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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흥기


어떤 한 씬이 영화 전체를 함축하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결정적 한 장면이 조망한 영화를 졸작에서 건져 올리는 경우도 있다. 많진 않지만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이런 영화를 보고 나면, 강렬했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글을 쓰는 동안 도무지 다른 것에 집중할 수 가 없어서 오래도록 나를 무척 힘들게 한다. 이럴 땐 그냥 그 씬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쓰는 편이 속편하다. 그것이 그 영화를 설명하기에 좀 더 진솔하고 합리적인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난 <경축! 우리사랑>의 어떤 씬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까 한다.


이 영화는 두 개의 위대한 씬이 존재하며, 그것은 바로 극중 아줌마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을 연기한 김해숙씨의 얼굴이다. 그 첫 번째, 낮에는 하숙집을 관리하고, 밤이면 노래방도 같이 건사해야 하는 억척스러운 봉순-흔히들 아줌마 혹은 누구의 엄마로 불리는 그녀. 하지만 그녀는 봉순이란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이기 때문이다-씨. 영화 초반, 점점 줄어만 가는 하숙생에 모집 전단을 붙이러 이 골목 저 골목을 서성이다 세탁소에서 일하는 하숙생 청년을 만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청년은 봉순씨가 창피하지 않도록, 전단지에 적힌 오탈자를 최대한 조심스럽게 지적해준다. 이 때 카메라는 봉순이라는 인물의 얼굴을 고집스럽게도 화면 안에서 놓아주지 않는다. 거의 4~5초간을 미동도 없이 카메라는 인물의 표정을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마냥 이상 하리 만치 오래도록 그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


두 번째 씬. 봉순에게는 이제 제법 처녀티가 나는 외동딸이 하나있다. 잘생긴 하숙생은 언제나 주인집 딸의 선망의 대상이자, 유혹의 대상 아닌가. 이 집도 별반 다르지 않는듯하다. 봉순의 딸 역시 제법 반반하게 생긴 세탁소 청년과 잠깐의 열애에 빠져든다. 부모의 노래방에서 불같은 성애를 표현하다 엄마인 봉순에게 걸린 딸은 마땅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하자, 급기야 “나 오빠랑 결혼할래.” 라고 폭탄선언한다. 그러나 취직이 되어버린 봉순의 딸은 면피용 폭탄선언을 철회해야만 했다.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탁소 청년은 자신의 아픔을 표현하기에 여념이 없고, 이 때 맨 처음 세탁소 청년을 우연히 만난 것처럼 그 자리에 홀연히 나타난 봉선은 사위가 될 뻔 했던 청년을 이내 등에 들쳐 업고 선 하숙방으로 청년을 옮겨 놓는다. 얼굴과 옷가지에 뭍은 토사물을 치우면서 외간 사내의 상체를 훔쳐보게 된 그녀는 왠지 모를 뜨거운 감정에 이끌리게 되고, 본능적으로 한 남자의 상체를 쓰다듬게 된다. 여기서 다시 카메라는 봉선의 얼굴을 비춘다. 첫 번째보다 더 길게 더 집요하게.......

이제 나는 이 두 개의 씬을 집중 분석하려고 한다. 이 두 개의 씬은 클로즈 업이며, 프리즈 프레임(고정 화면)치고 상당히 긴 테이크-두 번째 씬은 거의 40초간을 아무 미동도 없이 한 장면을 촬영했다-라는 점에서 기존에 우리가 자주 접해보지 못했던 방식의 장면을 봤을 때 느끼는 일종의 이질감을 형성한다. 그런대 이 영상은 이질감이 부여하는 어색한 느낌에서 더 나아가 이상하게도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끔 한다. 잔인한 장면도 아니요, 야한 장면도 아니요, 그렇다고 지루한 장면이 몇 십분 동안 지속된 것도 아닐 터인데, 이 작은 표정 변화를 집요하게 응대하고 있는 우리는 왜 이토록 심한 이질감에 휩싸이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아줌마라는 대상을 현실에서건 미디어에서건 이토록 가까이 오래도록 마주 대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오프닝 시퀀스에서 보여준 독특한 애니메이션은 여성의 일생이 아줌마라는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그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은 아줌마에 이르러 사회적 무용성에 휩싸인다. 특히 외모적 가치로 여성을 평가하는 사회에서는 아줌마란, 가치를 매길 수 없는 한없이 보잘것없는 존재로 추락한다. 그 단적인 표현은 영화에서도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난다.


