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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균



 


예전에 무슨 바람이 들어서였는지 소설 비슷한 글을 아주 어설프게 써서 올렸던 적이 있었다. 인터넷 문학사이트에 연재를 해보려다 사람들 반응이 없어서 딸랑 1회 연재에 그치고 만 불발탄인지라 확실한 장르를 구분 짓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형편없는 글이었더랬다. 분명 머리 속에는 기가 막힌 로맨스 소설 한번 써내서 읽는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보겠다는 야심 찬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문자의 형태로 배출되어 나오니 영 허전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하긴, 처음부터 걸작을 마구 양산해내는 예술가가 어디 있을까? 제 아무리 위대한 천재에 대가라 할지라도 때로는 습작을 찍어내기도 하고 실패를 경험하기도 하는 법이다. 그렇게 완성의 단계에 한발자국씩 다가서다가 성공작도 탄생하고 걸작도 만들어지게 되는 것일 터. 우리가 보아온 예술과 문화의 위대한 유산들은 결국 무수한 습작과 실패의 토대 위에서 이뤄진 것 아니겠는가? 만약에 내가 글쟁이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면 과거에 썼던 저 소설 비슷한 요상한 글도 완성을 향한 무수한 시도의 기록 중 하나로 나름의 가치를 지니게 될지 모를 일이다.


누구나 현재를 중요하게 여긴다. 바로 ‘지금’이 있어야 미래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나온 과거 없이는 현재도 존재할 수 없다. 몇 백만 명의 관객동원, 수십,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해외 수출 및 판권계약들, 거기에 이름난 해외 영화제에서의 수상경력까지. 많은 이들이 현재, 혹은 비교적 근래에 거둬온 한국영화의 성과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에는 무심하다. 한국 영화는 너무도 빨리 과거의 유산들을 잃어버렸다. 오래된 고전들 뿐만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어느 중견감독의 데뷔작이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식으로 찾기 어렵게 된 영화 중에 박찬욱 감독의 초기작 두 편이 있다. 물론 그의 이름을 대중에 널리 알린 것은 [공동경비구역 JSA]이지만 오직 성공작만이 예술가의 이력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깐느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 이후 TV 광고에 나와 ‘나는 나를 뛰어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던 그 감독의 다소 서툴렀던 초창기를 목도한다는 재미도 그렇거니와 대한민국 영화광 세대의 대변자가 어떻게 감독으로 단련되어 왔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써도 저 두 편의 영화는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우리의 첫사랑이었다, [달은 해가 꾸는 꿈]

[달은 해가 꾸는 꿈]은 여러모로 민망한 습작 수준에 그치고 만 나의 유일무이한 소설을 연상시키는 영화이다. 내 글이 그러했듯 박찬욱의 데뷔작도 머리 속의 설계도는 옹골차나 그것을 매만지는 손길은 아직 덜 여물어 있었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에서처럼 화면을 꽉 채워 나가는 박찬욱의 스타일은 아직 태동되기 전이었고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처럼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상업영화 감독으로서의 정체성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말 그대로, 멋진 영화 한번 만들어 보겠다는 의욕은 넘쳐 났으나 연출력은 영 서툴렀다. 마음만 앞설 뿐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도통 감을 못 잡는 첫사랑 같은 그런 영화였다고나 할까? 송승환을 제외한 배우들의 연기는 영 심심하기 그지 없었으며 플롯은 갈팡질팡 하는 데다 영상은 애매모호한 이미지들로 가득했다. 여기에 배우 따로, 성우 따로의 후시 녹음이 주는 그 어처구니 없는 느낌이라니.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이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을 본다는 것은 거물이 되어버린 스타 감독이 만들어낸 품절 직전의 데뷔작을 본다는 감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좀더 심하게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당시 인기 상종가였던 가수의 인기에 영합한 이승철 뮤직 드라마라 불러도 무방하다 싶을 정도이다. 그러나 조악한 영화이긴 해도 [달은 해가 꾸는 꿈]에는 데뷔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울컥하는 감정이 스며있다. 아직은 미미했던 박찬욱 감독의 영화적 정체성을 보완해 주는 것은 이때부터 남다른 기미를 보였던 그만의 간담 서늘한 유머감각과 필름 곳곳에 스며든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애정 고백이다.

