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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무엇을 위한 영화인가?

필진 리뷰 2009. 4. 19. 11:04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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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3가지 코드로 읽어 본 <실종>

<실종>은 ‘감금’을 주요 콘셉트(concept)로 삼은 (현실 강력 범죄를 표방한) ‘스릴러’ 장르의 영화이다. 감금은 이 영화의 성격이 되었고, 스릴러는 이 영화의 형식이 되었다. 전자의 경우를 보자면, (감독은 <쏘우>라는 영화를 염두에 둔 듯하지만) 이 영화는 <완전한 사육>과 대단히 유사해 보인다. 또 스릴러라는 형식에 치중해서 보자면, 이 영화는 올해 초 개봉한 <추격자>와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안타깝게도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실종>은 이야기의 소재가 불쾌감을 줄 뿐더러, 장르적 형식에서는 컨벤션을 범람시켜 이야기 진행에 흥미를 떨어뜨리고 있다. 게다가 이 영화는 불필요한 감독의 정치적 선전까지 더해지면서 완전한 패착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다른 영화들보다 조금 더 자세히 다루기로 했다. 사실 이 영화에 대한 영화적 평가는 다른 기자들이 작성한 영화평에서 더 이상 보탤 부분이 없을 정도로 잘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실종>에 대한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 영화가 영화적인 평가 이외에 영화 외부와의 세계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 거리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평론이 영화 내부적인 분석이 아닌 영화 이외의 이론을 끌어들인 다던가, 혹은 사회적인 관계에 대한 해석으로 치닫는 것을 되도록 금기시 하는 요즘 풍토에서 이런 작업은 상당히 의미 없는 일로 추락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글이 꼭 영화 평론일 필요는 없다. 영화를 소재로 차용한 글이더라도 그것은 사회 비평, 정치 비평 때로는 에세이가 될 수 있다. 물론 내가 영화 비평을 안 쓰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 대해서 영화 비평을 하기에 앞서 난 좀 다른 글을 써 볼까 한다. 그리고 그 글은 바로 지금 이 시기에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구성은 이렇다.

구성 기준 : 영화 <실종>을 읽는 3가지 방법
① ‘감금’ 코드로 읽기 <정치 비평>
② ‘추격’ 코드로 읽기 <사회 비평>
③ ‘분노’ 코드로 읽기 <영화 비평>


여기서 본격적인 영화평은 3부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하겠다. 지금 확실히 말해두자면, 1부 ‘감금’ 코드로 읽기와 2부 ‘추격’ 코드로 읽기는 영화평이 아니다. 왜 영화평에 쓸데없이 정치 얘기를 하느냐, 사회 비판적이냐. 이런 토를 달아 주지 않았으면 한다. 이런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이 두 개의 글은 읽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바로 3부 ‘분노’ 코드로 읽기를 권한다. 그리고 각기의 글들은 독립적인 하나의 비평이 되도록 노력했기에 이 글을 따로 따로 올리는 일도 양해해주기를 바란다. 워낙 중언부언 하는 글 실력 때문에 쓸데없이 글이 길어져 한 번에 다 읽어 나가기에 조금 힘들 것이라 판단하여, 이번 글만은 끊어 읽기 쉽도록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개제하려고 한다.


