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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희

스크린에 불이 켜지면 한 눈에 봐도 영화 세트처럼 느껴지는 인공적인 거리가 눈길을 모은다. 순간, 화면 아래쪽으로부터 자동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등장해 거리 중앙에 위치한 작은 호텔 앞에 선다. 그리고 자동차 문을 열고 내리는 한 무리의 남자들. 시커먼 양복 차림에 총을 든 그들은 추측컨대 조직의 일원들로 보인다. 뒤이어 카메라는 이층의 거리쪽으로 난 베란다를 통해 방 내부로 이동한다. 속옷 차림의 남녀 등장. 붉은 입술에 담배를 문 도도한 여인과 엉덩이가 헐렁하게 쳐진 내복을 입고 있는 어리버리한 남자.(그 남자, 바로 한국의 젊은 여성팬들이 애지중지하는 꽃미남 청춘 스타 ‘츠마부키 사토시’ 되시겠다) 언뜻 보기에도 안 어울리는 이들의 모습에 숨죽이고 있던 관객들의 웃음보가 터지기 시작한다. 그렇다. 이 영화는 영락없는 코미디물인 것이다.


영화 속 영화찍기

<매직 아워>는 유쾌한 스크루볼 코미디, <웰컴 미스터 맥도날드>로 한국에 알려진 감독 미타니 코키의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영화다. 갱 영화에서 많이 본 듯한 도입부의 장면들. 인위적인 세트 촬영과 오버하는 주인공의 익숙한 연기를 보는 순간, 이 영화가 ‘영화를 찍는 행위’-그 안에 포함된 어떤 정서와 인물들을 포함해서-에 대한 영화가 될 것이라는 추측을 안겨준다. 과연 감독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지만 관객의 상투적인 연상 작용엔 과감히 ‘컷’을 외친다. 훨씬 더 기발하고 풍자적인, 황당하면서도 웃긴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내복 차림의 남자 ‘빙고’(츠마부키 사토시)는 이 지역 조직의 일원으로 성실함을 인정받아 지금의 호텔 지배인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보스의 여자인 ‘마리’(후카츠 에리)와의 밀애 현장을 들키게 되고, 화가 난 보스 테시오(니시다 토시유키)는 전설적인 킬러 ‘데라 토가시’를 데려 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한다. 실현불가능한 임무에 머리를 쥐어뜯던 빙고는 가짜 데라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대역 전문 무명 배우 ‘무라타’(사토 고이치)를 섭외한 후 자신이 신인 감독이며 첫 영화에 무라타가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무라타는, 리얼한 영화를 찍기 위해 대본도 없고 카메라는 숨어서 촬영할 것이라는 빙고의 말이 의심스럽지만 첫 주연작이라는 흥분에 들떠 그를 믿게 된다.그렇게 졸지에 보스 앞에 서게 된 무라타. 빙고는 얼렁뚱땅 위기 상황을 모면하나 싶지만 문제는 뜻하지 않는 곳에서 터지고 만다. 바로 무라타의 연기가 너무 리얼했던 것. 지난 20년의 연기 생활동안 한번도 주목받지 못한 무라타는 절호의 기회를 맞아 혼신의 힘을 다해 열연한다. 실감나는 그의 연기에 감명받은 보스는 무라타를 조직의 일원으로 영입하려 하고 일은 빙고의 의도와는 다르게 꼬여만 간다.


웃음 만발 소동극

이 비현실적인, 기막힌 소동극은 브레이크가 걸릴 듯 걸릴 듯하면서도 유연하고 재치있게 앞으로 내달린다. 적재적소에 웃음 폭탄을 설치해 놓고도 짐짓 모르는 체 덤덤한 감독의 연출력과 캐릭터에 몰입한 배우들의 익살스런 연기가 이 영화에 생기를 부여한다. 액션 배우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겠다며 오버 액션을 하고, 망가지는 듯하면서도 배우로서의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무라타의 연기는 폭소를 유발한다. 총격전이 벌어지는데도 자신이 실제 상황에 놓인 것을 영화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배역에 몰입한다.

<매직 아워>의 무대인 가상의 일본 항구도시 수카고는 고전 영화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동네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현대지만, 갱 조직이 건재하며 동네 전체가 거대한 세트장같은 거리 풍경은 갱들이 주름잡던 1920년대 미국 도시를 모방한 것처럼 보인다. 미타니 감독은 속도감과 과장된 캐릭터, 음악과 세트를 통해 구축한 고전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외양에, 영화로 인해 행복했던 그 때 그 시절의 정서와 사람들의 사연을 정성스럽게 담아낸다. 무라타는 동네 어귀의 오래된 소극장에서 낡은 영화 포스터를 보고 반가움을 금치 못한다. 바로 어린 시절 액션 배우로서의 꿈을 키우게 한 전설적인 총잡이가 등장하는 영화였던 것. 추억에 젖어 영화를 보던 무라타는 품속에서 냄새나는 담요 조각 하나를 꺼내든다. 한 유명 영화 스튜디오에 있던 담요에서 잘라낸 천 조각. 유명 감독과 배우가 그 담요위에서 잤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 천 조각은, 언젠가는 유명한 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고단한 현실을 견디는 무라타에겐 더없이 귀한 보물이다.




