”

쉽게 얘기하자. 아는 것 혹은 정보는 힘이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이 된다. 영화에서 예준은 재문 부부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예준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그 힘은 시각화 되어 재문과 지숙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게 된다. 이민에 대비한 영어교습을 위해, 사기당해 절망한 이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위해, 그리고 친구 아들을 보기위해 방문한 예준의 손바닥 위에 이들 부부가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영화는 철저하게 예준의 시점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는 권력의 주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까, 중반까지 드러나는 부부의 모든 일상이란 것이 실은 예준의 권력형성 과정에 대한 해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장면을 보자. 재문은 만삭인 아내와 섹스를 시도하던 중 예준의 전화를 받고 황급히 뛰쳐나간다. 감독은 둘의 우정이 얼마나 돈독한지를 알려주기 위해 이 장면을 넣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3자 시점을 택한 이 시퀀스의 관찰자는 관객인 동시에 예준이기도 한데, 이는 허망하게 깨진 섹스에 이어지는 포장마차에 앉은 두 남자를 비추는 카메라를 통해 예준의 권력이 부부의 침실까지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와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만약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재문이 그 상황에서 나갔을까? 자신이 전화를 걸면 어떤 경우에라도 나올 것임을 예준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힘의 불균형이 지속되는 한 그것은 우정이 아닌 권력관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권력은 고정적이지 않고 이동하며 순환한다. 예준에게 있던 권력이 부부에게로 넘어가는 것은 꽁꽁 숨겨놓았던 일상이 공개되고서부터이다. 상대가 그의 실상을 알기 시작하면서 권력은 의심받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단 한 번도 예준의 사생활을 보여주지 않던 영화가 돌연 그의 집안을 훑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특히 운동을 하는 그의 모습을 잡은 시퀀스는 감독의 의도가 드러난 중요한 대목인데, 거꾸로 매달린 채 TV를 통해 보는 영화가, 자본주의에 의해 무너져가는 핀란드 노동자의 삶을 그린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1999년 작 <유하 JUHA>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한편 재문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예준의 집에 지숙의 출입이 가능했던 것은 친구의 아내가 아닌 유사 가족으로의 위상변경이 이루어졌기 때문일 테지만 무엇보다 지숙이 그를 알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둘의 관계가 급속히 진전된 이후 지숙의 집과 재문의 가게에 방문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친구는 아내를 포기했고 그의 아내는 곧 내 여자가 될 터인 즉 권력이 미칠 대상과의 관계망이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아야 할 대상이 사라진 순간 자신도 상대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깨달았어야 했다. 바로! 예준이 실수를 범한 지점이다. 게다가 도덕성을 상실한 권력은 지속될 수 없는 법. 권력의 틈바구니에서 춤추던 예준이 한 순간에 몰락할 수밖에 없는 것도 도덕성에 흠집이 났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춰두었던 ‘진실’이 드러나면서 시작된다. 이제 권력은 진실을 알게 된 자의 손으로 다시 넘어가기 직전이다. 권력이란 소유물이 아닌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3. 진실은 권력이다
“낮에 별이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니래”

그렇다면 권력은 무엇에 의존하여 힘을 얻게 되는가. 물론 수없이 많을 것이지만, 권력화의 과정에서 등장하는 것은 주류담론이다. 예컨대 ‘유신잔당 혹은 5공 세력은 부패와 수구의 상징이다’라든지 ‘요즘 세상에서 기침하고 살려면 성공해야 한다’든지 ‘386은 이 땅의 민주화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라든지. 등등 기타 등등, 이런 것들이다. 지난 세월 동안 무수한 사회 담론이 있어 왔지만 이 가운데 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약간의 정치적 지원이 뒷받침되면 이러한 담론들은 주류담론이 되었고 그것은 권력을 만들어내곤 했다. 다름 아닌 진실의 힘이다. 즉 주류담론은 진실이 되었고 사람들은 진실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진실이 권력이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로 돌아가면, 예준과 재문은 군대에서 처음 만난 이후 둘도 없는 친구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들의 관계는 사회로 나온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영화의 시작인 결혼선물로 신혼 여행권을 주고 퇴근 후 친구 부부의 미국 이민을 돕기 위해 영어지도까지 하는 모습에 이르면 이 둘의 관계가 단순한 우정을 넘어서고 있음이 발견된다. 이들 사이의 권력으로 작용하는 ‘진실’은 무엇인가. “책을 다 읽고 나니까 네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더라”는 재문의 말처럼 군대에서부터 이미 그들의 관계는 (인간은 평등하다던 예준의 주장과는 달리) 정신적 주종의 위치에 놓여 있었다. 한 때 운동권이었던 예준이 지금은 잘나가는 외환딜러로 변신했다는 급반전된 환경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는데, 재문은 군 시절에는 정신적 스승이었고 사회에 나와서는 조건 없이 경제적 도움을 주는 그의 행동을 ‘평등’과 ‘진실’의 이름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다만 재문과 지숙이 바라보는 ‘진실’은 다르다. 이를테면 재문이 지적소양과 시대의식으로 드러난 예준과의 우정을 모습을 진실이라고 생각한 반면, 지숙은 경제적 도우미로써 성공한 남자의 힘 있는 모습을 진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란 당대 권력과 지식이 야합해 만들어낸 일시적 사고체계이다」라던 푸코의 말처럼 영원한 진실은 없는 법. 이제 그 진실의 봉인이 풀리는 순간, 진실을 매개로 권력을 얻고 앎을 유지했던 자는 추락하기 시작한다. 재문과 지숙이 예준에 대해 알게 된 까닭이다.



