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년 동안, 정확하게는 나이 마흔을 넘긴 이후로 잠자리에서 꿈꾸는 적이 드물어졌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꿈이 소멸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법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뇌의 활동이 왕성하지 못한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어쨌거나 꿈은 현실에서 못 다 이룬 아쉬움의 찌꺼기이자 억압된 욕망의 부산물이라는 것이 일반적 정의다. 위기일발의 순간에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는 것도, 결정적 순간을 놓쳐버려 장탄식을 해대는 것 모두가 꿈에서 깨어남으로써 벌어지는 일 들이다. 꿈꾼다는 것, 이 얼마나 매혹적이고 경이로운 체험인가!
‘영화적’이라는 표현이 있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으나 애초에 영화라는 것이 판타지라고 본다면, 정형화된 삶으로부터 탈주를 꿈꾸는 관객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장면과 이야기를 두고 하는 말일 터이다. 되돌려 보면 예전의 영화들에서는 어김없이 영화적 요소들이 발견되곤 했다. 그러니까 비단 신데렐라 스토리나 영웅 신화 서사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고단한 삶을 위무하는 짧지만 빛나는 장면들로 인해서 영화는 관객의 마음과 애정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 영화를 처음 보았던 때를 기억한다. 아담한 상영관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숨과 탄식이 흘러나왔고 거침없는 웃음과 쾌재의 환호성도 이어졌다. 그렇게 한 편의 영화를 두고 낯선 이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다. 이러한 감흥은 극장 밖에서도 이어지기 마련이다. 삼삼오오 무리지은 이들은 방금 전 본 영화를 이야기 하고 있었으니, 아마도 그들은 밤을 새워 버스터 키튼과 무성영화를 예찬했을 런지도 모른다. 또 그들 중 어떤 이는 처음 접한 고전영화의 마력에 사로잡혀 문턱이 닳도록 영화관을 드나들었을 테고 현재도 진행형일 게 분명하다.
고전이란 그런 것이다. 고전영화의 명성은 애초에 열정적인 소수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소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고전영화의 작가들은 항상 열정적인 소수의 열의에 의해 힘을 얻어 왔다. 그런 점에서 우리시대의 고전이란 영화에의 열정과 영속적인 관심을 보유한 소수에게 즐거움을 주는 작품들의 목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고전은 어떤 윤리적 이유 때문에 살아남지 않는다는 점이다. 키튼과 히치콕을, 르누아르와 웰즈를, 트뤼포와 고다르와 오퓔스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열정적인 영화광들이 그것을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네마테크를 찾아가고 그곳의 기억을 영화수첩에 쌓아야 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곳의 영화들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시네마테크의 고전이 뛰어난 까닭은, 열정적인 소수가 그리고 당신과 내가 그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은 바로! 그런 것이다.
지금 당신이 고전영화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해도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천천히 시작해도 늦지 않다. 고전영화와 친해지는 방법을 조금만 터득한다면, 추진력 강한 당신의 영화 인자들이 촉수를 세우고 고전 앞으로 도열하게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왕이면 지금부터 고전영화와의 첫 만남을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이번 주말에 낙원동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은 어떨까. ‘2008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통해 꿈 꿀 수 있는 영화를 만나고, 그 영화를 통해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할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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