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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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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면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님은 먼곳에>를 본지 두 주나 지났음에도 명확하게 정리된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순이가 월남으로 간 이유는 무엇이며 그녀를 둘러싼 남성들은 무엇을 기능코자 함이었을까? 이준익은 무엇을 말하려고 순이를 사내들의 소굴로 집어넣었을까? 라는 의문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런 가운데 접한 많은 평들은 여성캐릭터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대게는 순이라는 캐릭터를 도구화된 여성으로 바라봄으로써 생각의 단초를 잡아내고 있었다. 재미있게도 여성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비판한 거의 모든 글에는 영화의 엔딩 신에 대한 내용이 빠지지 않았는데 이는 순이를 특정 목적으로 형상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연역적 도출방법 때문으로 보여 진다. 거칠게 말하자면 꿰어 맞추기에 가까운 논리전개라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가 여성을 값싸게 소비시키는 면도 없지 않다. 이를테면 매달 면회를 가고도 푸대접 받은 며느리에게 여필종부를 강조하며 “첩과 정실이 같나?”라던 시어머니, 아내가 있으면서도 서울의 애인을 잊지 못하다가 월남으로 줄행랑친 남편, 돈벌이를 위해 순수한 의도를 악용하는 정만에 이르기까지 하나 같이 가부장적 사고로 똘똘 뭉친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순이의 삶은 무한소비의 대상으로 격하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공연이 거듭될수록 과감한 의상에 도발적인 몸짓으로 무장하고 무대를 누비는 써니를 보고 있노라면 전장에 홀로 선 여성을 위협하는 시선의 폭력의 섬뜩함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순이의 월남 행이 “남편 사랑은 첩에게 넘겨주고 너는 아들 낳아 내 사랑 받을 생각이나 하라”는 시어머니의 뜻을 받드는 것이고, “니 내 사랑하나?”라던 상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함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순이는 주체적인가

어쨌거나 <님은 먼곳에>와 관련해 글을 쓰고 싶어진 것은 아주 사소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름 아닌 ‘나는 영화에서 순이를 보았는가, 아니면 수애를 보았는가?’ 이다. 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이 질문은 유치하기도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대단히 중요하다. 많은 이들이 거론하는 ‘여성캐릭터의 도구화 또는 희생’의 알고리즘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결론지어 말하자면 <님은 먼곳에>는 여성의 육체를 전시함으로써 남성을 구원하거나 그들의 가부장제에 함몰시켜 종국에 여성의 소멸을 일궈내는 영화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순이를 객체화되고 대상화 되어 의미 없이 소비된 여성캐릭터로 판단했다면, 단지 이런 이유만으로 <님은 먼 곳에>를 마초의 영화라고 단정 지었다면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따라서 여성 또는 여성캐릭터라는 젠더이데올로기를 꺼낸 만큼 이에 상응하는 논리를 펼쳐볼 요량이다. 먼저 혹자들의 주장대로 순이를 대상화된 여성캐릭터로 규정하기 이전에 몇 가지를 확인할 필요성을 느낀다. 예컨대 순이는 어떤 틀을 통과하여 영화에 등장하며, 그녀의 서사와 시간은 자주적이고도 독립적인가.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먼저 틀에 대한 이야기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일수록 여성의 존재는 희미하기 마련이고 설사 그들이 보인다 해도 그것은 부록에 다름 아닌 정도였다. 때문인지 페미니즘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영화에서 다수의 여성들이 서로를 호명하고 소환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반해 여성캐릭터를 소비하고 역사의 객체로 전락시킨 영화들에서 여성은 남성의 입을 빌려서야 수면 위로 부상하거나 남성캐릭터의 서브플롯을 끌어가는 수동적 위치에 머물고 말았음을 알 수 있다. 쉬운 예로 <박하사탕>에서 김영호의 첫사랑 순임은 김영호의 회고를 통해 즉 남성캐릭터의 기억과 입을 빌려야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데, 더 정확하게는 자살을 앞둔 김영호를 찾아온 그녀의 남편의 간청을 통해 김영호는 순임을 기억하게 되며 이 과정을 거쳐 영화에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캐릭터가 소비되고 대상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될 때 영화에서의 여성의 잔재는 쉽사리 소멸되기 일쑤이니 <박하사탕>에서 순임을 독립적인 캐릭터로 인식하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주목할 것은 여성의 시간이 남성의 시간에 편입되어 일종의 미장아빔(mise-en-abyme)을 이루곤 했다는 점이다. 즉 대게의 한국 멜로드라마는 여성의 시간을 남성의 시간 속에 격자구조로 구축함으로써 여성의 주체성을 봉쇄하고 폐쇄시키게 된다. 예컨대 <파이란>에서 여성인 파이란의 시간은 강재의 시간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이는 파이란을 통해 강재의 인생을 성찰하게 만듦과 동시에 남성주체의 완성을 위해 희생되는 기제로 사용하려는 목적에서이다. 어느 리뷰어의 글대로 <님은 먼곳에>의 순이가 상길과 만나지 못하고 죽었다면 아마도 그녀는 남성에 의해 호명되고 거룩한 희생양으로 승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라면 여성 스스로 주체가 되지 못하고 남성이라는 매개를 거침으로써 영화에 개입할 수 있다는 논리에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님은 먼 곳에>에서 순이는 어떠한가. 순이가 남성의 서사를 통해 호명되거나 그들을 매개로 공간 속으로 편입되고 있는가?


