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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건영

월드컵 열기가 채가시지 않았던 2002년 8월, 한국문학과 문학비평계는 젊은 비평가집단이 쏘아올린 ‘주례사비평’이라는 십자포화를 맞는다. 이명원, 고명철, 홍기돈 등의 1970년 생 문학평론가들이 중심이 된 이들은, 「오늘날 문학과 비평이 처해 있는 위기적 상황을 환기시키는 은유를 통해 이를 대체할 희망의 은유를 찾는 것이 비평 현실」이라는 발문이 담긴 『주례사비평을 넘어서』를 발간해낸다. 이 책에서는 이제껏 대중에게 사랑받아온 베스트셀러작가들-신경숙, 전경린, 은희경-의 소설이 무참히 발가벗겨지며 정과리와 김형중 등 평론가에 대한 비판도 발견된다.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한국문학계의 고질적 병폐인 주례사비평과 문학의 위기가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소리는 여전하다.

한국영화의 위기타계를 위한 많은 제언들이 있었다. 제작자와 감독과 스탭을 위시한 영화인들은 위기 극복을 위해 고통분담을 자처하고 나섰고 영화잡지들은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한국영화계의 위기를 진단하고 개선책을 내놓곤 했다. 이에 뒤질세라 영화학자와 평론가들의 제언도 잇달았다. 비록 어제 오늘 일이 아니기에 식상한 것도 있으나 저마다 분석의 잣대와 도출된 결론은 유사했다. 이는 현 상황에 대한 원인을 누구나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해법조차도 공유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일련의 글과 기획물을 읽으면서 여전히 의문스러웠던 것은, 유독 평단만이 책임에서 자유롭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영화계가 처한 위기상황과 영화평론가를 비롯해 영화비평을 직업으로 하는 이들은 무관한 것일까? 이미 틈날 때마다 현장비평가들의 역할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해왔으므로 새삼스러울 것은 없을지라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이번 글과 관련해 한번 쯤 맥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註: 본고에 표기된 ‘평단’의 범위는 학자인 영화평론가를 비롯한 현장비평가와 영화학자 등을 아우르되, 언론매체의 영화담당 기자는 제외한다)

주지하다시피 제작자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꼽은 한국영화 위기의 요인 중 하나는 콘텐츠 부족이다. 즉, 작품성과 상업성 공히 관객을 사로잡을 만한 이야깃거리가 고갈되었다는 것이다. 역으로 되물어보자. 고갈된 것인가, 고사(枯死)시켜버린 것인가. 수지타산을 우선시하는 제작자는 그렇다 하더라도 기획의도가 뻔하고 완성도 또한 민망스러울 지경인 영화 앞에서 영화평론가들은 무엇을 하였을까? 그렇지, 매체의 입장이 난처하지 않을 범위 내에서 20자 평을 내밀고는 박한 별점을 주었을 게다. 아니면 입을 꾹 다문 채 무언의 의사표시를 했거나. 임무 끝? 근래 언론매체를 막론하고 한국영화에 대한 매섭고 서슬 퍼런 비판이 있었던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삼류로 단정 지어진 영화는 아예 논박의 기회조차 얻을 수 없는 현실, 몇몇 매체의 전문가가 극찬하면 깃발아래 모여든 일본관광객들 마냥 한 줄로 도열하는 비평의 획일성이 오늘 현장비평의 현실이다. 서열이 엄연한 한국사회에서 동료나 선배나 스승에 대한 지나친 비판은 금기로 여겨져 왔다. 영화전문지에서 논쟁다운 논쟁을 찾아보기 힘든 것도, 매체 안에서 벌어진 동업자끼리의 논박이라 봐야 짜고 치는 고스톱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돌이켜 보면 1995년 김성수 감독의 [런어웨이]를 놓고 당시 <씨네21>의 주평이었던 이정하와 이현승 감독이 벌인 논쟁은 적벽대전을 방불케 했었으니 비록 이정하가 절필선언을 하면서 일단락되었고 좋은 비평가를 잃기는 하였으나, 그만큼 비평의 소중한 가치와 역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김기덕의 영화를 놓고 강성률과 심영섭이 벌인 논쟁은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아슬아슬함 속에서 수차례 진행되었는데, 이 사건은 강성률이라는 신예 평론가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나 이 마저도 옛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을 따름이다.