하나. ‘감금’ 코드로 읽기 <정치 비평>

<완전한 사육>은 ‘일본 여고생 납치 사건’이라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소재로 제작된 영화이다. 그리고 <실종>이라는 영화가 <완전한 사육>과 공유하고 있는 부분은 단적으로 말해서 감금당하는 인물의 심리 상태를 관객이 실지로 느끼도록 하는 내면화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영화가 어떤 폭력적인 상황을 다루어야 할 때,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우리는 이를 잘 눈치 채지 못하지만- 가해자 혹은 외부 인물의 관점으로 이를 묘사한다. 그것은 관객이 영화를 관람할 때 이를 불편하게 느끼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배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다르다. 가해자의 관점이 아닌 이를 당하는 즉, 감금당하는 사람의 관점이 수시로 영화에서 반영되고 있다. 특히 영화의 전반부에서 현아(전세홍)가 판곤(문성근)에게 감금당하여 겪는 상황은 현아의 관점으로 아주 자세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마치 우리가 감금 상태에 놓인 것 과 같은 느낌을 주기위해 노력한다. 현아가 어둠속에 파묻혀 있으면, 스크린은 일체의 빛을 허락하지 않은 채 걷잡을 수 없는 암흑과 공포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또한 어둠속에서 갑자기 밝아오는 불빛에 의해 눈조리개가 급격히 열리는 상황은 페이드인 -여기서는 밝은 화면에서 점점 어두워지면서 원래의 화면이 나타나는 페이드인 방식이 사용되었다- 으로 그대로 재현해낸다. 또한 이 영화의 핵심 장소인 지하실로 접근 하는 방식은 전반부에서 문성근이 지하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아닌, 지하실 안에서 문성근이 들어오는 모습으로 잡힌다. 이렇게 <실종>의 전반부는 감금당한 인물의 시점을 통해 관객에게 피해자의 심리 상태를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김성홍 감독이 최종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피해자의 심리 상태는 무엇이었을까?



 

- 감금의 심리학 -

필자가 군대에 막 입대하여, 신병교육대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고 퇴소를 앞 둔 시점에서 담당 조교는 나에게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얘기인 즉은, 조교들이 훈련병들을 심하게 굴리면 굴릴수록 훈련병이 가지는 조교에 대한 호감이 더욱 짙어진다는 이상한 얘기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 두어 시간 기합을 받으면, 훈련병들은 자신들이 왜 기합을 받고 있는지도 잊게 되고, 조교가 기합을 빨리 끝내주기만을 바란다고 한다. 자신을 이 고통에서 구원해 줄 유일한 인물이 조교이기 때문에 훈련병들은 기합이 오래 지속될수록 조교라는 존재가 자신을 이 고통으로 몰아놓은 사람이라는 생각보다, 자신을 이 고통에서 구원해 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교가 기합을 끝내거나, 휴식을 부여하면, 훈련병들은 조교에게 아주 깊은 호의를 느낀다고 한다. 어이없는 이야기이지만, 나름 신빙성이 있었기에 매우 흥미로웠다. 이것에 대하여 어렵게 논증할 필요 없이 스톡홀름 신드롬[혹은 스톡홀름 증후군(Stockholm syndrome) : 인질이 인질범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에게 동조하는 비이성적 현상을 가리키는 범죄심리학 용어]이란 단어만 살펴보아도 우리는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당사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아이러니한 상황 사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감금 역시도 인질극의 이러한 상황과 대체로 유사한 면이 많다. 감금은 인질보다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감금 상태에서도 가해자에게 동조되어 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실제 사건을 극화한 <완전한 사육>의 경우 감금되어진 대상과 가해자가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가를 아예 시리즈물로 출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실종>의 경우, 일정 부분이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유도한다.