그녀의 서사 그녀의 시간

다음 질문은 그녀의 서사와 시간은 자주적인가? 아니면 봉쇄되고 있는가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동네 아낙을 앉혀놓고 노래를 부는 순이가 보이고 이내 시어머니의 곱지 않은 시선이 이어진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자면 영화의 주인공인 순이는 적어도 독립적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캐릭터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이 문제 삼는 여성의 대상화가 발생하는 지점은 어디일까. 아마도 1970년대 가부장제를 포괄하는 시어머니의 한숨과 한탄에 떠밀리듯 월남 행을 결심하면서부터일 것이다. 순이가 월남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위문공연단에 들어가는 것뿐인데 그녀는 남성밴드의 홍일점 가수 ‘써니’가 되어 갖은 수모와 조롱을 마다않고 배에 오르게 된다. 이로써 순이는 월남으로 향하고 그녀의 거침없는 행보는 순이를 써니로 탈바꿈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 과정에서 써니가 보여주는 모습들, 그러니까 장병의 애간장을 녹일 듯한 수줍은 미소와 춤으로 한껏 분위기를 달구면서 공연에 임하는 태도와 미군 관사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위태로운 마음이 드는 것이, 과연 순이가 무사히 월남을 떠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여기서 순이가 왜 월남으로 가야 했는가를 묻지는 말자. 상길의 질문에 대한 뒤늦은 대답을 위해서건, 시어머니의 성화 때문이었던 간에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순이가 월남에 간 것이 아니라 살아서 남편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남편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육체를 전시했고 남성들의 욕망에 불을 지폈으나 결국에는 남편을 만남으로써 고난의 여정에 방점을 찍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순이가 살아있음으로 해서 영화는 여성캐릭터의 소비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는 말인데,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각기 다른 공간에 펼쳐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준익은 순이의 공간과 상길의 공간을 철저하게 나누어놓고는 월남이라는 공통의 지리적 공간과 1970년대라는 시대적 특수성을 겹겹이 씌움으로써 순이의 여정에 명분을 심어놓았다는 말이다. 이는 순이와 상길의 시간 즉 여성과 남성의 시간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펼쳐지는데다가 시간의 사용목적을 서로 다르게 설정함으로써 상길의 하위서사에 순이가 편입되지 않도록 기능하고 있다. 결국 순이가 남성성과 싸우는 동안 상길 역시 적과 싸우면서 각자의 시간을 만들어갔으니 순이의 서사를 희생을 위한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은 과잉해석이라 하겠다.