2. 우정과 일상의 권력 사이 어딘가에
“빈말이라도 미안하단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세상에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혹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로 사회를 구분 지었던 마르크스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는 권력들이 있다. 다름 아닌 일상의 권력이다. 이를테면 동일계급 내에서의 불평등이라든지, 인권운동가가 자행하는 비인권적 사례라든지 유색인종 간 벌어지는 냉대와 멸시의 사례는 지배와 억압의 개념으로 설명하기 힘든 지배양식들이다. 나는 글의 서두에서 이 영화가 선명하게 구분지어진 계급투쟁의 대상으로서의 권력이 아닌 일상의 권력을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예준의 권력이 쉽사리 무너진 까닭은 무엇일까? 지숙에 대한 욕망에 눈이 멀어서인가? 아니면 욕망 앞에서 이성적 판단이 흐려졌기 때문인가. 그것은 그의 권력행사가 시대흐름에 역행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권력은 억압과 폭력을 일삼는 물리적 힘에 의존하는 한마디로 무식한 권력이었다. 하지만 현대의 권력은 무지하지도 않거니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생산해낸 담론에 힘입어 권력의 정당성을 설득함으로써 적극적 지지자를 양산해낸다. 그러니까 내치고, 제외시키고, 금지하고, 주변부로 몰아내고, 억압하는 과거의 권력이 근대 이후를 기점으로 생산해내고 관찰하며 아는 권력, 스스로의 효과로부터 힘을 증식시키는 권력으로 변했다는 말이다. 이렇듯 네거티브에서 포지티브로 형질변경이 이루어진 근대 권력체계와는 정반대로 영화에서 예준의 권력 형태의 변화를 보면 포지티브에서 네거티브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재문 부부에게 베푸는 다양한 호의로 인해 그들 스스로 마음과 일상을 내보일 때만 해도 예준의 권력은 큰 문제가 없어보였다. 하지만 불의의 사건 이후 그는 과거 권력의 형태로 역행하게 된다. 따라서 전근대적 권력의 양상을 띠며 퇴행하던 예준이 순식간에 몰락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던지는 다른 질문. 그렇다면 재문과 지숙은 권력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권력의 일상성’은 말 그대로 일상에 스며들어 부지불식간에 빚어지고 영향을 미치는 권력의 속성을 의미한다.(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에서 밝힌 ‘악의 일상성’ 과도 일맥상통한다) 둘 역시 어느 시점을 통과하면서 권력을 쥐게 되는데, 말하자면 가해자의 죄책감을 담보로 잡은 권력이 그것이다. “너는 아직 셰프가 아닌 쿡”이라고 두 번 씩이나 위상을 정정해주는 예준의 말에 멋 적은 미소로 화답하던 재문이었다. 예준의 행동과 삶이 대단해 보였기에 무엇보다 존경해마지 않던 친구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출소하던 날 그는 “내가 뭐 죄 지었냐?”라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더니 회사로 찾아가서는 “이런 거였어? 빈말이라도 미안하단 말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개새끼야!”라며 이전에는 상상 못할 말을 내뱉는다.

