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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우트] 엄지원이 돌아왔다!

필진 리뷰 2007. 11. 19. 09:18 Posted by woodyh98


엄지원과 리얼리즘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의 호흡이 가장 뜨거웠던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이리라. 엄지원은 스크린에서 튀어나온 여배우(최영실 역)로 극중 김상경(김동수 역)의 현실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는 초현실 그 자체였다. 동수는 영실을 쫓아 종로 극장가에서 남산을 배회한다. 동수는 시종일관 영실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그녀에게 말을 걸지만, 그녀를 향한 그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자신에게 되돌아올 뿐이었다. 영실은 잡히지 않는 여자였다. [극장전]은 스크린의 빛과 어둠을 빠져나온 한 인간이 현실세계를 영화와 혼동하는 구조를 띄고 있다. 영실은 현실이었으며 동시에 영화였다. 엄지원은 다른 영화에서도 몸에 맞지 않는 비현실적인 배역을 도맡아하면서 연기력으로 자신을 포장하였다. 그녀의 연기는 인위적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맡은 캐릭터들은 인위적일 수밖에 없었다. [주홍글씨]에서는 위장결혼을 통해서 사랑하는 여자 친구를 흠모하는 역이었고, [가을로]에서는 유지태의 전 여자 친구의 혼을 담은 연기를 해야만 했다. 엄지원의 얼굴은 일종의 가면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캔버스라면 감독들은 그녀의 얼굴위에 짙은 유화 물감으로 거침없이 덧칠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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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엄지원이 가벼워졌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두터운 층을 떨어냈다. 이제 엄지원은 눈물을 참아내지도 않았으며, 슬픔을 억눌러 자신을 다독이지도 않았다. [스카우트]의 세영은 엄지원이 출연한 전작의 캐릭터들처럼 상처와 비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세영은 유치함을 알고 있으며, 눈물을 감출 때를 알고, 펑펑 울어야 할 때를 알고 있다. 영화를 빚대어 표현하면 감독의 지시가 없어도 도루할 타이밍을 적절히 간파하는 눈치가 빠른 주자가 되었다. 극중 엄지원은 치고 빠지기를 수차례 반복한다. YMAC에서 문학 수업을 진행하는 세영은 곤태(박철민)가 들려주는 사랑의 시를 심드렁하게 듣는다. 무심히 볼펜을 떨어뜨려 먼 산을 바라볼 타이밍을 확보하는 그녀. 세영은 호창(임창정)과 재회했을 때도 그의 정치적 태도가 심경에 거슬리는지 전두환을 ‘대머리 아저씨’라고 비아냥 거린다. 세영은 감정 표현에 있어서 혹은 자신을 드러냄에 있어 자신감이 넘치는 여자였다. 대학 신입생당시 자신을 소개하면서 약간의 비음이 섞인 하이톤으로 광주 사투리와 표준어를 반반 섞어 쓰던 그녀. 세영은 도서관학과에 오면 책을 마음껏 볼 줄 알았지만, 정작 대학와서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며 자신이 무공해 여인임을 널리 알린다. 세영은 자신의 지방색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는 사회화가 덜 되었다기보다는 폭압의 시간을 애써 무시하던 소녀의 순결함을 넌지시 보여줌이리라. 하지만 소녀는 불의를 보고는 참지 못하는 투사였다. 게임에서 승자가 되기보다는 페어플레이를 통해 자신의 명예와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래, 이 영화는 분명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영화였던 것이다.

헌데, 이상한 건 이 여자가 장타를 날리지 않는다는 거다. 세영과 호창은 7년 전 헤어져 다시 만난 사이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제리 맥과이어>처럼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는 척 하지만 정작, 영화의 본심은 흐트러진 사랑의 퍼즐을 맞추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거를 기억하려는 호창과 달리 세영은 지난날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때로는 모르고 사는 게 약이란다. 세영은 애써 줄무늬와 민무늬의 차이를 말하지 않는다. 호창은 그 차이를 모르고 있으며, 영화는 툭툭 던지는 소품들을 통해서 둘 사이의 균열이 시작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영리한 기교를 뽐낸다. 세영은 모든 것에서 솔직한 여자였으며, 줄무늬 남방이 빛나는 여자였으며 땡땡이 원피스가 화사하게 어울리는 여자였고, 청바지가 착 달라붙는 80년대 여자였다. 유치한 사랑 놀음에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은 동화책에서 나온 소녀를 연상하게 하게 하다가도 빛을 받은 그녀의 모습은 베르메르의 화폭을 장식하는 진주 귀걸이 소녀보다도 더 우아한 자태를 선사한다. 그녀는 고딕스러운 멋을 아는 배우인데, 이는 그녀가 7년의 시간을 두고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연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세영은 사랑에 빠지면 누가봐도 유치한 여자로 돌변하지만, 80년 광주로 돌아왔을 때는 결연한 의지를 품고 있는 투사로 변한다. 이 때 그녀는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는다. 스스로 시대와 저항해오면서 말해야 할 것과 말해서는 안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영은 뼛속 깊숙이 시대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스카우트]의 가장 역동적인 장면은 호창이 전경들 틈을 뚫고 세영을 구하러가는 씬이다. 호창은 돈 키호테가 되어 모두가 무모하다고 생각했을 전경들과의 싸움을 단행한다. 그리고 세영을 구하는 데 이때 호창은 돈 키호테가 되고 세영은 돈 키호테가 흠모하던 둘 시네아 공주가 된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화려한 남자가 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풍차와 맞서서 무참히 뭉개지는 돈 키호테처럼 풍자속의 주인공이 되어도 좋겠다. 비록 우리가 사라져도 세영은 오랜 세월동안 천천히 자신을 사랑한 남자를 기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스카우트]의 엄지원은 희미한 미소를 띄우면서 지나간 시간을 회고한다. 그 웃음의 파장이 스크린 위에 오랫동안 진동한다. 엄지원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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