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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한 기류의 중점 [청계천의 개]

필진 리뷰 2008. 8. 27. 09:47 Posted by woodyh98
강민영


김경묵의 <청계천의 개>는 현실을 차단한다. 다시 말해 그의 영화가 상영되어지는 동안, 관객은 다큐멘터리를 뛰어넘는 현실과 영화의 벽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차단한 짧은 시간 안에서, <청계천의 개>는 순간적 혹은 우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많은 사건의 수를 나열한다. 영화는 특별한 시퀀스 없이 가속적으로 진행되지만, 그 안에 살아 움직이는 인물들의 행로는 앞 뒤를 분간할 수 없을만큼 치밀하고 체계적이다.

<청계천의 개>는 복선의 영화다. 하나의 씬이 다른 씬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후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감정선을 영화 속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장면에서 기다란 머리칼 한 올을 찾았다면, 두 번째 장면은 머리칼의 연장선인 풍성한 가발이 등장한다. <청계천의 개>는 아주 작은 객체들이 쌍을 이뤄 존재하며, 이것은 결국 영화의 가장 큰 바탕을 이루는 머릿돌로 작용한다. 각개의 사건들은 하나만 사라지더라도 전체의 흐름을 단번에 방해할 수 있는 치명적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한 남자(혹은 여자)와, 그로 대변되는 다수의 환상과 소망을 차분하게 뱉어낸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주인공(혹은 감독)의 시각은 교차편집과 네거티브씬을 통해 관객의 촉각을 불편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 '꿈'에 지나지 않는 독백이지만, 한 개인에게 '꿈'이라는 대상이 얼마만큼의 파급효과를 일으키는 지에 대한 날카로운 해답을 찾아낸다. 때문에 <청계천의 개>는 매우 불편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에너지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어차피 남자(혹은 여자)의 환상이 현실로 분배되지 못한다면, <청계천의 개>의 결말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정되어있을 것이다. <청계천의 개>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갈 때, 관객은 영화가 내러티브 밖에 머물 것인지 안에 머물 것인지에 대한 기대를 형성한다. <청계천의 개>는 영화의 앞 뒤를 완전히 밀착시킨 내부적 결말을 택한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환상의 종착점과 한계점을 농밀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여자로 변환하기를 원하는 남자의 선택은 안일한 희망을 향해 걸어간다. 인어가 되고싶은 남자의 소망은 폭포 앞에서 최초의 희망을 갖고, 이후 인어의 꿈을 꾸는 남자는 지하철과 거리라는 공간에 갇혀 변질된 희망을 맛본다. 이때부터 남자의 현실-혹은 통신의 공간-과 이상은 분리되지 않은 채 동일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반복과 대구, 그리고 (일종의)'각성'의 시간이 지나고 남자는 자신에게 매우 익숙한 폭포를 다시 마주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현실의 시간이 아닌 남자의 머릿속이다. 남자는 두 다리에 입혀졌던 하늘색 모조비늘 대신 여성의 몸으로, 가발을 쓰고 인공폭포를 마주한다. 폭포는 남자의 꿈 속에서 가장 이질적인 이미지로 존재한다. 폭포의 물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자신과 인어의 이야기를 동일화시키기도 하고, 철저히 나누기도 한다. <청계천의 개>가 놓친 중요한 방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영화는 트렌스젠더와 트렌스라는 단어가 가지는 사적 이미지와 문제점의 해결에 대한 탐구를 기반한다. 남자가 가공의 폭포를 전혀 다른 공간에서 마주하는 순간은 지금까지 이어져왔던 수많은 복선들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시종일관 곧게 떨어지는 물살을 마주한 남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엄청난 공허함을 느꼈을 것이고, 그 공허함이 앞으로 나아가 두 다리를 청계천에 머물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좌절과 전진 사이에서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남자의 클라이맥스도 바로 이 부분이다. 뛰어넘어야 하는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지 간에, 청계천에 놓여진 남자의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자극을 제공해야만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청계천에서 멀어진 남자는 자신이 두려워하던 대상을 다시 만나고, 이야기에서 빠져나와 방향성을 완전히 틀어 희망을 향해 걸어간다.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고 싶었던 단상이 '한 없이 아름다운 소수의 세상'이었다면 스스로 한 편의 동화를 마무리하는 남자의 선택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계천의 개>가 가지던 수 많은 장면의 리듬을 생각해본다면, 영화의 결말, 즉 남자의 '맺음'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위화감을 건넨다. 분출되거나 정지해야만 했던 남자의 움직임이 희망적인 내레이션으로 포장되었을 때, <청계천의 개>는 종전까지 불안정하게 이어오던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이후 관객의 머릿속을 사로잡는건, 영화의 단편적 이미지다. 기괴하고, 참기 힘든. 혹은 다가서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실린 서정의 이미지들. <청계천의 개>가 '살아있음'을 증면하는 것은 영화 내에서 곡선으로 흐르는 강력한 이미지들이다. 물론 이러한 이미지의 움직임이 <청계천의 개>라는 영화 자체를 대변하기에 소극적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장면들의 위로, 김경묵의 내러티브는 도약을 꿈꾼다. 흩어지는 씬 사이에서 관객을 농락할 수 있는 힘을 일정부분 소유하는 영화는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보호되어야 할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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