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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


“나는 단지 남들이 원하는 것을 원했을 뿐이다”라는 글자들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되는 [상영중]을 보러 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Raya Martin그날 보고 싶었던 영화를 예매하지 못해서 남는 것들 중 골랐던 게 하필 러닝타임이 280분이나 되는 이 영화였다. 영화 상영 시작 전, 쉬는 시간에 대한 공지를 듣기 전까지 나는 이 영화가 이렇게 긴 영화일 줄은, 이렇게 강렬하게 남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상영중]을 보고 난 후, 필리핀 영화계의 신동이라고 알려진 84년 생 라야 마틴 감독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상영중]이 [다음 상영작]과 함께 ‘극장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는 흥분했다. 그래서 필연적이게도 나의 전주에서의 마지막 영화는 [다음 상영작]이 되었다.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어린 소녀 리타는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한다. 말 그대로, 그 또래 아이들이 혼자만의 시간에 엄마나 이모의 옷이나 화장품을 멋대로 써가며 해봤을 만한 그런 행위. 그런데, 그 아이가 마이크를 잡고 열창을 하는데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놀더니 그 아이가 침대에 눕는다. 이게 무슨 일일까. 그녀의 우울함이 전달해지는 것 같다.

어느 밤, 집 앞의 골목에서 리타가 동네 친구들과 신나게 뛰논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카메라와 고르지 않은 불빛 속에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음들. 리타는 발을 다쳤나보다. 친구들에게 나중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발을 절뚝거리며 집으로 들어온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자기 방 침대에 올라가 다리를 끌어안은 체 웅크리고 눕는 리타. 그녀의 우울함이 전달해져 온다.

[상영중]은 그런 영화다. 리타의 일상을 쉼 없이 길게 보여주고는 노래 소리를 지우고 알 수 없는 리타의 우울함에 젖어들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까지도 그녀의 슬픔의 정체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그 기분을 느끼게 될 뿐이다. 설명하지 않는 영화, 4시간이 넘는 이 영화를 본다고 해서 주인공 리타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되지 않는다. 그저 리타의 우울함을 같이 체험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이 영화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


리타의 곳곳에 우울함이 포진된 일상을 지켜보다가 얼마나 흘렀을까. 리타가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엄마와 함께 이모의 차를 타고 바닷가로 떠났다. 동이 트지 않은 바닷가에서 리타가 우는 것 같다. 워낙 흔들리는 카메라는 그녀의 얼굴을 또렷하게 응시하지 못하게 하고 파도소리는 그녀의 울음소리를 삼켜버렸다. 그리고 극장에 불이 켜졌다. 극장 로비에서 영화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나가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안나와의 나흘 밤]을 볼 것인가, 아니면 이 영화를 끝까지 볼 것인가. 이미 내 앞에 앉아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 영화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 ‘설마 이런 식으로 끝까지 가진 않겠지’라는 생각. 둘째, 리타의 일상을 보여주다가 리타가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장면에 삽입된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장면,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화 속에서 모두 지워 버린 노래 소리 때문이다. 이 영화의 앞부분에는 리타가 노래하는 장면, 리타의 사촌들이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장면 등이 나오는데 관객은 그들의 노래를 들을 수 없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

쉬는 시간이 끝나고 극장에 들어간 나는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왜냐면 전반부에서 봤던 영화랑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흑백무성영화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꽤 길게 나오는 흑백무성영화를 보면서 계속 생각했다. 이 장면의 의미는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과 연관이 된 거지? 자막도 거의 없는 이 무성영화의 내용은 무엇일까? 더욱 흥미로웠던 것은 그 흑백무성영화가 세 가지 방식으로 거꾸로 상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먼저 흔히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방식, 사람이나 자동차가 뒤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 두 번째로 필름의 좌우를 뒤집은 방식, 세 번째로 필름을 상하로 뒤집은 방식이다. 1937이라는 숫자, 등장하는 꼬마 아이와 여인들. 그리고 알 수 없이 전달해져오는 슬픔이 그 영화를 보고 난 후 알 수 있는 전부였다.

흑백무성영화가 끝난 후, 젊은 여자가 등장하고 영화는 갑자기 전반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보여주기를 시도한다. 전반부와 달리 고정된 카메라와 훨씬 좋아진 화질은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리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영화정보를 통해 알게 된 사실, 라야 마틴 감독은 이 영화를 찍을 때, 리타의 성장 과정을 따라, 아날로그 비디오 카메라로 시작해서, DV카메라를 거쳐 16mm 카메라로 촬영 기종을 바꿨다. 리타가 성장하는 그 당시에 가장 많이 사용되던 기종을 택했다는 것이다.