한편 절친한 우정에 걸맞지 않게 재문과 예준이 단 둘이 있는 장면은 의외로 적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재문이 자의로 예준을 만난 것은 단 한 번 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포장마차에는 예준의 호출을 받아 나갔고, (공교롭게도)지숙이 파리로 떠난 후 집으로 찾아왔으며, 재문의 출소일에 예준이 마중 나왔지만 정작 재문이 먼저 움직이는 것은 지숙의 행방을 찾기 위해 회사로 찾아가 다툼을 벌이는 한 장면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권력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자는 먼저 청하는 쪽이 아니라 초대 받는 쪽이며 찾아 가는 쪽이 아니라 앉아서 맞는 쪽임을 방증한다. 그러므로 예준의 허락 없이 재문이 찾아왔다는 것은 이미 둘의 권력관계에 이상 징후가 보임을 말해주는 것인 동시에 동등한 위치로 재편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그 징후의 시발은 예준이 저지른 사고(법적 책임+윤리적 과실+인간적 배신)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재문 뿐 아니라 지숙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다만 삼자 격인 지숙의 경우는 위치의 뒤바꿈이 더 잦을 따름이다. 미국에서 돌아온 그녀가 예준에게 헤어 숍 개업 사실을 알려준 이후, 예준이 개업식에 참석하고, 다시 지숙이 그를 찾아 투자 상담을 하며 그 다음은 예준이 미용실 밖에서 기다리는 식이다. 바야흐로 일상적 권력은 충돌직전에 이르렀다.





3. 자기중심적 집단성의 아이러니
“이것들이 다, 누구 덕에 살고 있는데!”

좀 위험한 발언이지만 한국 사람처럼 자기중심적이고 집단성이 강한 이들도 드물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과 현상에 대하여 마치 자기 손으로 모든 것을 일군 양 거들먹거리기 일쑤라는 말인데, 예컨대 이 땅에 민주 정부가 세워졌을 때 소위 민주세력들은 저마다 자기들만이 민주화를 부르짖었고 그로 인해 핍박 받은 양 우쭐거리며 전리품의 당연 소유를 주장했다. 이후 권력의 언저리를 배회하던 60년대 생들 또한 민주화운동 경력을 앞세워 한 몫 잡겠다는 심산을 부렸으니 모두가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발로한 것들이다. 또 순전히 개인적 행위에 불과함에도 이를 집단의 이름으로 둔갑시켜 명분을 얻으려는 일이 비일비재할뿐더러 그것에 눈감아 주는 사례도 허다하다. 소소한 개인의 문제를 거대한 사회담론으로 키워가는 능력에 있어 우리 국민만큼 탁월한 재능을 보이는 민족은 드물다는 것이다. 엄연한 개인의 범죄행위를 마치 커다란 음모의 희생양인 양 본질을 호도하는 것도 이러한 특성에 기인하고, 의외로 쉽사리 이에 동조하는 국민정서 또한 동일 선상에 있음을 대변하고 있다. 예컨대 민주당에서마저 뜨거운 감자가 되어버린 김민석의 (야당탄압, 공작정치) 발언은 실로 놀랍기 짝이 없다. 1985년 미국문화원을 점거하고 태극기를 흔들던 그 때의 결기는 어디로 가고, 뼛속까지 물든 노회한 정치인의 모습으로 둔갑해버렸는지 씁쓸할 따름이다. 촛불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게 이명박 정부만이 아님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비아냥 대는 것인가? 그렇다. 나는 지금 신동일의 영화를 보면서 그 속에 등장하는 예준과 재문을 보면서 이 시대를 관류해온 집단중심주의의 허구성을 비꼬는 것이다.

영화의 후반, 아침을 먹던 예준은 숟가락을 집어던지며 말한다. “이것들이 다 누구 덕에 살고 있는데!” 혹자는 이 대사를 놓고 386을 비롯한 민주화세력의 시대착오적 사고를 극명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으나 내 견해는 다르다. 영화 초반 보여 지는 예준의 모습은 학생운동권의 순수한 동지애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 수 록 욕망과 권력에의 집착을 보임으로써 오히려 독재정권 즉, 과거 자신들이 타도대상으로 삼았던 집단과 닮아가고 있음이 발견된다. 이것이 비단 영화 속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음은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집단의 이름으로 자행돼 온 이중적 행동양식과 계급 속의 계급이 빚어낸 아이러니를 보여주고자 한 감독의 연출이 만들어낸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같은 맥락으로 <나의 친구, 그의 아내>를 386의 자기반성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독의 중의적 시선을 제쳐놓은 채 운동권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만 함몰되는 것은 담론의 가능성을 조기 봉쇄한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영화 속 이야기는 사실 사회 모든 분야, 집단을 막론하고 벌어지는 공통적 현상일 뿐 아니라 영화마저도 예준이 타락한 운동권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닌 권력과 욕망에 포획된 한 인간일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가족 로망스’ 와 여성
“우리 셋이 같이 살까?”