이미지에의 과잉집착

일각에서는 남성을 구원하는 女神 이미지로서의 순이에 집착하면서 여성캐릭터의 과다소비를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남성의 구원을 위해 한 없이 희생하는 여성을 거론하고 이것을 빌미로 남성을 위한 영화라고 단정 짓기도 한다. 아마도 마지막 장면이 주는 이미지의 착시현상에 현혹된 때문일 터이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과잉일반화의 오류이다. 영화의 엔딩을 숭고한 이미지의 발현으로 보는 것까지 타박할 마음은 없지만, 이것을 놓고 여성을 소비하던 영화가 얼토당토않은 결말을 택했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순이의 이미지를 숭고한 대상으로 보려는 시도 자체가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초기 페미니즘 비평이 주력한 것이 바로 ‘이미지의 재현’ 과정이었다. 즉 영화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보여 지는가에 집중하여 ‘이미지 도상학’과 연계했다는 말이다. 이 시기의 비평가들은 여성캐릭터가 가부장제의 도전자로 규정되었다가 몰락하는 과정을 여성의 이미지와 연관 지어 탐색함으로써 비평적 자산으로 축적하게 된다. 반면 현재의 페미니즘비평은 여성과 남성의 성차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여성 이미지의 진위여부보다는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여성의 억압의 징후들인 텍스트의 모순들을 읽어내고 밝혀내는 것에 치중하게 되었다는 말인데, 이는 가부장적 구축물을 유지시키고 지지하는 영화 텍스트의 책략뿐만 아니라 그러한 구성물들의 약점과 실패까지도 이해하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변화가 필요했을까? 초기의 페미니즘비평은 어떤 고정불변의 정체성이 본질과 그것을 연결 짓고 있다는 사실을 회피함으로써. 즉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폐해를 드러내는 데만 치중함으로써 모든 잠재적인 여성적 정체성들을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페미니즘 분석은 차이의 부정과, 여성을 부재, 결핍, 혹은 파괴적 부정성으로 규정하고 위치시키는 담론적 전략들을 폭로하는 것이 그 주 임무라고 볼 때, 차이를 바라보기, 성차에 대한 낡은 이해를 교정하기, 차이들을 다중화 하기를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님은 먼곳에>를 여성의 육체를 전시함으로써 남성담론의 하위 텍스트로서의 여성캐릭터가 활보하는 영화라고 단정 짓는 것은 1970년대 페미니즘비평 양식을 21세기에 적용한 때문이며 시각의 어긋남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고 하겠다.


구원이 아닌 이미지를 통한 서사 봉합

덧붙여 <님은 먼 곳에>에서 구원 받은 것은 남성이 아니다. 설사 남성이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성(순이)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당신이 이제껏 본 영화에서 남성이 구원 받는 경우가 얼마나 있었던가. 「영화 속 구원 대상은 절대 남성은 될 수 없다」던 앙드레 바쟁 Andre Bazin의 말을 굳이 인용할 필요도 없이, 영화 속에서 보여 지는 모습이거나 또는 관객의 뇌리에 남아있는 이미지이거나 둘 중 어느 한쪽으로라도 여성이 구원에 가까이 서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예컨대 창녀이거나 귀부인이거나 여염집 아낙이거나 영화 속 구원과 회생의 대상은 항상 여성에 국한되어 진행되어왔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님을 먼 곳에>를 놓고 남성을 위한 남성 영화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어쩌면 김기덕의 영화 공식을 먼저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주지하다시피 김기덕 영화의 대부분은 여성을 통해 남성이 구원을 받는 독특한 행태를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객에 눈에 그렇게 비춰졌던 것이었지만) 김기덕이 영화 속 여자들을 창녀와 성녀의 이분법 구조로 그려냈거나 여성의 비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식의 비난을 퍼붓던 이들도 여성이 악인으로 그려질 수 없는 영화사적 논리까지 염두에 뒀을까마는, 그의 영화 속 여인들은 앙드레 바쟁의 주장에 한 치 어긋남 없이 구원되었다. 다만, 구원의 방법에 있어 영화의 서사나 묘사가 아닌 관객에게 남겨진 이미지와 연민 가득한 사고 또는 지독한 페미니즘에 근거해서라는 점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남성폭력과 비장미 가득 찬 김기덕식 내러티브 구조로 인해 여성은 한 없이 억압받고 비참한 모습이었으므로 그런 여성의 몰락을 기반삼아 남성이 구원 받은 것으로 보여 졌을 뿐이다. 때문에 나는 <님은 먼곳에>를 둘러싼 담론의 한켠에 과거 김기덕 영화 속 여성담론이 재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고, 그렇다면 애초에 논점을 잘못 짚은 것이라 말하고 싶다. 단언컨대 구원 받은 것은 상길도 순이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월남이라는 특수공간에서 고군분투하던 남녀의 서사와 각자의 시간이 이미지를 통해 봉합되는 지점이면서 가부장이데올로기에 일격을 가하는 순간의 포착으로 봐야한다. 빛바랜 사진 같은 이 장면이 숭고하게 느껴졌던 것은 두 남녀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둘 다 살아서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로 순이가 전설이 되지 않고 역사가 되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순이와 수애, 누구를 보았는가?