영화비평은 그 대상이 둘로 나뉜다. 도식적 구분을 하자면 영화를 '이론적 학문적으로 연구하려는 사람' 과 영화를 '소비하기 위한 좀 더 나은 지침을 얻고자 하는 사람' 들로 나뉜다는 말이다. 이때, 비평가(지)의 역할은 수신자를 분명하게 정하고 대상에 맞는 내용으로 수신인과 소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언어는 허공을 떠돌다가 끝내 수취인 불명이 되어 돌아오고 만다. 죄 없는 네티즌과 아마추어의 글을 비교대상으로 놓고 진군나팔 울려봐야 마스터베이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관객과 영화평론가 사이에 간극이 크다는 얘기가 들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죽하면 황진미가 20자 평에서 “평론가가 호평한 영화는 재미없다는 편견을 버려!”라고 썼을까.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고 상호 오해가 겹겹이 쌓여 있는 형국이다. 이런 이야기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정설로 굳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사실은 좋은 영화를 호평한 평론가를 관객이 욕하는 법은 없다는 점이다. 정말 문제는 수준 이하의 영화에도 갖은 의미를 부여하면서 중간점을 주는 사례가 비일비재해졌다는 것이다.




인터넷 공간에서의 영화담론 생성과 확대재생산, 유통과정을 냉정하게 살펴보자. 사이버공간에서 기정사실화된 현상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인터넷을 뒤지면 어떤 영화라도 제작단계에서 시사회까지 모든 정보가 섭렵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도 없는 일이다. 게다가 1인 미디어시대가 도래하면서 거의 모든 관객이 리뷰어가 되어버렸다. 전문가 못 지 않은 아마추어가 널렸으며 나름의 발 빠른 소통과 친화력으로 영화흥행의 태풍의 눈이 된지 오래다.」


정말로 그럴까? 얼핏 들으면 맞는 소리 같으나 사실은 착시현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 동호회를 중심으로 만들어지던 생산적인 인터넷 영화담론은 1인 미디어시대에 접어들면서 개인적이고 지나치게 소비적으로 변질되었다. 정보량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질적 향상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내부 소통기능의 향상과 네트워크 환경의 변화로 인해 많은 이들이 얼기설기 엮여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만 이 마저도 철저히 개인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다는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현상의 중심 실체가 모호한 반면 네티즌의 힘을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 확대 가공한 후 재생산시키는 실체는 명확하다는 사실이다. 때문인지 네티즌의 힘을 끌어들이고 각색하여 정기적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주체들은 “네티즌의 힘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일각에서는 ‘네티즌에게도 보도 자료를 허하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블로거의 이름으로 세미나 또는 컨퍼런스가 개최되는 일은 새롭지도 않을 뿐더러 곧 ‘블로거 영화제’도 열린다. 유념해야 할 것은 저마다 행정기관의 지원을 앞세우지만 결국 기획과 진행의 공과는 개별기업과 이익집단들에게 귀속된다는 점이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공공의 이익이 아닌 사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경제활동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만 놓고 보더라도 네티즌의 힘이 영화판을 좌지우지할 정도가 되긴 멀었다고 보여 진다. 아직 태풍의 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평론가의 존재감이 약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다수의 네티즌이 평단을 불신하고 혐오한다거나 블로고스피어(Blogosphere)의 마음을 얻어지 않고서는 흥행할 수 없다는 주장 또한 근거가 희박하다. 다만, 영화와 관련된 모든 현상에 네티즌을 결부시키려는 언론의 강박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유령이 도처에 출몰하는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혼돈의 시절에 평론가집단이 역할을 극대화하면서 위상변화를 이룰 수 있느냐이다. 현실만 놓고 보면 영화평론가들의 위기가 극에 달한 것은 사실이다. 원고료는 바닥이고 지면은 좁아지고, 그나마 강단에 서거나 영화제 일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힘든 현실이다. 평론가의 글을 관객이 신뢰하지 않아서일까? 그보다는 요동치며 변화하는 영화담론의 소용돌이 앞에 소신과 배짱을 갖고 대처하기 보다는 허상에 휘둘리며 인터넷 담론을 지나치게 과소 혹은 과대평가함으로써 자기발등 찍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제까지는 영화비평의 입지 약화를 세상이 가벼워진 탓으로 돌렸더라도, 깊이 있는 글을 읽지 않는 세태 탓으로 돌렸더라도 좋다. 하지만 평단도 변해야 산다. 이전까지 소극적이고 관망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영화계에 조언해야 한다. 평론가들이 의식적으로 피하고 외면하고 무시하는 동안, 언론과 영화계는 네티즌을 ‘산도 움직일 수 있는 믿음’ 가득한 전사로 키워놓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수 천 년 역사를 가진 문학이 불과 113년 역사의 영화에게 밀려난 이유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바로 영화가 단 기간에 대중을 매혹시킨 요인이자 문학이 몰락한 이유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간극을 매우지 못해서 이다. 그 간극을 영민하게 매워냄으로 인해서 문자의 난독성을 영상으로 풀어냈기에 영화는 20세기 중반이후 문화예술의 총아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대중이 원하는 비평은 고색창연한 영화사를 들먹이며 지적 만용을 뽐내는 글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값싼 타블로이드 북에나 실릴 법한 선정적이고 얕은 수준의 비평은 더더욱 아니다.