영화 초반 봉순의 남편 친구들이 봉순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노래방에서 도우미들이 없어서 재미있게 놀지 못했다고 투정하는 장면은 그녀가 여성으로서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을 숨겨 말하는 일종의 공격이다. 봉순의 남편 하씨와 그의 불륜 상대 역시 봉순이 남편과 성관계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을 증명하여, 그녀에게 섹슈얼리티적인 여성성이 없다는 것을 인정시키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면서 도리어 중년의 여성은 자신 스스로를 방어하기에 이른다. 그래야만 한국 사회에서 겪어야 하는 무시무시한 폭언들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줌마란 존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 사람의 어머니로서 또 다른 희생에 당도한다. 결국 다시 돌아온 봉순의 딸이 우선 가족의 화목이라는 이유로 봉순의 사랑을 포기하기를 제안하지만, 이에 실패하자 꺼내드는 카드는 ‘자신도 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협박하며 뱃속의 아이를 지우길 강요한다. 이마저도 거부당하자 그녀는 이렇게 소리친다. “정말 싫다. 엄마가 모 이래? 엄마가 모이래!!” 이것은 왜 엄마가 먼저 포기하지 않느냐는 것인데,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 봉순의 입장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은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어머니라는 이름의 또 다른 아줌마의 초상이다. 항상 먼저 포기해야 하는 쪽은 그들이다. 그래서 아줌마라는 대상은 이제 ‘존재’자체에 의문을 가져야 할 지경에 이른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줌마라는 존재는 사회적 비인식적 대상(인식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대상)에 가깝다. 이 사실은 여성성의 포기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비주체적 행동 양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한다. 여성으로서의 자리를 잃고, 자립적인 행위 주체를 잃은 객체는 이제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에 이른다. 여기서 아줌마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도 인지의 대상도 아니다. 한국 사회 안에서 아줌마는 제 3의 성이 아닌 아예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가깝다. 

그런대, 놀랍게도 이 영화의 앞서 말한 두 씬은 이런 존재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있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존재를 집요하게 시각적으로 인지하도록 강요하며,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어떤 것에 대하여 비판적 의문을 들게 만든다. 그것이 무의식적으로 거부되어졌던 존재에서 실체로 파악되어지게 되면 관성적 거부감이 작동한다. 그러나 화면은 이런 과정 중에서도 절대 이 거부된 대상을 회피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서서히 아줌마라는 존재에 대하여 다가가게 될 것이다. 그것이 존재로서 발견되어지는 순간 ‘그것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당도하게 될 것이다. 이 자체가 관객의 무의식에 대단한 혼란과 파괴를 야기 시킨다. 기존의 아줌마라는 존재에 대한 비인식적 태도가 일순간에 존재론적 고민에 부딪치게 되면, 우리는 인식의 사고 순간에서 사회적 강박의 틀을 깨고 원론적인 존재 해석에 다가가게 된다. 그래서 첫 번째 씬은 존재에 대한 각성과 동시에 보여 지는 미세한 표정 변화를 통해 그녀에게 실존적 위치를 부여한다. 어떤 무시무시한 폭압적인 의식으로부터 해방된 인식은 빠르게 변화하여 곧 두 번째 씬에 당도하게 되는데, 여기서 화면은 존재론적 주체와 여성적 이미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봉순이라는 아줌마가 주체적 위치에 서도록 만든다.


사실 나는 지금 너무 말도 안 되는 단어들을 열거하면서 되도 안한 소리를 나불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 첫 번째 씬에서 봉순의 얼굴을 클로즈 업으로 꽤 오랫동안 잡았을 때, 난 나도 모르게 상당히 불편했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니 아줌마 주제에 왜 부끄러워하지?’라는 못 된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난 충격을 받았다. 그런 생각이 들고 나는 감독이 이런 생각을 무마시키기 위해 화면이 곧 다른 화면으로 이동할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화면은 멈추어 서서 고집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마치 내가 틀렸다는 투로 화면은 내게 조롱의 눈빛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나는 화면 속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보이기 시작했다. 아줌마라는 세 글자로 모든 게 감추어지는 대상이 아닌 한 사람의 여자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그 대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씬에서는 이제 그녀의 그런 행동에 의해 내 관념은 성큼 더 전진하였다. 그녀도 인간이다. 누구나 그런 어리석은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건 실수와 실패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어리석은 실수를 통해 무엇보다도 봉순은 인간다워진다.


나는 지금 불륜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실수조차 용납되어지지 않고, 더욱이 여성성을 말살시켜 사회 계약상의 혼인 관계에게도 공공연하게 사랑받는 것이 불가능한 대상이 사랑의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히 이 영화가 말할 고자 하는 지점의 극단에 위치한 지점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충격 치료 같은 면이 있다. 영화 가장 마지막 봉순이 여성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당도할 때 영화는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봉순의 신음 소리를 모두들 듣게끔 만들고 한바탕 신나는 여흥에 도취시킨다. 이 장면에서 과연 우리는 아줌마라는 대상의 이야기를 얼마나 귀담아 들었는가 또 그것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사려 깊게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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