글의 서두에서 나는 내가 본 것이 수애인지 순이인지 모호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는 <님은 먼곳에>에서 순이가 변하는 과정 때문이라 할 것이다. 남편을 찾아 월남으로 간 순이가 써니로 이름을 바꾼 이후 위문공연에서 보여 지는 그녀의 변신. 이처럼 순이가 남편에게 가까워지는 만큼 그녀의 노출은 과감해지며 무대의 흥겨움도 배가되지만 정작 영화를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불편한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위태로운 그 무엇 말이다. 때문인지 이를 두고 여성캐릭터의 대상화라고 말하는 이도 있는 반면, 여성을 무한소비하며 고된 시간을 이겨낸 남성들이 뒤늦게 여성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아마도 여성캐릭터인 순이가 써니로 변신하고 사내들의 카니발의 여신처럼 등장해 해갈시켜주는 위문공연장면에서, 또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어떤 짓이라도 불사할 것처럼 보여 진 써니의 행위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을 찾기 위해 미군과 하룻밤을 보내야 했던 장면에서 보여준 순이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준익 재능이 아닐까 싶다. 즉, 수애라는 배우를 사용해 영화의 배경인 1970년대로 인도하는 한편 관람자의 정서 역시 그 시대로 치환시켜버리는 재주 말이다. 이를 테면 이준익 영화들의 배경이 하나 같이 과거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관객은 시대적 괴리를 느끼지 못하는데, 이는 시공간을 초월하도록 배우의 연기를 리얼하게 세공한 감독의 능력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성가부장제의 희생자로 그려지면서 뭇 사내들의 눈요깃감으로 전략해가는 1971년의 순이를 보고 안타까워하지 않을 관객이 있겠는가? 그래놓고는 영화의 마지막 포연 가득한 전장에 우뚝 세우다니! 영화 중 거의 유일하게 이준익의 배짱과 호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닫으면서

이글은 <님은 먼곳에>를 놓고 여성의 대상화 혹은 도구화를 논하는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분기탱천한 마음으로 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 영화를 지지하려는 의도 또한 전혀 없음이니, 엄밀히 말해 <님은 먼곳에>는 이준익의 영화 중 드물게 서사의 미학을 던져버린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준익의 이전 영화들에서 드러난 ‘마이너리티와 놀이’ 또는 ‘변두리 잡종문화 미학’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근접하려는 의도조차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서사가 묘사를 압도했으며 곰살맞은 인물들을 잡은 카메라는 기교보다는 기본에 충실하곤 했다. 그러나 <님은 먼곳에>는 적은 예산을 가지고도 맘껏 주무르면서 허허실실 이야기를 풀어갔던 이전 작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자유분방함으로 흥겨움을 주었던 것이 그의 영화였건만 절제되고 단정해지니 제 맛이 살아나질 않았다는 말이다. 이준익조차 70억 원의 제작비와 동남아 로케이션이라는 물량 부담 앞에서 제 특질을 놓쳤던 것일까? 내가 여성의 전시와 소비에 치중하며 이 영화를 본 평자들의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한 것은, 논점이 잘 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논리의 전개과정에서 오류를 범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의 말미에 이르러 당신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은 순이의 고군분투가 안쓰러웠던 것인가? 아니면 수애가 뭇 남성들에게 휘둘리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것인가? 그래도 살아서 남편을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영화야 어찌되었건 두 사람을 살려놓은 건 백번 잘한 일이다.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peter153  수정/삭제  댓글쓰기

    동감합니다. 영화는 영화차원으로 끝나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을 그린 이영화는 수작입니다. 이런 글을 메인에다가 띄워야하는데 답답합니다.

    2008.08.08 13:29
  2. Favicon of https://applerich.tistory.com BlogIcon 사과부자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 잘 읽었습니다.^^

    2008.08.09 02:16 신고
  3. eer  수정/삭제  댓글쓰기

    솔직히 보는내내 불편햇던 영화..
    이준익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건 처음이었지만..
    그런 캐릭터들의 배치와 구성은..미군과의 하룻밤 장면에서
    최초로 극장에서 뛰쳐나오게 만든 영화였습니다

    저에겐 불쾌한 기분이 드는 영화란 생각이 가시질 않네요..

    2008.08.09 11:41
  4. qwer  수정/삭제  댓글쓰기

    흠.. 저런 거 있으면 대개 '아 그런 경우인가 보다.'라고 그냥 넘겨버리기 마당인데.

    소재보단 소재로 표현하려는 내용에만 관심이 있다보니.

    그래서 제가 평론가가 아닌가 봅니다.


    그리고 평이 좋던 나쁘던. 어떻습니까.
    어차피 영화를 보는 눈은 제 눈인데.

    2008.08.09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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