피투성이가 된 무훈을 구하기 위해 형 하영이 애타게 병원을 찾는 순간에 뜬금 없이 가축병원을 소개해주는 장면은 박찬욱이란 감독의 될성부른 떡잎을 알아볼 수 있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데뷔작에서 느와르 풍의 B급 장르 영화를 표방하고 있긴 하지만 박찬욱은 특유의 비장미까지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가축병원의 침상에 누워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무훈의 입에서 "인생은 정말 잔인해, 평생 개처럼 살아온 나를 이런 데서 죽게 하다니"라는 대사를 흘리게 함으로써 "개처럼 살기 보단 영웅처럼 죽고 싶다"라는 카피로 대변되던 홍콩 느와르 적 비장미에 카운터 펀치를 꽂아버리는 것이다. 거장들이 대를 이어 작성한 컨벤션에는 경의를, 그러나 그들이 묘사한 역사에는 냉소를 (박찬욱 저 "영화보기의 은밀한 매력 : 비디오 드롬" 128페이지에서 인용) 보내고자 하는 신예다운 패기라고나 할까. 물론 [달은 해가 꾸는 꿈]은 날카로운 기억만을 남기고 사라져버린 상처뿐인 첫사랑에 불과한 작품이다. 기록적인 흥행참패와 비평적으로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데뷔작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 작품은 평생 단 한번뿐일지도 모를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는 첫사랑, 첫경험이기도 하다. 머리 속을 떠돌기만 하다 손끝을 떠나버린 이미지로써의 영화에 대한 무한한 연정. 그 잡을 수 없는 감정에 대한 애틋함이 무훈과 하영 두 남자가 동시에 사랑한 은주라는 인물로 육화 되어 표현된다. 무훈의 장례식 이후 떠나버린 은주가 대중의 스타가 되었음이 하영의 나레이션을 통해 설명되는데 남몰래 그녀를 사랑했던 하영은 그저 은주의 이미지만 뒤쫓을 따름이다.

어느 어두운 극장 안. 무훈이 그러했듯 하영도 결코 오지 않을 여자를 기다린다. 스크린에 환영처럼 펼쳐지는 여인의 모습. 살포시 눈물 짓는 그녀. 끊임없이 복제를 거듭하는 허구의 이미지. 그리고 어둠 속에서 남몰래 바라보던 관음적 행위의 완성. 은근한 곁눈질과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던 여인은 마침내 스크린 위의 천사가 되어 사진작가 하영 앞에 재림하게 되는 것이다. 하영은 비로서 바라보기만 할 뿐 만질 수는 없었던 여자 은주를 껴안는다. 그리고 그녀의 이미지가 투사되는 스크린에 손을 대고 그녀를 느끼기 위해 애쓴다. 이때 영사실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하영의 얼굴 위로 나름대로 고뇌에 차서 데뷔작을 완성했을 신출내기 입봉 감독 박찬욱의 얼굴이 겹쳐진다. 당시의 그에게 있어 영화란 깨어지기 마련인 첫사랑, 결코 만질 수는 없었던 여인과 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이후에 만든 영화들에 비한다면야 민망하기 그지 없는 작품이지만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여과되지 않은 채로 터져 나오는 서투른 감정들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달은 해가 꾸는 꿈]은 자기만의 목소리를 찾지 못했던 신출내기가 쏘아 보낸 수취불명의 연애 편지이다. 그것은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진 못했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처절했던 외침이었다.