전반부에 현아가 판곤에게 감금당하고 극도의 공포에서 서서히 풀려나기 시작하면 판곤은 현아에게 지속적으로 “고맙지?”라고 자신에게 고마워하기를 강요한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는 감금당하는 인물의 심리 상태 위주로 영화의 전반부를 이끌면서 왜 감금당하는 인물이 가해자에게 동조되어가는 가를 관객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이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관점이 아닌 극도의 공포를 경험하고 이것에서 서서히 빠져나오는 피해자의 관점이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에 영화는 일종의 무리수를 두더라도 감금당하는 대상자인 현아의 관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도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은 어렵지 않게 관찰된다. 바로 정부에게 인질로 잡혀 사는 서민들의 얘기다. 교체된 정권이 가장 먼저 의욕적으로 추진한 정책이 바로 ‘감세’이다. 참여정부 시절 부유층에게 부과하였던 각종 세금을 줄여주려 했던 보수정권은 뻔뻔하게도 “가정에 큰 부담을 주었던 세금을 줄여 가정 경제를 살리겠다!” 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래서 지금 가정 경제가 살아났나? 그야말로 눈 가리고 아웅해보겠다는 심보다. 이것은 고통 속으로 서민을 몰아넣고, 그 고통 속에서 몇 푼의 돈을 쥐여 주고 생색내겠다는 속셈이다. 세금이 줄어 아니 정확히 말해 세율이 줄어들면, 단편적으로 생각해서 내 수중에 있는 돈의 지출이 줄어들 것 같지만, 이것은 부유층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서민들은 세율이 줄어들지도 않고, 부자들의 부가 세율이 서민 세율로 맞춰진 것뿐이다. 결국 부유층은 엄청난 금액이 감면되지만, 서민에게는 별다른 절세 혜택이 없다. 하지만, 부족한 세금은 결국 사회 저소득 계층에 돌아가던 복지 혜택을 줄어들게 만들 것이다. 당장 믿고 의지할거라고는 복지 수당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세금 감면은 엄청난 영향을 줄 것이다. 그들에게 복지 혜택은 당장의 삶에 기본적인 부분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줄이고, 복지 혜택을 줄이겠다는 것은 어려운 사람이 죽던 말 던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겠다는 소리나 같은 것이다. -부자의 소비 심리를 살려 시장을 활성화 하겠다는 논리는 부자의 소비력은 세금에 상관없이 일정정도 꾸준히 유지된다는 점에 따라서 별다른 효용성을 가지기 힘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소득 수준이 낮을수록 보수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높다는 사실이다. 보수 정권이 정작 서민을 어려운 환경에 쳐하게 만들지만, 서민들이 믿고 의지 할 곳은 결국 정부의 복지 혜택뿐이다.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되는 비이성적인 상황 또는 감금당한 피해자가 감금 시킨 가해자에게 호의를 느낀다는 점과 매우 유사하다.

인간의 적응력은 탁월하다. 어떤 역경에서도 이를 극복하고 이겨내는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은 때로는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감금 혹은 인질극의 상황 하에서 인간의 이런 적응력은 그것을 당연한 환경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를 그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당사자가 지금 내게 작은 호의를 베푼다고 착각한 사람이란 사실이다. 세금 몇 푼 줄어든다고 결코 그들이 좋은 행위를 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우리를 일종의 공범으로 만든 셈이다. 우리가 줄어든 세금이라고 좋아하던 일이 누군가에게는 기본적인 문제도 해결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일로 연결 될 수 있다. 결코 그들에게 감사 할 일이 아니다. 기억하자. 우리를 이 고통으로 빠뜨린 것이 누구인지 말이다.



둘. ‘추격’ 코드로 읽기 <사회 비평>

‘감금’이 주요 테마였던 전반부가 끝나게 되면, 이제 실종된 현아를 찾아 나선 현아의 언니인 현정(추자현)이 등장하고, 그녀가 실종된 현아를 찾아나서는 후반부가 시작되게 된다. 이 후반부에서 눈에 띄는 점은 이 영화가 최근 일어난 강호순 사건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단순 연쇄 살인 사건이라는 점 이외에도 자신의 개인 축사에서 살인이 이뤄졌다는 점과 휴대폰이 꺼진 기지국으로 범인을 추적하는 설정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전혀 의심하지 않을 법한 순박해 보이는 중년을 범인으로 설정했다는 점 역시 이 영화가 강호순 사건에 일종의 연장선상의 이야기라는 착각을 가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 영화가 추격이란 코드로 추격자와 비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단순히 범인을 찾아 나선다는 설정의 공통점이 아니라, 최근 벌어진 사회 강력 범죄의 재현 측면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흥미로운 사실은 <추격자>가 유영철 사건을 그리고 <실종>이 강호순 사건을 재현한 듯 보이지만, 사실상 실제 사건과는 상관없이 만들어진 완전 별개의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만들고 보니 강호순 사건이 일어났더라.”라고 설명했다. 애초에 영화는 최근 벌어진 강력 범죄에 대한 소재를 차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실지로 가장 최근의 강력 범죄를 빼다 박았다는 사실은 이런 강력 범죄가 이미 예상 가능한 범위 안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 예상 가능한 범죄가 일어나도록 방치하는 사회 -