불법 DVD를 파는 일을 하는 리타는 더욱 무료해 보인다. 엄마와는 할 얘기도 별로 없고, 남자친구는 징징대고, 친구들하고도 즐겁게 지내지 못한다.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엄마의 흐느낌을 듣고, 한밤중에 공동묘지를 헤맨다. 남자친구와 여관에 갔다 온 후, 관객은 그녀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자라온 집을 떠나 버스를 탄다. 버스에 오르기 전 어디론가 길게 통화를 하는 그녀가 계속 울고 있다. 그녀는 왜 혼자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버스에 올라 버스가 출발하자 창밖을 응시하던 그녀가 꾸벅 꾸벅 졸기 시작한다. 그걸 보고 있는 나도 슬그머니 잠이 온다. 그리고 영화는 끝이 났다.

[상영중]은 관객이 절반 넘게 채워나가는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한 소개글을 쓴 알렉시스 A. 티오세코는 라야 마틴의 영화들 중 내러티브에 가장 충실한 영화라고 쓰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그 시간 상 일어나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 술자리 씬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는 어린 리타가 동네 슈퍼에 음료수를 사러 갔을 때 그 앞에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는 남자들과 어른이 된 리타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장면이다. 그들이 하는 대화는 리타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저렇게 짜 맞추게 되는 것이다. 리타의 슬픔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엄마의 슬픔도 그 때문이 아닐까. 중간에 나온 무성영화는 리타의 할머니가 출연한 영화가 아닐까. 리타의 엄마와 이모는 할머니의 물건을 팔아 생계를 꾸려온 것처럼 보인다. 리타의 아버지는 어디에 있을까.

뭐, 어떤 생각이던 상관없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니까. 리타를 알 수는 없지만 그녀의 슬픔만은 정갈하게 느낄 수 있는 영화니까. 리타가 미혼모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짜증이 나기도 하지만, 그녀가 엄마의 품에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귀신 이야기를 듣다가 잠드는 장면이 생각나 다시 뭉클해진다. 우리는 누구나 남들이 원하는 것을 원하면서 살고 있으니까.


영화, 그리고 진짜 이야기

라야 마틴은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이 왕성한 감독이다. [상영중]을 통해 인물의 성장과 함께 영화 매체에 대한 성장을 체험하게 한 것도 그렇고 [다음 상영작]은 대놓고 영화 작업의 매커니즘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다음 상영작]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앞부분은 영화를 만들고 있는 메이킹 필름에 가깝고 뒷부분은 앞에서 찍었던 작품을 보여준다. 첫 장면은 한 여자가 뒤뜰로 나와 의자에 늘어져 앉는 모습을 길게 보여준다. 뭔가 아주 서정적인데 이상한 장면이다. 왜냐면 뒤 문 앞에 조명이 켜져있기 때문이다. 메이킹 필름은 이런 식이다. 촬영 공간에 설치된 카메라와 감독의 모습을 있다, 없다의 모습으로 보여준다.

현장에서 세트를 준비하는 동안, 어둠속에서 들리는 영화 세미나에 대한 대화, 배우들이나 스텝들끼리 농담하고 장난치는 모습들, 그리고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건, 영화를 찍는 작업이 전혀 영화적이지 않다는 것. 통제하고 꾸미고 가리고 연기하는 사람들. 카메라 감독과 스텝들이 기념촬영을 한 후 감독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이를 닦고 침대 위로 쓰러진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타이틀이 뜬다. [다음 상영작] 그 밑에 ‘진짜 이야기’

16mm 무성영화로 만들어진 영화는 라야 마틴 감독이 침대 위로 쓰러질 때 들렸던 빗소리를 사운드로 진행된다. 신기한 건, 엄마와 아들이 싸우는 장면을 찍을 때 소리로만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 무성영화 속 갈등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자인 아들과 어머니의 갈등, 그리고 아들과 그 애인의 관계. 영화는 아주 서정적이다. 짧아서 아쉬울 정도다.


흔히,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말할 때, 다큐멘터리가 더 진짜에 가깝다고 생각하게 된다. 영화 [벌집의 정령]에서 안나의 언니가 프랑켄슈타인이 왜 꼬마를 죽였냐는 동생의 질문에 “프랑켄슈타인과 꼬마는 죽지 않았어. 영화는 다 가짜거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라야 마틴은 극영화 앞에 “진짜 이야기”라는 부제목을 달았다. 그가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자신의 작업의 결과물인 극영화가 “진짜 이야기”인 것이다.

흑백무성영화를 너무 너무 좋아한다는 그는 자신의 작품에 롱테이크와 롱샷과 함께 흑백무성영화의 요소를 가미하는 것을 즐긴다. 이제 25살이 된 그는 첫 번째 장편인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과 [오토히스토리아]로 필리핀 역사와 영화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현재적으로 축적해나가는 자신의 역량을 알렸다. 2008년 한 해 동안 4개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놀라운 활동을 보이고 있는 라야 마틴은 이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내가 발견한 보물 같다. 그의 마지막 극장 시리즈를 하루 빨리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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