영화의 오프닝으로 돌아가자. 그러니까 신혼여행 첫날밤 예준과의 통화 도중 태연하게 내뱉던 말. “지금? 그래 와. 같이 자면 되지 뭐” 그러나 이 말은 아내와 자식을 희생시킨 남자들의 연대를 향한 여성의 되물음으로 돌려지게 될 것이다.

단언컨대 한국사회에서 가족만큼 문제적이고도 신성한 집단은 없다. 모든 희생을 감수하게 만드는 명령어인 동시에 개인적 쾌락의 절제를 요구할 수 있는 준엄한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그러므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고, 가족의 이름으로 명명되어지는 행위는 어떤 가치관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한다. 그러나 가족도 못 말리는 것이 우정이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때론 가족보다 친구가 가깝고 허물없기 마련인데, 빚보증을 잘 못 서서 가산을 탕진해도 친구를 위해서라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핏줄보다 진한 우정일 터이다. 재문은 예준에게 “우리 부부가 너 좋아는 거 알지? 지숙이나 나나 널 친구 이상으로”생각한다고 말한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가장 먼저 전화를 거는 대상도 예준이고, 재문이 사기당해 미국에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내가 마련해볼게, 그 정도는 가능할거”라며 부부를 절망에서 구원해주는 것도 예준이다. 그러니 상투적이긴 해도 “내가 더 좋아? 예준씨가 더 좋아?”라고 묻는 것도 무리가 아닐 터이다. 그런데 이 우정이라는 것이 마냥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일까? 이를테면 우정을 작동시키는 것 중에는 베푸는 자의 은혜와 수혜자의 고마움이 뒤엉켜 묘한 권력체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문제는 남자들의 우정 속에서 신음하는 것이 철저하게 제 삼자로 밀려난 여성이고 아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때 두 남자 사이에 서있는 지숙은 둘을 연결하는 고리인 동시에 권력에의 욕망을 추동하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영화 속 인물 중에서 내가 눈여겨 본 것은 재문도 예준도 아닌 지숙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떻게 기능하는가.

역사학자인 린 헌트 Lynn Hunt 는 이러한 심리학적 개념을 신문화사적으로 응용하여 자신의 저서 『프랑스혁명의 가족 로망스』를 통해 “혁명기 정치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가족적 질서에 대한 집단적이고 무의식적인 상”을 지칭하는 의미로 전환시키게 된다. 그녀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가부장제로부터의 탈출에서 발로된 상상력이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결과는 안정된 공화국이 아닌 공포정치를 낳기에 이르고, 결국 또다시 새로운 아버지를 찾아내어 잃어버린 가족로망스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아비를 폐한 자들 손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혁명의 정통성은 손상된다. 우리가 프랑스 혁명과 가족로망스를 거론할 때 간과해서 안 될 것은, 이 위대한 시민혁명이 철저하게 남성들 주도하에 이루어졌으며 이들 남성연대는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상징되는 여성들을 희생제의 도구로 전락시키거나 권력의 중심에서 더욱 멀어지도록 강제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근대 시민사회의 결정적 특징을 “남성으로서의 인간(men), 형제로서의 인간에 여성이 복종하게 된 것” 으로 보았던 캐롤 페이트먼 Carole Pateman 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에서 아버지를 죽인 자들이 아버지 없는 콩가루 집안을 형제애를 통해 통합하고자 했다면, 가정 내에서의 자기 역할보다는 사회적 출세를 우선시 했던 한국의 아저씨들과 그들로부터 버림받았던 아줌마들은 밖에서의 연애를 통해 ‘가족 로망스’를 충족시키고자 했다. 혁명 후 형제애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계약을 통해 공화국을 건설함으로써 여성을 정치와 사회에서 배제시켰던 것이 프랑스식 ‘가족 로망스’라면, 이에 비해 1990년 후반의 한국인들은 이른바 하나의 ‘연애 공화국’을 추구했기 때문에 한국의 ‘가족 로망스’는 페미니즘을 신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IMF 위기와 함께 이러한 ‘연애 공화국’도 파산을 맞이하게 된다. 요컨대 프랑스의 ‘가족 로망스’는 혁명을 통해 공화국을 건설했지만 혁명의 좌절을 통해서 역사의 나침반을 상실했고,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대체적 아버지와 가족을 동경했던 한국의 ‘가족 로망스’는 사회를 병들게 하고 말았다.」 (註)

