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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보고 쓴 디워 이야기

필진 리뷰 2007.09.10 07:59 Posted by woodyh98

2007.09.09


* 보지 않고 쓴 글이므로 당연히 스포일러 없음.
* 주(註)가 많으므로 참을성이 없는 분은 읽지 않아도 무방함.

많은 사람들이 스토리의 개연성 부재를 들어 ‘디 워’를 낮게 평가하지만 사실 스토리는 영화를 이루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스토리가 극적 긴장을 유발하지 않음에도 높은 평가를 받는 영화는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유리 놀슈타인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그 제목이 주는 기대와 달리 거의 요약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할 만큼 스토리가 분절되어있지만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 걸작으로 꼽히며1) 고다르와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가치는 결코 스토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평론가들이 선호하는 예술 영화일수록 스토리가 느슨한 경우가 많은 점을 볼 때 스토리가 부실하다는 ‘디워’의 혹평은 아이러니컬하기도 하다.

물론, 느슨한 스토리가 바로 예술 영화를 의미하진 않는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프레임 안에 담긴 풍부한 상징과 표현이, 그리고 고다르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에겐 다른 형태의 정교한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묘한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그건 관객의 감정 이입을 목표로 하는 대중영화에선 스토리가 중요한 반면 작가의 스타일이 우선시되는 예술 영화에선 스토리보다 이미지나 대안적인 내러티브 구조가 더 중요하다고 보는 이분법이다.2)

그렇지만 대중영화를 스토리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은 1914년 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이 등장한 이후 형성된 하나의 관습일 뿐이다. 그 이전의 영화와 관람 형태를 보면 전혀 다른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디워’와 둘러싼 현상을 이해하는데 어떤 시사점을 준다.

가령 1895년 그랑 카페에서 영화 상영을 기다리던 관객들이 기대했던 것은 감동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첨단 테크놀로지가 보여줄 충격이었다. 사실 뤼미에르의 영화 뿐만 아니라 초기 영화의 스토리를 현대 영화와 같은 맥락에서 논할 수 있는 지조차 의심스럽다. 우리는 특정 시간대에 상영되는 단일한 프로그램의 영화(가령 ‘디워’)에 익숙하지만 초기 영화에선 전혀 사정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랑 카페에서 상영된 영화는 ‘뤼미에르 영화 묶음’이었지 개별 영화의 연속 상영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억지로 스토리를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기차가 도착했다 떠난다-공장문이 열리고 노동자들이 퇴근한다-기마대가 파리를 행진한다-뤼미에르가 아이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다....’ ‘기차의 도착’과 ‘뤼미에르 공장 노동자의 퇴근’등을 개별적인 영화로 이해하는건 현대의 관습을 따른 것일 뿐이다.

이후 영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첨단 테크놀로지에 대한 호기심은 사라졌지만 초기 영화의 위와 같은 특징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영사기사들은 창고에 쌓여있는 개별 필름들을 편집해서 새로운 영화를 창조(?)했고 극장주는 그렇게 창조된 영화뿐만 아니라 만담, 짧은 연극 공연등이 한 세트로 묶인 프로그램을 진행하곤 했다.3)

그러므로 이 당시 관객들이 영화에 기대한 것은 스토리보다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이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쾌락은 오케스트라의 연주거나 변사의 유머섞인 설명이기도 했고(유성영화가 도입된 후 이 둘은 빠르게 사라졌다) 멜리에스가 선보인 마술적 효과거나 뤼미에르의 조수들이 오지에서 찍어온 이국적 풍경이기도 했다. 때론 애국심도 한 몫을 차지했다. 미국-스페인 전쟁은 당시 침체기에 접어들었던 미국 영화계를 되살린 일등공신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극장은 전쟁 뉴스를 보려는 애국적인 관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4)

물론, ‘디 워’는 스토리를 갖고 있는 장편 영화라는 점에서 ‘초기 영화’와 구별된다. 그러면 관객의 쾌락이 아니라 영화의 미학적 구성을 놓고 ‘디 워’를 평가하면 어떨까? 앞에서 밝혔듯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뭐라 이야기하기 어렵다. 다만, 심형래 감독이 초기 영화처럼 종종 영화 외적인 텍스트를 영화 안으로 끌어들이거나 디에제시스의 환상을 깨곤 했다는 점만큼은 흥미롭다.5)

가령 ‘영구와 땡칠이’는 ‘어린이 여러분, 영구를 불러보세요.’라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하고 어린 관객들이 영구를 부르자마자 ‘영구, 없다’고 외치는 심형래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이는 ‘영구’에 대한 영화외적인 지식 없이는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관객에 대한 직접적 호명이 영화적 쾌락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대개의 대중영화와는 다른 독법을 필요로 한다. 보진 않았지만 ‘디 워’ 후반부의 심형래 내레이션 또한 이러한 심형래 영화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다름’이 바로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관객에 대한 직접적 호명이나 다큐멘터리적 요소의 삽입이 기왕의 예술 영화, 특히 고다르 영화에서 이미 풍부하게 나타났으며 문제는 그 의미와 일관성이라는 반론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6) 다만 심형래 영화에 대한 평가와 분석, 이해가 그 ‘다름’을 무시하고 이뤄질 수 없다는 점만큼은 분명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디 워’의 스토리가 부실하다는 지적은 있을 수 있지만 영화도 아니라는 식의 평가는 과도하다. 아울러 그 ‘다름’이 호불호를 떠나 거의 언급되지 조차 않고 있다는 사실 또한 유감스럽다.7)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인 질문 앞에 이러한 유감도 초라해진다는 점을 고백해야겠다. 그 ‘다름’이 지금 얼마나 중요하냐는 것이다. 디 워의 형식이 다른 대중 영화와 얼마나 다른지를 아무리 밝혀낸들 과연 디 워를 둘러싼 수많은 소동을 설명할 수 있을까?