PLAY IT AGAIN CHAN WOOK – [삼인조]

[달은 해가 꾸는 꿈]이 이제 막 데뷔작을 찍은 영화광 세대의 대변자로서 그 특유의 감수성을 보여준다면 [삼인조]는 영화라는 매체와 그 속에서 섭취한 자양분을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선 세상을 투시해 나가려는 보다 적극적인 시도를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은 [공동경비구역JSA]를 만들면서 메시지 전달을 위해 스타일을 버렸다고 했던 말한 바 있다. 그 말처럼 [삼인조]는 훗날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로 이어지게 될 그의 취향과 영화적 자양분에 더욱 가까이 다가서 있는 작품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B급 무비 스타일, 주류에서 소외된 아웃사이더 들이 이 사회에 반기를 들고 벌이는 강탈과 일탈의 도주를 테마로 한 갱스터의 외피를 두른 것을 뜻한다. 외형적 형태뿐 아니라 캐릭터들 또한 장르의 스테레오 타입을 대변하는 인물들로, 총기류를 탈취해 달아난 하드보일드 똘마니, 김민종은 전형적인 사회부적응 갱스터이고 가정에서 무시당하고 경제적 능력 조차 없는 이경영의 나른한 표정과 미지근한 태도는 (화끈한 김민종과 대비되어 더욱 수동적으로 보이는) 어딘가 필름 느와르의 주인공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근친상간으로 나은 아이에 대한 모성을 보인 다는 점에서 [차이나 타운]의 페이 더너웨이를 연상시키는 정선경은 역시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두 남자를 이용하는 필름 느와르의 팜므파탈이다.

여기에 [고래사냥], [세상 밖으로] 등에서 등장했던 두 남자와 한 여자가 팀을 이루는 설정, 결정적인 순간에 흘러나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흘러간 우리 가요, 영화광적인 감수성이 엿보이는 인용과 전복의 오마쥬들. 결국 [삼인조]는 영화광의 애정으로 1990년대 후반에 재구성한 장르 탐방기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쿠엔틴 타란티노의 [저수지의 개들]에 비견될 혁명성과 파격성으로 치닫지는 못했지만 분명 [삼인조]에는 이야기꾼으로서 그리고 한국의 영화광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로서 박찬욱의 특색들이 잘 드러나 있다. 물론 감독이 의도한 B급 무비적인 분위기에 적합한 매력을 발산한 배우들 또한 인상적이다. 김민종은 단순 무식하지만 때로는 가련하기도 한 문이라는 캐릭터를 맡아 배우인생 최고의 호연을 보여주며 이경영의 지치고 허무적인 연기와 정선경의 당찬 모습 또한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또 이 영화는 외형적인 면뿐 아니라 시대상을 드러내는 거울로써의 기능 또한 충실하다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영화가 IMF 직전 위기에 처한 일종의 유사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란 점에서 드러난다. 이들 세 인물은 하나같이 소외 당한 인물들이다.

안은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아내에게도 무시당하며 마리아는 아버지에게 강간당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문은 그나마 콩가루 같은 가정도 없는 고아이다. 가족의 의미가 퇴색되고 서서히 붕괴되는 시점에서 바로 그 붕괴에 의한 상처를 간직한 인물들이 다른 유대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해피 엔딩을 예감할 수도 있지만 감독은 이러한 기대감마저 깡그리 부숴놓음으로써 가속되는 시대의 불안감을 표출해내고 있다. 애초에 문의 억지로 인해 이루어진 유사가족, 그리고 그 내부에서조차 불신이 횡행하니 오래 존속될 리 만무하다. 결국 안은 유사가족이 아닌 혈연으로 연결된 부권의 행사를 위해 떠나가고 남겨진 인물들은 붕괴 속의 붕괴, 소외 속의 소외라는 이중고를 맞는다. 신앙과 믿음의 상징인 성당이 바로 이 배반의 장소로 활용되는 것은 이래서 의미심장하다. 이에 반해 배반 혹은 비극의 장소로 활용되곤 했던 창고/폐공장은 남은 이들이 재결속을 다진 다는 의미에서 차라리 행복하다. 그 상태로 남아있는 자들의 유대만으로 결속을 이어갈 수 있다면 다행이련만 애초에 이름부터(문, 안, 마리아) 정체불명이었던 이들이니만큼 알 수 없는 운명의 풍랑에 내던져 지는 것 또한 숙명일터. 아이큐 80에 걸맞지 않는 기발한 방법으로 탈출에 성공하지만 문은 그가 여태껏 살아온 땅 위에 발 디디지도 못한 채 헬기 속에서 창공을 떠돌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두 남자를 이용해 아이를 되찾고 살아보려 했던 마리아는 다시 아이를 찾을 수 있을지조차 불분명하게 된다.