제 아무리 대단한 우정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가족의 영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너무나 가까워서 오히려 불편한 관계들. 일일이 예를 들 필요도 없을 듯하다. 더욱이 재문의 경우처럼 정신적 물질적으로 예속된 채 오랫동안 지속된 관계라면 가족은 이미 삶의 긴장감을 요구하는 대상에서 멀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신동일은 권력의 탈을 뒤집어쓰고 태연하게 존속되는 남성들의 굴절된 우정의 대항마로 여성인 지숙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아내의 반란을 통한 권력의 전복이요 느와르 풍의 여성복수극인 동시에 신성가족의 회복을 꿈꾸는 자를 위한 헌사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영화 시작 남편이 내뱉은 말을 마무리 짓는 아내의 마지막 대사. “우리 셋이 같이 살까?”

특별히 언급할 것은, 한국사회의 가족로망스가 그려낸 지옥도에 몸을 담근 채,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남자들에도 아랑곳 않고 시종 담담한 표정으로 지숙을 연기한 홍소희의 발견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찾아낸 최고의 수확이라 하겠다.


5. 평범해서 놓치기 쉬운 몇 가지 것들

이제 우리는 감독의 전작 <방문자>의 마지막 장면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깐깐한 대학 강사 호준이 군사독재시대로 상징화된 푯말을 뽑고 자기 신발을 땅에 묻을 때 들려오던 망치소리를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다. 전작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인 계상이 망치를 들어 호준을 구했다는 사실도 기억하자. <방문자>에서 망치는 닫힌 문을 열고 호준을 살렸으며 박제된 이데올로기를 매장시키는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말이다. 감독은 <나의 친구, 그의 아내>의 마지막, 가위소리를 들려준다. 이는 신동일의 영화가 스토리에만 치중하고 있지 않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인물들 간 대사와 심리묘사를 통해 내러티브에 치중한 듯 보이지만 치밀한 연출력에서 비롯된 미장센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몇 개의 장면을 기억해보자. 먼저 지숙과 두 사내가 헤어 숍 계단에서 담배피우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이 신은 구도와 색감에 있어 전혀 다른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자아내는 데, 이는 숨 쉴 틈조차 없이 달려온 이야기를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한 템포 쉬어가게 만드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또 포말처럼 맺혔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빗방울 가득한 창가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주인공을 잡은 앙각 숏은 아름답고 처연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특별히 반복적인 장면들이 여럿 등장하고, 게다가 그것들이 모두 세 번 반복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예컨대 천장 모서리를 보여주는 장면의 경우 지숙이 재문을 찾아왔을 때의 치킨 집 천장과 지숙이 바에서 만난 남자와 묵은 객실 천장과 그리고 불타는 헤어숍의 천장이 그것인데, 이를 두고 본지 스태프 이영은 「세 번의 천정은 경제적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은 ‘높아 봤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 주장한 바 있으니, 적절한 지적이라 하겠다. 또한 인물들의 관계가 자본에 의해 일그러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통장’ 역시 세 번 등장하고 있는데, 예준이 지숙에게 건넸고, 지숙이 재문에게 확인받았으며 예준이 바닷가에서 재문에게 넘겨주려했던 통장이 그것들이다. 끝으로 부부의 소망을 상징화한 ‘비행기’ 역시 세 차례 등장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비행기의 크기가 줄어든다는 점인데, 이는 현실과 꿈 사이의 거리를 상징화한 설정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첫 번째는 식당 창가에 선 재문이 큰 형체의 비행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한 꿈을 대변하는 반면, 지숙이 파리로 떠났을 때 장바구니를 든 재문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작은 비행기는 현실에서 멀어져버린 꿈을 보여주고 있으며, 지숙이 언덕길을 오를 때 들리는 (형체조차 사라진)비행기 소리는 부부의 꿈은 물론 가족 관계마저 위태롭게 됨을 암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나는 특정 시점마다 경사진 장소에 놓인 인물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위치에 주목한다. 흥미롭게도 감독은 상황 변화에 따라 경사진 곳을 배경으로 인물을 배치하면서도 카메라의 실제 위치는 평각을 유지하도록 만듦으로써 일관된 세계관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 영어수업을 마친 세 사람이 걸어 내려올 때, 아이를 안은 재문이 장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올라갈 때, 예준이 허겁지겁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 지숙이 언덕을 걸어갈 때, 상황이 종료된 후 지숙이 맨발로 걸어갈 때에 프레임에 담기는 것은 인물만이 아니라 그 위에 펼쳐진 지상의 공간들도 어김없이 포함되어 있는 데, 이처럼 인물은 경사진 곳을 내려가거나 올라가고 있지만 정작 카메라의 프레임은 하나 같이 수평각으로 잡힌 풍경의 일부로 인물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무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결국 사람 사는 세상 특별할 게 없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려는 것 아닐까? 마치 이것이 삶이고 당신도 일상의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장점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부분에서 아쉬운 점이 노출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은 개봉에 맞춰 잘라냈다고는 하지만 러닝타임은 여전히 길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이는 전반적으로 정적인 장면이 많은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특정 상황에 이르기 위한 인물들의 계속된 이동이 병행되었던 <방문자>와는 달리,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시퀀스와 시퀀스사이의 이동과정이 생략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지숙이 “나 갑자기 통닭 먹고 싶어”라고 하자 이내 닭을 먹는 장면으로 바뀌고 “밥이나 먹자”고 하면 식당에 앉은 두 사람이 보이며, “바람이나 좀 쐴까?”라고 하자 바닷가 장면으로 이동한다. 동선을 생략하고자 한 감독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나, 인물의 심리묘사에 많은 분량이 할애된 것과 비교한다면 지나치게 정적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곧 지루함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시간 안배에 좀 더 치밀한 고민이 있기를 당부하고 싶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우연한 사고로 벌어진 진실과 운명의 실타래가 세 남녀의 삶을 걷잡을 수 없도록 흔들어 놓는 동안, 친밀한 관계망이 어떻게 무너지고 다시 회복되는가를 인물들의 내면변화에 초점을 맞춰 그려낸 영화이다. 그 속에는 한 시대를 호령했던 사회문화 담론과 권력이데올로기가 부상했다 침잠하기를 반복한다. 영화는 권력관계에 대한 세밀하고 빛나는 성찰이 깃들어 있는 동시에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권력을 쥔 자들의 허위와 이중성, 즉 권력의 일상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6. 닫으면서

