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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영


아무래도 촬영장을 한 번 다녀와야 될 것 같았다. 이미 다른 매체들이 취재해 기사화되었고 우리 역시 꽤 많은 분량의 원고를 준비해놓은 상태였음에도 직접 눈으로 봐야 속이 시원할 것만 같았다는 말이다. 혹여 방해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완곡하게 의사를 타진하니 뜻밖의 답이 날아왔다. “거두절미하고, 일요일 날 아예 (카메오)출연하시죠....신 대표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젠장. 난 그냥 촬영장에 찾아가 덕담이나 몇 마디 던지고 오려고 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람. 일찍이 김훈의 『칼의 노래』가 「한국문학의 벼락같은 축복」이라는 문단의 평가를 받았듯이, 까짓것 나라고 ‘한국영화 카메오계의 벼락같은 축복’이 되지 말란 법이 있겠느냐는(그러니까 제 정신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말도 안 되는 호기를 부리며 촬영장소인 대학로의 어느 카페로 향했다. 그로부터 4시간 쯤 흐른 후.

이런 경우를 두고 사서 고생한다고 말하던가? “배우가 너무 컵을 일찍 잡은 것 같아. 애초에 컵을 깨기로 작심한 것처럼 보이면 곤란할 텐데.” 진짜로 무심코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그 장면이 허술해 보이는 것은 분명했다. 극의 흐름 상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모니터를 보던 감독이 조감독을 호출해 다시 찍을 것을 지시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준비한 소품용 설탕 컵이 3개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필 세 번째 테이크에서 이런 일이 발생하다니. 스태프의 움직임이 분주해질수록 나는 ‘이게 다 좋은 영화를 위해서야. 귀찮아도 다시 찍으면 훨씬 그럴싸한 그림이 잡힐게 틀림없어’라 자꾸 되뇌고 있었다. 비록 내 발언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지만 눈총이 두렵지도 않았고 눈총을 주는 사람도 없었다. 누구하나 불평 없이 자기자리를 잡고 재촬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컵 대신 주먹으로 치는 것으로 설정을 바꾸자 소품 걱정은 사라졌다. 하지만 바뀐 설정에 따라 몇 차례의 테스트가 다시 이어져야 했다.

곧이어 재개된 촬영. 그런데 도무지 감독은 오케이 사인을 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몇 번의 리허설을 거친 후 슛에 들어가도 만족할 만한 장면 하나를 얻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마당에, 다 찍었다 싶은 신을 처음부터 다시 찍어야 하는 배우와 스태프, 또 감독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배우의 동선이 맞지 않아 한 번, 배우 배에 그림자가 비춰서 또 한 번, 오버액션 때문에 다시 한 번. “다시 가겠습니다” 조감독의 목소리가 이어질 때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태프들. 그럼에도 감독은 직접 나서는 법이 거의 없었다. 그저 모니터를 주시하다가 가끔 한 번씩 나타나서는 연기에 대해 몇 마디 의견을 내놓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는 하루 종일 그랬다. 현장은 전적으로 조감독에 맡겨져 있었다. 조급해하기는커녕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아야 할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 이것만큼 감독에게 필요한 덕목은 또 없을 터이다. 일찍이 이탈리아의 감독들, 그러니까 비스콘티와 파솔리니가 그랬고 그리고 베르톨루치가 배우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그는 배우에게 어떤 지시도 주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신이 어떤 연유로 해서 벌어진 것이고 어떤 이야기로 연결될 것인지를 이해시키는 데 주력했다. 촬영감독과도 프레임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정도면 족해보였다. 반복촬영을 최대한 절제한 채 촬영감독의 의견을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태도에서, 무표정함으로 일관하는 그의 카리스마에서 나는 기타노 다케시를 떠올렸다.

끝이 보이지 않던 촬영에 제동을 건 건 엉뚱하게도 빛이었다. 해가 저물어가기 시작하면서 조명등으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빛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결국 5번의 테이크 만에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그러나 감독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묵묵히 담배를 입에 문 감독의 지친 표정 위로 고뇌가 배어나온다. 돈과 시간과의 싸움을 지배하지 못하고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아쉬움의 다름 아닐 테다. 곁에서 눈치를 챘는지 “한 번 더 가시 던지요”라고 촬영감독이 거든다. 말만으로도 고맙기 그지없지만 말처럼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촬영, 분장, 조명, 동시녹음, 편집 등등의 분업화된 스태프의 협조와 4시간 가깝게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자리를 지켜야 했던 보조출연자와 배우들을 생각하면 감독 욕심을 앞세우기가 쉽지만은 않을 터. 연출부의 촬영 정리에 이어 기계와 장비들이 하나 둘씩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하루는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생면부지인 나를 사람 좋은 웃음으로 편안하게 대해준 정동규씨(나홍진의 <추격자>에서 시장 역할을 맡았던 배우다)와 사소한 것까지 신경써준 스태프들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알 만한 사람은 벌써 눈치 챘겠지만, 이건 신동일 감독의 <반두비> 촬영장을 찾은 후 써내려간 사적단상이다.

신동일의 세 번째 장편 <반두비>의 촬영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벵골어로 ‘참 좋은 친구’라는 뜻의 <반두비>는 이주노동자와 여고생 간의 수상쩍은 로맨스를 통해 한국의 사회시스템 전반을 진단해나가는 독특하고 진중하며 경쾌한 영화다. 예정대로라면 9월 24일 경 크랭크업을 하게 된다. 두 번째 장편의 개봉 불발을 딛고 와신상담한 작품이니만큼, 스태프들의 유기적인 협조와 노력이 보태진 만큼 좋은 영화가 나올 것으로 확신한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영화를 위해 <반두비 제작위원회>가 구성되어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제작위원회라는 것은, 투자 제작 배급을 수행해온 전문 집단이 삼각편대를 이룬 후 유기적으로 협력하여 투자부터 개봉까지를 관장하는 독립영화의 실험적 제작시스템을 말한다. 2007년 윤성호 감독의 <은하해방전선>이 그 효시였으니 신동일의 <반두비>는 두 번째 수혜자가 된 셈이다. 이미 2008 상반기 독립영화제작 지원작에 선정된 바 있고, 독립영화배급의 메카인 인디스토리가 배급. 마케팅을 맡았다는 사실은, 적어도 개봉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주인공인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주노동자이자 미디어활동가인 마붑 알엄과 CF모델 출신의 신인 백진희 사이의 수상쩍은 로맨스, 혹은 박혁권과 이일화가 다른 한 축을 이뤄 펼쳐내는 닭살 돋는 사랑 놀음이 궁금하지 않은가? 그래도 조금만 기다리시라.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반두비>는 후반작업을 거친 후 내년 초 반드시! 여러분과 만나게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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