 

영화에 대한 무한애정

이처럼 영화 <매직 아워>는 극중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영화에 대한 동경과 영화에 헌신한 이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준다. 무라타의 오랜 무명시절,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여전히 그의 친구이자 팬임을 자랑스러워하는 훈훈한 매니저. 무라타의 부탁에 먼 길을 달려와 그의 영화에 근사한 엔딩을 선사한 늙은 폭발전문 기사와 다수의 이름없는 스태프들. 이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만들어낸 그림들은 더없이 따뜻하다. 미타니 감독은 한 편의 영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의 노고에 위로의 박수를 보낸다.

결국, 빙고가 자신을 속였음을 알게 된 무라타. 당장 목숨이 위태롭게 된 상황보다 혼신의 힘을 다한 연기를 스크린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더 절망한다. 그런 무라타를 위해 미타니 감독은 깜짝 선물을 준비해 놓았다. 빙고가 진짜 촬영인 척 꾸미기 위해 몰래 가져온 실제 광고 촬영팀의 카메라가 돌아갔던 것. 그 짧은 두 번의 순간, 의도치 않은 실수덕분에 무라타의 열연은 그대로 필름에 담기게 된다. 빈 극장에 홀로 앉아 시름에 젖어 있던 무라타가 우연히 보게 된 광고 촬영분. 스크린 위에 자신의 얼굴이 커다랗게 등장하는 순간, 그는 한 줄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무라타가 존경해마지 않는 원로 액션 배우와의 예기치 않은 만남도 잊을수 없는 순간을 선사한다. 백발이 성성한 노배우는 무라타에게 ‘매직 아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직 아워’는 해가 넘어간 직후 밤이 되기 전에 밝은 빛이 남아 있는 순간을 말한다. 하루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신비한 순간. 이미 밤인 동시에 아직 낮으로 남아 있는 순간. ‘매직 아워’는 주인공들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화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불현듯 찾아오는 마법같은 순간들

고된 현실이고 실제이면서도 허구이기도 하고 판타지인 어떤 순간. 영화를 만드는 과정, 그리고 완성된 영화가 바로 그 ‘매직 아워’일 것이다. 감독은 그러한 매 순간을 즐기라고 말한다. 오늘이 아무리 힘들어도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르듯이 ‘매직 아워’는 또다시 찾아오기에, 내 인생에 찾아온 ‘매직 아워’를 놓쳐버렸다면? 내일을 기다리면 된다고. 무심하듯 덤덤하게 노배우는 말한다. 자신은 이 나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매직 아워’를 기다린다고.

후배에게 진심어린 격려를 전하는 노인의 혜안은 비단 무라타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평범한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인생 최고의 순간을 손꼽아 기다린다. 하지만, 인생은 종종 우리의 기대를 무참히 배반하고 남는 것은 씁쓸함뿐이다. 그럼에도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찾아올지 모르는 ‘매직 아워’를 여전히 기다리라고, 희망을 버리지 말라고, 감독은 말한다. 소박하지만 철학이 담긴 영화 <매직 아워>는, 코미디의 본분에 충실하고 영화의 판타지적인 속성을 은근히 드러내면서도 제 갈 길을 잃지 않는, 영리한 영화다.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즐거워하는 감독의 진심이 느껴지는 영화. 엉뚱한 상상과 작은 실수가 빚어내는 유머가 귀여운 영화. <매직 아워>는 제목처럼 그렇게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동시에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마법같은 영화다.

무라타가 삶의 경구처럼 외우고 있는 노배우의 영화속 대사 한 마디. “죽음은 두렵지 않다. 단지 긍지를 잃은 채 사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멋을 잔뜩 부린 채 그 대사를 읊는 무라타에게 노배우는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런 무거운 대사는 힘을 빼고 덤덤하게 말해야 그 맛이 살아난다고. 인생도 마찬가지다. 그저 덤덤하게 긍지를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아갈 뿐, 정답은 없다.


* 추신: <매직 아워>의 엔딩 크레딧은 끝까지 봐야 한다. 수많은 스태프들이 세트를 짓는 과정을 기초 단계부터 완성되기까지 저속촬영된 필름으로 보여준다. 마침내 눈에 익은 건물과 골목이 완성되면 갱들을 태운 자동차가 등장한다. 바로 영화 첫 장면의 반복이다. 다름아닌, 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 바치는 감독의 ‘흐뭇한’ 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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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ue0309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야, 매직아워에 대한 코멘트 ! 멋~~진 영화평이네요.
    매직아워. 챙겨봐야겠네요.

    2009.04.28 23:24
  2. Favicon of http://kennethinsight.tistory.com BlogIcon kenneth  수정/삭제  댓글쓰기

    며칠전에 dvd로 본 영화인데,
    다시금 감동이 오네요.
    좋은 글 잘 보고갑니다.

    언젠가 다시 올 매직 아워를 저 또한 기다려야겠네요^^

    2009.05.0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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