예상 가능한 범죄가 일어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두 가지이다. 그것이 불가항력적인 상황의 사건이거나 혹은 그런 범죄가 일어날 것을 알아도 이를 묵인할 경우이다. 우리 사회는 후자의 경우를 따른다. 내가 강호순 사건을 보고 놀란 것은 그의 연쇄 살인 행각의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이를 바라보고 있는 사회의 이중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다음은 어떻게 부녀자를 자신의 축사로 쉽게 이끌어 갈 수 있었는가에 대한 강호순의 자백 가운데 일부이다. “고급승용차를 끌고 다니면 대부분 사람들은 의심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하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제 차에 올라탔습니다.” 사람들은 뉴스에서 이 장면을 보면서 혀를 찾다. 욕지거리를 한 무더기 쏟아내면서 그를 지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뉴스 뒤에 등장한 어느 광고. 그 광고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대답 대신 차를 보여줬다’는 카피를 사용한 어느 중대형 고급 세단의 광고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광고의 센스에 탄복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은 좋은 차를 타는 사람을 좋은 사람으로 착각한다. 만약 좋은 차를 탔는데 그가 살인범이라면? 그냥 재수가 없었던 것뿐일까? 그냥 나중에 살인범을 보면서 욕이나 실컷 하면 모든 것이 그냥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다시 좋은 차를 타는 사람은 그냥 계속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면 속 편한 것일까? 내가 지금 하는 말이 곧, 좋은 차를 타는 사람들을 모두 나쁜 사람으로 만들려는 생각은 아니다. 적어도 좋은 차와 좋은 사람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만약 강호순이 고급 승용차를 가진 사람을 바라보는 사회적 편견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쉽게 연쇄 살인을 이어 나갈 수 있었을까? 이 문제는 희생자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범죄가 사회의 어느 취약한 부분에 의거하여 발생한 이미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죄였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범인은 아무리 빨리 체포되어도 이미 늦다. 최선은 범죄를 미리 예방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권력에 의한 치안 유지에는 한계가 있다. 사형 제도의 부활도 범죄율을 낮추진 못한다. 범죄는 대부분이 사회의 취약한 부분을 노린다. 그리고 그 취약한 부분을 만드는 건 바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다. 잘못된 편견, 부풀려진 욕망, 편협한 사고, 어리석은 질투와 시기, 잘못된 이기심 등등을 당연시하고 넘기는 현대 사회는 극단에 선 인간에게 노리기 좋은 대상이 된다. 먼저 노력해야 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우리들 자신부터이다.


셋. ‘분노’ 코드로 읽기 <영화 비평>

앞서 말 한 두 가지의 코드로 읽은 전반부와 후반부는 각기 피해자의 심리 상태 전달을 통해 관객의 기분을 두렵게 하고, 현실의 강력 범죄와의 연관성을 통해 왜 이런 범죄가 벌어지는가를 묘사하여 관객을 분노케 한다. 그래서 이 영화를 대하고 있노라면, 초반에는 다소 무섭다가 후반부에는 기어코 화가 나기 시작한다. 감독이 누차 주장한 영화 <쏘우>라는 영화에 이 영화가 얼마나 다가 간 것인지 알 길이 요원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쏘우>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의 심리’를 꾸준히 이어나가며 이를 보는 관객의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것에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초반부에서는 감금당하는 인물인 현아의 심리 묘사로, 후반에는 일종의 징벌을 당하는 문성근의 심리 묘사에 그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관객이 최종적으로 얻게 되는 것은 결국 분노이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찝찝한 마음을 토로한다거나 화가 난다는 직접적인 표현을 많은 관객들이 숨기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잔인한 장면이 많기 때문이 아니라,(이 영화는 생각보다 잔인한 장면이 그렇게 많지 않다.) 이 영화가 줄곧 관객의 입장에 피해자의 감정을 투영시키기 때문이다. 계속적으로 당하는 입장을 겪어야하는 관객은 아마도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화가 쌓일 때로 쌓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상당히 이상한 에필로그를 통해서 이러한 분노를 해소시키려 한다.