영화는 영화만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순수론자들이 있지만 사실 이는 현실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를 둘러싼 사회적 담론과 실천은 끊임없이 개별 영화에 대한 우리의 기억에 침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영화에 대해 정보를 얻은 뒤 표를 구매하거나 시사회에 참석하고 극장 안을 구경한 뒤 영화를 보고 나와 누군가와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이러한 각각의 행위는 영화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구성하고 재창조한다. 우리는 자신이 본 영화에 대해 ‘순수하게 판단’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그 판단은 ‘시사회’에서 보았는지(이 경우 대개는 더 너그러워진다. 공짜니까.) 제 값 다 내고 극장에서 보았는지(이땐 반대로 스크린 구석구석 값을 하는지 따지기 십상이다) 또, 에어컨이 빵빵했는지, 다리 밑에서 쥐가 돌아다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 뿐인가. 흔히 이야기하듯 영화 보기 전의 기대치에 따라 달라지고(생각보다 괜찮네, 또는 후지네) 본 이후엔 같이 본 사람과 이야기하며 다시 기억을 재구성한다.(아, 그 장면이 그런 거였어? 몰랐네.) 심지어 영화를 분석하는 이들조차 이는 예외가 아니다. 고다르와 베르히만의 여성 편력이 이들 영화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평가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난 믿지 않는다.

결국, ‘디 워’에 대한 논란은 가장 근원적인 질문으로 돌아온다. ‘영화란 무엇인가.’ 당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왜 디 워는 영화인가(혹은 아닌가). 당신의 머릿 속에 있는 영화는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답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나는 ‘영화는 너무 이해하기 쉬워서 영화만으론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8) 가령 ‘디 워 현상’은 파시즘의 징조인가.(그렇다면 한국의 지식인이여, 총 궐기하라!) 영국의 훌리건처럼 양극화 시대를 살고 있는 대중들의 일탈인가.(한국의 지식인이여. 궐기하지 말고 디워 팬들을 따스하게 감싸 안자.) 우리 민족에게 유전적으로 각인된 민족주의적 요소의 발현인가.(시간이 지나길 기다리자) 그냥 일부 네티즌의 놀이와 소동에 불과한가?(난 지금까지 헛고생했네.)

註:
1) 개인적으로 국한된 경험에 따르면 ‘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디 워’처럼 정규 교육을 마친 사람들보다 아이들이 더 좋아하는 경향을 보인다. 과연 스토리 위주의 이해는 교육의 산물일까?

말 나온 김에 한마디 더. 난 ‘이야기 속의 이야기’같은 걸작 애니메이션을 상설 상영하는 아동 전용 극장 하나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2) 이러한 이분법은 종종 시나리오와 감독의 관계로도 표현된다. 대중영화에선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중요하지만 작가 영화에선 ‘감독’의 독창성을 중시한다.

3) 초기 영화의 형태에 대한 설명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현대 영화의 맹아적 형태로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현대와는 다른 종류의 영화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초기’를 뜻하는 용어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전자의 사람들은 종종 primitive를, 후자는 early를 선호한다. 후자의 학자 중에선 초기 영화의 상영 형태에 대해 오늘날의 멀티미디어와 흡사하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면 알아서 공부하시라.

4) 초기 영화가 구현했던 ‘직접적인 감각적 쾌감’은 대중영화가 스토리 중심의 장편영화로 재편된 이후에도 슬랩스틱, S.F.의 현란한 특수 효과, 뮤지컬 영화의 안무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왔다.

5) 디에제시스의 환상을 지키기 위해 배우가 자신을 쳐다보는 관객이 없다고 가정한 채 연기해야 한다는 절대 법칙은 (그래서 배우는 절대 카메라를 쳐다보지 않는다) 초기 영화에서 종종 무시되곤 했다. 배우들은 직접 관객에게 웃거나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기도 했다. 또, 초기 영화는 영화외적인 텍스트를 전제한 채 제작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같은 고전을 극화할 경우 초기 영화는 ‘이미 관객들이 이 고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스토리가 구성되곤 했다.

6) 내가 아는 어느 대학 영화과 교수는 심형래 영화의 이런 특징을 놓고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칭하기도 했다. 누군지는 안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 말이 농담인지, 진지한 학문적 결론인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7) 심지어 ‘디 워’의 열혈 옹호자들 조차 이 점에 대해선 거의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누가 내게 돈을 준다면 해보겠다. 진담이다.

8) 따옴표 안의 말을 누구로부터 훔쳤는지는 가르쳐주겠다. ‘영화는 너무 이해하기 쉬워서 오히려 분석하기 어렵다’ 프랑스의 영화 기호학자 메츠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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