지난 몇 년 간 한국영화계가 천착해온 소재주의를 탈피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는 점만으로도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그 의미를 지닌다. 그간 상업영화들은 ‘세대론’에 대하여 애써 무심한 태도를 보인 것이 사실이다. 독립영화 역시 계급과 계층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다뤄왔으되 본격적으로 세대론을 들고 나온 예는 흔치 않다. 이를테면 가부장, 구세대, 보수 등으로 상징화된 ‘아버지 담론’에 치중하느라 대항적 의미를 지닌 세대가 안고 있는 현실적 한계를 짚어내는 데 실패했다면, 신동일의 장편 연작은 중심인물의 세대론적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함으로써 뼈아픈 자기반성과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가 2006년, 그러니까 참여정부와 386으로 상징되는 운동권에 대한 대중의 피로감이 극에 달한 시점에 제작되었다는 점은, 자신 역시 386 후반세대인 감독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나의 친구, 그의 아내>는 전작 <방문자>와는 사뭇 다른 형식을 취하는 작품이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만한 지점이 도처에 매복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신동일의 고집스러운 시선이 흔들림 없이 두 영화에 깃들어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속살거림과는 거리가 먼 주인공들을 통해서 진짜배기 삶을 이야기하고,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문제들을 날카롭게 짚어내는 것이 그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신동일의 영화 속에는 인간에 대한 무한애정이 깃들어있다는 점에서 벗 삼아 지켜볼 가치를 지닌다.

모름지기 분출하는 힘을 붙잡아서 진정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위대한 작품은 이성이 분별없는 환상을 누르고, 형식이 소재를 누르며, 천국이 지옥을 누른다. 권력관계에 대한 세밀하고 빛나는 성찰을 촘촘하게 엮어낸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註: 졸고 「[가족의 탄생] 한국영화가 가족주의를 그려내는 방식에 대하여」 재인용 (네오이마주 2006.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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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운㈉영어 <좋은 글 감사합니다.<<영어가 100배 더 쉬워진다<<엉터리 문법 추방하여 영어 지옥 벗어나자!

    2010.10.05 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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