현정이 판곤을 총으로 쏴 죽인 후, 장면이 전환되면 현정이 하얀 환자복을 입고 앉아 있는 접견실 장면으로 넘어간다. 변호사는 현정에게 판곤을 총으로 쏜 행위는 정당방위라고 설명하고, 이내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던 장면을 묘사한다. 그런데 맙소사! 그녀는 판곤이 현아를 분쇄기로 갈아 죽였듯이, 그를 똑같은 방식으로 죽인 것이다. 그리고 이 행위에 대해서 변호사는 정신 착란 상태를 주장하여 정상참작을 이끌어 내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현정은 이를 거절하고, 당시 자신은 제정신이었다고 주장한 뒤, 변호사에게 딸이 있는지를 묻고, 이에 대한 대답을 듣고 선 싸늘한 눈웃음을 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화면은 장면 전환. 한 눈에 봐도 과도한 노출인 두 명의 여인이 화면으로 다가오며 바다로 나갈 배를 찾고 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어느 낡은 배의 나이 든 어부를 발견한 그들은 자신들을 태우고 바다로 나갈 것을 부탁한다. 그러자 나이 든 어부는 이 두 여성을 훑어본 뒤 주변을 돌아보고 다시 정면을 응시한다. 그리고 화면은 페이드 아웃되면서 동시에 기분 나쁜 음성이 울려 퍼진다. 게다가 이 대사는 듣기에 상당히 끔찍한 여성을 비하하는 욕설이다.

이건 아무리 봐도 영화의 기본적인 영역을 넘어선 감독 개인의 정치적 선전 행위에 가까웠다. 현정이 판곤을 분쇄기로 갈아버린 행위의 당위성을 얘기하는 것은 판곤이 현아를 감금하고 죽인 행위를 폭력은 폭력에 의해 징벌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힘의 논리에 의한 복수로 모든 죄의식을 털어버리겠다는 속셈이다. 게다가 마지막 과도한 노출을 행한 두 명의 여성이 나이든 어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망망대해의 바다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는 씬에서는 현아의 노출이 판곤의 범죄를 이끌었다는 느낌을 부여하기도 한다. 거기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욕설을 암전된 화면에 보이스 오버로 관객들에게 들려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부분에서 영화는 영화 내부 영역을 벗어나 관객에게 일종의 개인적인 선전을 추구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성범죄를 유발하는 것은 여성의 과도한 노출에도 책임이 있다.’라고 말하진 않지만, 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아마도 많은 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특히 이 부분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온당하게 쌓인 영화적 분노를 부당한 방법에 의해 현실적으로 해소하려는 감독의 불순한 의도 때문이다.

이 영화가 쌓이는 분노를 그대로 잠재해 놓은 상태에서 끝냈다면, 아마도 이토록 긴 글을 주구절절 이어 나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묘사한 마지막 장면은 결국 쌓이고 쌓인 분노를 일거에 방출시켜 버린다. 두 개의 짧은 시퀀스와 검은 화면에 보이스 오버된 짤막한 대사가 이 분노를 터트릴 대상을 정확히 지목하고 있다. 영화를 표현하는 다양한 방식은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영화를 개인의 정치적 선전에 이용하는 행위는 명백히 지양되어야 한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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