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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건영

좀 더 집중할 순 없었을까?

한 인터뷰에서 작가 최인호는 “소설의 소재로 쓰라며 자기이야기를 들려주러 찾아오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파란만장하기 이를 데 없고 다른 이들은 절대 상상할 수 도 없는 인생이야기라면서. 하지만 막상 듣고 보면 그 정도는 누구나 한 번쯤 겪는 흔한 고생담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토로한 바 있다. 또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에서 피아노를 배우러 온 아이의 부모는 하나 같이 자신들의 아이가 절대음감을 가졌다고 말한다. 하긴 초등학교시절만 해도 교실 뒷벽에는 내가 그린 그림이 떡하니 붙어있었으니까.

아무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뛰어난 재능을 가졌겠냐마는 대게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재능이 별것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고 이를 이겨내면서 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이야기하려고 하는 영화의 주인공 ‘수연’은 남달라 보인다. 그러니까 재능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으면서도 자신이 재능 없음을 인식하거나 인정할 줄 모를 뿐더러 오히려 콤플렉스덩어리로 가득 차있다는 것. 게다가 특별한 노력도 않고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않으며 오직 자기의 꿈을 상대에게 설득하고 지원하도록 강변하는데 만 급급한 인물이다. 언젠가는 유학을 갈 것이라고, 단지 남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끊임없이 최면을 걸며 하루를 소비해나가는 이 대책 없는 청춘. 이처럼 뭣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청춘이 열정 하나에 의지해 세상 밖으로 나간다는 것,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재능임에도 스스로를 독려하며 이 험난한 세상과 부딪혀야 할 때 그 두려움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연 그녀의 꿈은 이루어질까?

단편 <난 그런 사람 아니에요>로 알려진 이승영 감독은 장편 데뷔작 <여기보다 어딘가에>를 통해 바로 이러한 청춘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영화는 책임감도 확신도 없이 탕진하다시피 소비되는 일상을 읊조리듯 담백한 음악을 통해 매끈하게 묶어내고 있는 데, 때깔만 보자면 독립영화의 틀을 훌쩍 넘어설 정도로 만족스럽다. 또한 핸드헬드와 트래킹 사이의 적절한 선택은 몇몇 장면에서 탁월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외양에서 만족스런 만듦새를 보여주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주인공이 어떻게 세상과 맞서 자기의 꿈을 이뤄내는지 혹은 실패하는 지를 보여주는 과정일 터. 그러니까 성공과 실패에 대한 결과론적 탐구에 치중한다면 20대 청춘을 소재로 한 것이 무의미할 테고 원인과 배경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무게감에 짓눌려 독립영화의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보다 어딘가에>가 선택한 것은 어느 쪽도 아니다. 다시 말해 영국 유학에 목을 맨 영화 초반과는 달리 어느 샌가 주인공의 꿈은 현실에 경착륙해버리고 마는데, 이는 러닝타임의 절반 이상을 세 명의 캐릭터를 (너무 디테일하게) 설명하는 데 허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감독에게 던지는 질문 하나. 동호의 학교생활에 그토록 많은 시퀀스를 할애할 필요가 있었을까? 현의 동거녀를 두 번씩이나 등장시킨 이유는, 그의 이중성을 알리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수연의 절박함을 설명하기 위함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둘 다 껍데기만 남은 비루한 인물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인가? 이렇다보니 영화가 끝날 무렵이면 수연과 동호와 현이 어떤 사람이었고 이들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명확한 반면 수연의 꿈은 온데 간데 사라져버리고 만다. 솔직히 말해 수연의 행위들이 누구나 공감할 만한 구석이 충분함에도,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그녀가 꿈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궁여지책을 알려주는 것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다.

영화에서 수연은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부모를 떠나 홀로서기를 택하고 있는데, 이를 지속시키기 위해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자신을 좋아하는 동호의 옥탑 방에 얹혀살면서 친구에게 푼돈을 빌리는 것뿐이다. 이처럼 사소한 노력도 성취도 병행되지 않는 수연의 행동으로 인해 꿈이 멀어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때문에 유학을 꿈꾸고 음악인이 되기를 간절히 원함에도 재능은 고사하고 기본기조차 갖추지 못한, 게다가 이기적이면서 히스테리로 뭉쳐진 그녀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감독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다. 그러니까 번번이 패배하고 좌절하는 주인공의 꿈과 현실이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자문하도록 만듦으로써 동시대 젊은이들의 공감대를 얻어내려 한 시도가 엿보임에도 불구하고, 자칫 무기력하고 나태한 청춘의 자화상을 드러내는 것 같아 아쉽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재능이 없음에도 죽도록 노력하면서 작은 성취를 맛보며 앞으로 나아가던 <아스라이>의 상호나 남루한 현실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그 무엇을 발견해가는 여정을 그린 <나의 노래는>의 희철과 비교해볼 때, 영화의 주인공 수연은 낙천주의자도 아니고 노력파도 아닌 단순한 몽상가에 지나지 않음이 발견된다는 말이다. 이는 소재가 가진 충만한 에너지를 십분 이용하지 못한 채 인물들의 문제를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으려한, 그러나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시종 자기합리화로 일관하는 수연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난 그런 (재능 없는) 사람 아니에요’를 외치는 것 같아 안타까울 정도다.

만약 수연이라는 캐릭터에 좀 더 집중하면서 홀로 영화를 견인토록 했더라면 어땠을까? 예컨대 동호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현은 필요이상으로 음울하며, 수연을 둘러싼 중심인물들의 이야기에 곁가지처럼 끼어든 동호를 짝사랑하는 여학생과 현의 동거녀 설정은, 청춘의 꿈을 다루고자한 영화인지, 음악인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영화인지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매끄러운 화면과 중독성 가득한 소규모 아카시아밴드의 음악은 더 없이 좋았지만 여기에 치중하다보니 결기를 놓쳐버린 아쉬움. 한편으로 이러한 것들은 최근 독립장편영화에서 곧잘 발견되곤 하는데, 얻는 만큼 잃어가는 것들에 대하여 한 번쯤 되돌아 볼 때가 된 듯하다. 즉 상업영화 못지않은 품질과 독립영화정신 사이에서 한정적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이 도래했다는 말이다.

글을 다 쓰고 나서야 다른 이들의 평을 읽어보았다. 대체로 영화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으나 구체적으로 왜, 무엇이 좋았다는 얘기는 없었다. 독립장편영화라는 것의 강조를 통해 면피하려는 태도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이럴 때면 고민스럽기 짝이 없다. 젊은 감독의 장편데뷔작 그것도 불과 1억을 가지고 만든 독립영화 앞에 너무 무거운 숙제를 던져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라도 상호부조성 칭찬은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독립영화에서 1억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닐 뿐더러 영화는 감독의 작업이라는 점에서 영화에 보내는 응원과는 별개로 영화 자체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실망스러웠다기보다는, 너무 세밀하게 그려내려 했던 시도로 인해 더 잘 만들어질 수 있는 여지를 감독 스스로 봉쇄한 것 같아 더욱 아쉬운 영화 <여기보다 어딘가에>, 선택과 집중의 묘미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감독에게 남겨진 숙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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