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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나는 한국영화의 위기상황에 대한 용어정리, 그러니까 한국영화의 위기가 아니라 영화산업의 위기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것의 원인은 무분별하게 판을 키워온 제작자를 비롯한 영화관련 집단 모두에게 있으며, 이들이 한국영화가 곧 망할 것처럼 호들갑 떨면서 위기타개의 수단으로 한국영화를 볼모잡고 있다는 얘기도 했었다. 일부 영화제작자들 중에서 영화자체에는 관심조차 없거니와 흥행하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생각에 사로잡힌 넋 나간 사람도 있다. 또 스크린 쿼터 수호를 위해서는 ‘문화다양성’을 내세우며 영화를 예술로까지 격상시키지만, 사업영역에 들어서면 흥행에 거품을 무는 이중성이 제작, 배급업자들에게서 발견되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계는 더 건강해져야 하고 다양한 형식의 영화들이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문제는 재창조마저도 수월치 않다는 것에 있다.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어 함부로 손대기 겁날 정도인 영화판을 어떻게 하면 체질 건강한 모습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까?

지난 글에서는 제작, 배급업자 집단에 초점을 맞춰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집단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선량한 감시, 전달자로서의 책무에 충실하기는커녕, 시장의 왜곡을 직시하지 못한 채 한국영화위기론의 배후로 전락해버린 언론의 책임 또한 이들과 비교해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즉 부실공사의 책임이 설계, 시공자뿐 아니라 감리자에게도 지워지듯이 부실한 날림 영화를 온전히 비판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입장에 서있었던 언론 역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기다. 한국영화산업의 부활을 이끌기 위해 영화인의 혁명적 변화 못지않게 언론의 역할 재조정이 필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례사비평을 날려 온 평단 역시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는 영화산업과 한국영화를 위한 언론매체의 역할과 책임을 거론하려 한다.

잡지나 일간지 인터넷 신문을 막론한 언론매체에게 영화만큼 매력적이고 상시 공급 가능한 콘텐츠도 드물 것이다. 매체 규모에 따라 영화전문 기자가 있는가 하면, 문화부에서 다루기도 하고, 또 더러는 연예기자가 영화를 담당하기도 한다. 매체 성격상, 사실전달에 비중을 두다보니, 기자 개인의 의견과 사고가 개입될 여지가 줄어들기 마련이고 깊이 있는 기사를 생산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다. 인터넷으로 가면 기사재량권이 조금 더 확대되기는 하나, 2007년 초 뉴시스의 김용호기자 사태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전달과 사적의견 개진 사이의 불균형으로 인해 품질 떨어지는 기사를 발견하게 되기 일쑤다. 이런 환경에서 거창하게 영화판을 헤집어보고 한국영화산업의 미래를 논할 여력이 없음은 자명한 일일 테다. 게다가 개별 영화로 대상을 좁히더라도, 매체 또는 기자의 선택권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관련 매체의 기자들 역시 영화산업 자장 안에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거대 제작사와 배급사들이 영화매체와의 친분을 통해 우호적 기사를 유도하거나 혹은 길들이기를 해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터넷 매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화전문지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 광고지면이 늘어나면서부터 제작 또는 배급집단과 결별할 수 있는 기회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애초부터 상대가 되질 않는 싸움이었다. 매체와 제작이 나란히 가는 것이 굳이 나쁠 것만도 없고 영화매체가 영화와 싸울 일이 뭐가 있겠냐마는, 문제는 최소한의 비판적 담론조차 허용하지 않는 현실에 있다. 2007년 [디워]와 관련한 쇼박스의 <필름 2.0> 광고 철회라는 더러운 작태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준다. 인터넷 매체로 눈을 돌리면 상황은 아예 비참할 지경이다. 몇몇 거대 포털 사이트를 제외하고는 돈 대신 대물변제 형태의 지급조건으로 광고를 받는 경우도 허다하거니와, 자기네 영화에 대해 비판적기사가 올려질라치면 부리나케 전화를 걸어 수정요구를 하기 일쑤다. 이처럼 비판적 기사를 쓸 수 없는 환경 하에서 건강한 영화담론이 생겨날 리 만무하다. 때문에 제 아무리 쓰레기 같은 영화라도 어떻게든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것이 기자의 능력이고 임무요 사명감이다. 급기야 “한국영화 망하는 꼴 보려고 작정한 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기자의 의무가 된 형국이라 하겠다. 때문인지 한국영화가 힘들다고 하면 기자들은 사심 없이 응원의 기사를 써주곤 했다. 따져보는 것은 나중 일이고 일단 죽어가는 놈 살려놓고 보자는 심정이었을 게다. 자의반 타의반이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생각해보자. 언론매체가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던 한국영화위기와 부활의 사이클, 그러니까 오늘 방금 전까지 곧 죽을 것 같던 한국영화가 몇 편의 선전에 힘입어 부활의 전주곡을 울린 후, 다시 몇 편의 블록버스터가 흥행을 주도하며 쌍끌이 작전에 돌입하여 거둔 한국영화의 부활이라는 장엄하고도 감동적인 이야기, 는 더 이상 재미있지 않다. 진부하다 못해 바닥패가 보이는 글로는 더 이상 한국영화 구하기에 나설 수 없다는 얘기다.