그럼 이 유사가족을 붕괴시키고 부성애를 따라나선 안은 어떠한가? 우발적으로 결성되긴 했으되 나름의 신뢰가 있었던 유사가족을 붕괴시킨 그는 자신의 아내를 살해함으로써 친 가족마저 붕괴시킨다. 비록 자살을 기도하려는 순간에 그의 딸이 살아나긴 하지만 목에 줄을 건채 흔들리는 걸상에 몸을 의지한 위태로운 모습의 그가 딸을 제대로 지켜나가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안의 위태위태한 모습은 분명 [석양의 무법자]에서 목에 줄이 걸린 채 블론디를 외쳐 부르는 투코의 모습에서 따온 것일 터. 허나 그 용도는 판이하게 다르다. 구해줄 이는 없고 까딱 잘못하면 목에 건 줄에 의해 질식사할지도 모르는 이 위기의 순간이 1990년대를 살아가는 아웃사이더의 자화상, 더 나아가 IMF로 붕괴되어버릴 빈민층 가정의 모습이었다고 한다면 너무 비약이 심한 것일까? 그러나 영화는 시대와 결부되어 해석되기 마련이고 박찬욱 감독이 추종하던 B급 영화는 단순히 대중의 통속적 취향만 쫓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유하던 이들의 정서마저 대변하는 것이라 할 때 [삼인조]는 싸구려 문화들을 통해 싸구려 인생의 비애를 이야기한 훌륭한 케이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박찬욱 버전의 [비열한 거리]?


용만큼 개천도 중요하다.

누가 뭐라 했든 어차피 선택은 보는 이들의 몫이다. 특정 예술가의 전작을 꿰어야 할 의무 따윈 어느 누구에게도 없을뿐더러 그것이 의무처럼 되어서도 곤란하다. 어차피 예술은 취향과 선택이지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해본다. 대한민국의 문화 예술적 토양이 누군가의 발전적인 변화를 지켜보는 소소한 재미마저 앗아갈 만큼 척박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슈퍼 히어로의 기원만 되짚어 볼 일이 아니다. 유명 인물의 생가터만 보존 할 일도 아니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말을 자주하는데 왜 정작 용을 잉태시킨 개천은 무작정 콘크리트로 덮어버리고 마는 것일까? 그것이 훗날을 위해 닦여진 또 다른 길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가능성을 너무도 쉽게 저버리고 만다. 창대한 나중만큼 미약한 시작 또한 중요하다. [달은 해가 꾸는 꿈]과 [삼인조], 이 두 편의 영화는 분명 미약한 시작에 불과했던 작품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지 않아 커다란 족적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지금, 혹은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에 우리는 저 두 편의 영화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이 영화들이 영화감독 박찬욱의 시작과 영화광 세대의 행동개시를 알리는 요람과도 같은 작품이었다고 말이다.


PS : 마치 '델마와 루이스'의 하비 키이텔처럼 이들 삼인조를 뒤쫓는 형사로 등장하는 장용, 그리고 불륜을 저지르는 안의 아내 역의 김부선 외에도 [삼인조]에는 또 다른 반가운 얼굴이 깜짝 등장한다. 안이 색스폰을 팔러 간 낙원상가 악기상 한쪽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류승완 감독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 함께 등장한 그의 지기 박성빈이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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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soulsdrain.tistory.com BlogIcon Samuel's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에 대한 지식이 너무 해박하신거 같아요. 높으신 내공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두 영화를 보았음에도 별 느낌없는 1인...

    2008.04.29 02:0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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