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바스키아, 그는 천재였을까?

필진 리뷰 2007. 12. 3. 15:30 Posted by woodyh98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장 미셀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는 1980년대 초반 미국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흑인 화가였다.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전형적인 흑인 가정의 아들로 자랐던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즐겼다. 그림과 함께 했던 청소년기를 겪으며 18살이라는 나이에 독립을 시작한 바스키아는 그때부터 자신의 ‘작품’과 ‘비지니스’라는 가치를 결합시키기 시작했다.

바스키아가 막 성인이 되었던 시기는 미술사에서 가장 극심한 ‘사조 통합’의 시기였다. 전세계의 국가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쟁이 완전히 잠식되고 1960년대부터 일어난 젊은 층의 반발 심리는 극에 달했다. 미국에서는 브롱크스의 뒷골목에서 수많은 십대들이 붓 대신 스프레이통 하나만을 들고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Graffiti art). 이렇게 사회의 바닥에서 혼란의 물결이 일고 있기 이전에 미술계에서는 ‘팝 아트(Pop art)’가 공식적으로 활성화되어 대중과 예술이 상업 미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앤디 워홀(Andy Warhol)이 주를 이루던 1970년대 후반의 미술계는 이를테면 ‘아랫물’과 ‘윗물’이 만나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두 강물의 통합이 이뤄지는 바로 그 역사적인 순간에, 워홀은 묵묵히 자신을 길거리에 표현하던 흑인 화가 바스키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작품마다 혁신적이라는 칭송과 거대한 스캔들을 동시에 흩뿌리던 앤디 워홀은 이미 스타 중의 스타였다. 워홀은 어린 바스키아보다 현저히 높은 위치에서 그를 내려다보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은 없었다. 바스키아로서는 늘 꿈꾸던 거침없는 미술계로의 첫 발을 인도해주는 아버지의 역할을 워홀에게 맡겼고, 나이가 든 워홀은 그런 바스키아의 젊음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둘은 함께 작업하기 시작했다.


‘흑인 영웅’의 등장, 그리고 작품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워홀과 뉴욕 미술 시장은 그가 ‘검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에 주목한다. 상품에 주력하는 갤러리들은 바스키아만큼 세상을 흔들게 할 흑인 화가가 없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를 피사체로 놓아 셔터를 눌러댔다. 바스키아는 화랑이 아닌 뒷골목에서 그래피티 아트를 선보일 때부터 자신의 태생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그리는 그림의 모든 주제는 인종, 특히 흑인 사회에 편협한 시각을 바탕으로 했으며 그는 그런 일방적인 대중의 사고를 비판하는 작업들을 선호했다. 다시 말하면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바스키아가 추구하는 작품 세계와 당시 미국 미술계가 필요로 했던 분위기가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와 맞물려 바스키아의 그림은 수많은 주간지들을 장식했고 동시에 그의 그림의 가격 또한 날개 달린 듯 상승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거리를 떠돌던 ‘반항아적’ 존재였던 바스키아를 ‘흑인 영웅’으로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미술관 안을 잘 살펴봐. 흑인이 하나도 없지?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흑인이 미술관에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야.
- 바스키아가 그의 애인 수잔에게 했던 대화 중


그의 작업에 있어서 ‘상징’은 굉장히 많은 작용을 했다. 물론 자신이 그리는 그림 모두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바스키아는 작품 전체에 있어서 몇 가지 단락을 나누어 그것을 반복해갔다. 가장 많이 등장했던 소재는(위에서도 언급한) 바스키아 자신이 ‘뿌리’라고 생각했던 ‘흑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뉴욕 일대에서 자라오며 보았던 많은 도시적 이미지를 작품에 차용하고 그 끄트머리에 왕관이나 저작권을 상징하는 기호(©)등을 표기했다. 이것은 당시 미국 사회가 보여주는 백인 우월주의적인 사고방식 위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존경, 그리고 작품 속 많은 흑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덧칠해 강한 반발을 나타낸 것이었다.

두 번째로 자주 다뤄졌던 소재는 ‘죽음’이었다. 바스키아가 공식적으로 활동했던 1980년대 초반부터, 그가 죽기 직전이었던 1980년대 후반까지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바스키아는 죽음을 다루었다. 흥미로운 것은 바스키아가 죽음에 대해서 내렸던 태도에 있는데, 그는 죽음에 대해서 철학적인 접근을 하는 대신 ‘죽음’과 상관없는 다른 키워드를 끌어내어 그것을 표현하였다. 바스키아는 인간의 무의미에 대한 무거운 이런 소재를 ‘금전’의 가치와 결부시키는 것을 즐겼다. 특히 그는 인간이 자원을 사용하고 남용하는 행동에 대한 작업을 주로 하기도 했다. 인간의 식재료로 사용되는 동식물과 그것들의 이용가치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작업을 통해 바스키아는 일종의 평화적 메시지를 표출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앤디 워홀과 다수의 시간을 보내며 그의 그림을 빌려 넣기도 했다.