나는 한국영화산업의 위기론자들의 머릿속에 상업 장편영화만이 들어있다고 비판해왔다. 언론매체 역시 이들의 논리에 대한 고민 없이 관객에게 전달해왔다. 각 매체의 개봉작 소개는 블록버스터이거나 스타가 출연한 영화거나 아니면 스타 감독의 영화 위주로 이루어졌으며, 화제작, 문제작, 기대작이라는 단어는 스크린 숫자 앞에서 무용지물이었으니, 독립영화나 소자본 영화, 단관 개봉영화들은 관객에게 알릴 기회조차 박탈당하기 일쑤였다. 게다가 거대제작사와 배급, 홍보사가 일치단결하여 십자포화처럼 쏟아 붓는 보도 자료와 물량공세에 굴복한 많은 언론들은 앵무새처럼 읊어대곤 했다. 이처럼 대형상업영화 위주의 보도관행과 밀어주기성 기사는 기어이 ‘좋은 영화는 반드시 관객이 알아본다.’(그러나 속뜻은 흥행영화가 좋은 영화라)는 해괴한 논리를 낳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언론매체들은, 흥행대박을 주도하며 스크린의 독과점과 관객의 관람권리 박탈을 자행해온 영화자본의 시녀가 되어, 이들이 자생력이 취약한 영화시장을 거점 삼아 한국영화산업의 기형적 성장을 주도할 수 있도록 안전판이 되어준 셈이다.

독립영화인들의 숙원이 전용관 인디스페이스가 지난해 11월 개관했다. 이전과 비교하자면 셋방살이 설움에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으니 더 바랄게 없겠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독립영화는 매체보도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매체기사의 95%이상은 장편상업영화와 관련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양수리 종합촬영소가 파리를 날리는 시간에도 도심 어느 골목에선가 독립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이도 있을 것이다. 작고 볼품없어 눈에 띄지 않을 뿐, 게다가 돈이 없으니 내세워 알리지 못할 뿐, 꿈틀대는 열정과 결기로 치자면 상업 장편에 뒤질 리가 있겠나. 그런데도, 평일저녁 6시 즈음이 되면 인터넷매체의 연예 면은 시사회에 참석한 여배우의 짧은 스커트와 등 파진 드레스 사진으로 도배된다. 그 많은 면을 꼭 모든 매체가 같은 사진과 내용으로 채우는 비생산적인 행위의 끝은 어디일까.

그럼 뭘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요컨대 솔직하게 보고 느낀 대로 쓰자는 얘기다. 한국영화계가 어려운 것이 진정 안타까워 되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이라면, 그럴 수 록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무조건 한국영화를 많이 보면 한국영화가 살아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에서 뛰쳐나오라는 말이다. 좋은 영화는 아낌없이 칭찬해주고 수준미달인 영화는 그에 맞는 평가를 해주면 된다. 다만 칭찬과 비판 어느 쪽이건 해당영화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글로써 전달할 수 있다면, 비판이라고 무조건 거북하게 여길 감독과 제작자는 없으리라. 또한 무턱대고 독립영화를 좋아해주자는 말도 아니요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얘기도 아니다. 단지 예비관객에게 존재를 알릴 기회를, 영화에 대한 피드백을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알림의 장을 열어주자는 것이다. 덧붙여 언론과 영화평론가집단을 구분지어 생각하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다. 다시 말해 영화기자나 평론가나 모두 영화전문가 혹은 비평가로 뭉뚱그려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론이 평단과는 달리 관객의 마음을 읽어낸다는 아전인수식 기사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언론이 평단의 역할까지 해왔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아니던가.

광고의 핵심은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 상품을 구매하도록 소비자를 부추기는 것에 있다. 남이 모두 가진 제품을 가지지 못했을 때 느끼는 결핍은, 가진 자들과 섞일 수 없으리라는 소외불안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소비자의 심리를 이용하여 그 틈을 파고드는 것이 광고의 속성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이가 본 영화를 자신만 보지 못했을 때의 느끼는 소외감, 그것을 본 자들과의 대화에서 소외되리라고 느끼는 불안감을 촉진시키는 것이 영화홍보 전략의 중요한 키워드라면, 언론까지 나서서 동조하여 붐을 일으켜주고 장단에 춤출 이유가 없다. 언론매체는 영화의 개봉사실과 영화에 대한 평을 솔직하게 전달하면 그만이다. 되도 않는 이슈 따위까지 친절하게 기사화함으로써 홍보도우미로 전락해버린 일부 매체와 질 낮은 기자야 말로 한국영화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이제부터라도 하나씩 고쳐나가야 한다. 한국영화에 상업 장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관객에게 알려주어야 하며, 그것들에서 지금껏 한국영화산업의 무수한 인재가 배출되었음을 언급해주어야 한다. 상업영화든 독립영화든 좋은 영화가 많은 관객과 만날 기회를 고루 제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객이 영화를 고를 수 있도록, 언론이 중심을 지켜야 한다. 적어도 언론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배급, 홍보사의 나팔수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직하게 쓰고 홍보성 기사와 일정거리를 유지함과 동시에 영화의 선택권을 관객에게 돌려주자. 선입견 없이 온전히 자유롭게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게 만드는 풍토만 언론이 조성해주어도 한국영화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건강해질 것이다. 모름지기 언론이 당연히 맡아야 할 중차대한 역할이 있는데, 왜 그것을 포기하고 애써 독배를 받으려하는가.



(추신) 속된 말로 “일이 점점 커지고”있다. 당초 2편에 나누어 끝내려고 했던 것부터가 착오였다. 손을 대면 댈 수 록 많은 분야가 튀어나온다. 어쩔 수 없이 뿌리 뽑기로 했다. 이제는 3편에서 끝이 난다는 보장을 못하겠다. 어느 개그맨 말대로 “그래! 가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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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tjryu.tistory.com BlogIcon 목운  수정/삭제  댓글쓰기

    돈독이 오른 우리 언론에 희망은 없다고 봅니다. 좋은 포스팅 잘 읽었습니다.

    2008.02.25 17:2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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