앤디 워홀과 장 미셀 바스키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줄리앙 슈나벨 감독의 영화 <바스키아>는 ‘검은 피카소’라 칭해졌던 천재 화가의 생애를 좇고 있지만, 그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바스키아가 그림을 시작하게 된 계기라든지 불우했던 청소년 시절에 대한 설명은 <바스키아>에서 찾을 수 없다. 대신 영화는 바스키아의 인생에 있어서 가족보다 더 영향을 끼친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과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바스키아>의 실질적인 이야기는 워홀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

거리에서 작업을 하며 지내던 바스키아는 화랑과 저널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워홀을 주의 깊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어느 날 바스키아는 워홀과 마주하여 자신도 화가라 말하며 그에게 그림 몇 장을 보여준다. 바스키아의 그림을 유심히 바라보던 워홀은 ‘나의 그림을 사가라’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젊은 화가의 패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워홀로 인해 바스키아는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로 떠오른다. 그리고 워홀은 바스키아에게 작품의 가치가 가져다주는 부와 권력의 달콤함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기존의 식상함을 완벽하게 벗어버렸다는 찬사를 받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낙서가에서 천재화가로 상승된 그의 지위를 바스키아는 스스로 빠른 속도로 허비하고 벌어들이기를 반복한다. 일 때문에 사랑했던 여인을 떠나보내지만 많은 갤러리를 돌아다니며 각종 오픈 파티에 빠지지 않는 상류층 생활은 끊이지 않는다. 그림을 그리면 그리는 대로 고가에 팔려버리는, 소위 말해 ‘잘 나가는’ 작가의 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 바스키아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바꾼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1987년 앤디 워홀의 사망이었다.

앤디 워홀이 죽기 2년 전 1985년, 바스키아는 그와 함께 뉴욕에서 거대한 공동 전시를 기획하고 실행했다. 많은 기자들은 두 익살꾼의 만남을 기대하며 취재열기를 달아오르게 했지만 다수의 열광과는 달리 화려하게 열린 바스키아와 워홀의 전시는 처음으로 고배를 마시게 된다. 때문에 바스키아는 워홀과 멀어졌고 그 뒤로 둘의 작업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워홀과의 마지막 관계가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었다고 해도 바스키아의 작가적 삶을 주로 이끌어 주었던 앤디 워홀의 사망 소식은 그에게 가눌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워홀이 사망했던 1987년 2월 이후로 바스키아는 거의 모든 전시 계획을 중단한다. 그 이후 그림 한 점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게 되어버린 그는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사치와 쾌락에 빠져 하루하루를 허비하며 지낸다. 결국 워홀의 사망 1년 후인 1988년 여름, 바스키아는 뉴욕의 자택에서 코카인 중독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가 공식적으로 화단에 머리를 내민 지 8년 만이었고 그의 나이는 27살에 불과했다.

「바스키아는 불꽃처럼 살았다. 그는 진정으로 밝게 타올랐다.
그리고 불은 꺼졌다. 하지만 남은 불씨는 아직도 뜨겁다.」

위의 시는 바스키아의 애인이었던 수잔이 바스키아를 위해 장례식장에서 낭독한 시다. 바스키아가 떠나고 또 다른 거리 미술가였던 키스 해링(Keith Haring)도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사실상 1980년대의 주축을 이루던, 그리고 그래피티 아트의 물꼬를 틔웠던 화가들은 앤디와 바스키아의 죽음을 중심으로 사라진 것이다.

바스키아가 죽은 지 약 2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는 당시에 받던 천재라는 호칭을 그대로 누리고 있다. 장 미셀 바스키아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 사회에 강한 일격을 가했던 자유구상 화가였다. 그는 ‘낙서’라는 (시대상의)비예술적 행위를 통해 인간에 대한 탐구나 비판을 엮어 내는 것에 소질이 있었고 그것을 폭로함으로 인해 자신을 가장 바람직한 방법으로 세상에 내던졌다. 미술사에서 바스키아의 탄생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장벽을 허무는 돌파구의 역할을 했던 셈이다.

바스키아, 그는 정말 천재였을까? 꺼지지 않는 남은 불씨처럼 바스키아를 대변하는 이런 이야기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어쩌면 그는 영웅이라는 단어만 차용했던 평범한 흑인 화가였을지도 모른다. 유화 물감이 가지런히 정리된 깔끔한 파렛트 대신 지저분한 물감 통 하나만으로 그는 삶을 영위해 나가야 했음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바스키아는 죽었지만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은 그가 정말 천재였는지에 대한 의견을 여전히 대립시키고 있다. 그들의 말처럼 바스키아는 사회가 만들어낸 인위적인 허구일 수도, 혹은 진정한 시대의 메시아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바스키아의 그림을 앞에 두고 그가 하늘이 내린 천재 미술가였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것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는 ‘검은 피카소’이기 이전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고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올라와 어색한 양복을 입고 카메라를 보며 웃음을 짓는 행동은 분명 바스키아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 위화감은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한 젊은 작가의 불꽃을 잠재우기는 역부족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많은 예술가들이 넘지 못한 스물 일곱이라는 장벽에서 사라진 장 미셀 바스키아. 아직 그의 그림은 조금 이르다고 말하는 한국의 갤러리에서, 직접 그의 숨결을 느낄 날을 조심스럽게 꿈꿔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007.12.03 15:36

BLOG main image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영화 비평 매거진 '네오이마주'의 공식블로그입니다. 더 많은 글은 http://neoimages.co.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y woodyh98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21)
필진 리뷰 (260)
필진 칼럼 (149)
사람과 사람들 (55)
문화와 세상 엿보기 (10)
그리고... (41)

달력

«   2019/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3,158,885
  • 86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woodyh98'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