한국 영화평론계도 세대교체의 조짐이 보인다. 하필, 한국영화위기론이 최고조에 달한 최근 몇 년 사이 대표적인 평론가들이 하나 둘씩 직함을 안고는 글쓰기에 뜸해져 버렸다. 본인과 후배들을 위해 환영할 일이고 또 당연한 일일 테지만, 문제는 빈 자리를 메울 신예평론가들의 역량이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는 점이다. 경력이 일천하니 안목이 달리고 안목이 달리니 관점이 불분명하다. 게다가 글쓰기마저 유려하지 못해 읽는 이가 힘들 지경인 글도 부지기수이다. 결국 독자의 마음을 얻기보다는 지면 채우기 급급한 글이 넘쳐나는 것도 이런 때문이다. 예컨대, 생산적인 것은 고사하고 1회용 용기가 되어버리는 비평이 난무한 것도 어찌 보면 비평현실이 아닌 비평가의 위기감과 맞닿아 있다. 스스로 제 발등을 찍어버리고는 언 발에 오줌 누기 식으로 엉뚱한 곳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지경이다. 이것을 두고 영화비평이 죽었다고 말하거나 비평의 역할이 사라졌다고 보아서는 곤란하다. 본질은 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냉정하게 파악하자면, 위기의 대상은 영화비평이 아니라 영화평론가들이다. 학문적 위기가 아니라 경제적 위기인 지도 모른다. 네티즌 리뷰어가 창궐하고 영화기자가 난무하는 현실이 무슨 문제인가. 어차피 평론가는 그들보다 나은 안목을 무기삼아 글로 승부하면 될 것인데. 분명 충분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외적 요인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한국영화계의 위기를 논함에 있어 제작자와 감독은 물론이요 그 책임을 관객에게까지 전가시키는 와중에도(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이 20만을 채 넘지 못한 채 소멸된 데 대한 원인분석을 보라) 눈에 띄는 것은, 평단의 역할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평론가들 역시 한국영화와 동고동락하면서 영화를 매개로 종사하는 이들이라는 점에서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도 되는 양 이들을 향한 날선 비판의 목소리가 실종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기야 감히 어느 감독과 제작자가 평단을 향해 쓴 소리를 뱉는다는 말인가! 앞선 글에서 말했듯이 영화제작 관행과 무수한 구태를 고쳐야 한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한국영화의 위기가 어디 감독과 제작자, 극장주의 책임만이겠으며, 어찌 거장의 농익은 영화세계를 미처 간파하지 못한 철없는 관객에게 있다는 말인가. 때문에 한국영화계의 위기를 제작, 상영집단의 책임만이라고 몰아붙일 자격이 평단에게 있는지도 자문해봐야 한다.

무릇 평론가의 역할이란, 좋은 영화를 소개하고 꼼꼼하게 읽어주는 것은 물론이요 자칫 놓치고 지나가 사장되어버릴 영화를 찾아내어 재평가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그간 평단 나름대로 좋은 영화와 재능 있는 감독을 발굴하는 등의 역할을 수행해왔음에도 여전히 부족하거니와, 이러한 논의가 차고 넘칠 수 록 한국영화를 튼실하게 만드는데 기여하게 될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한 후 합심하여 지혜롭게 대처해나가려는 의지이다. 좋은 품질로 한국영화의 자생력을 키워나가기 위해 영화와 관계하는 모든 집단의 힘이 합쳐져야 함은 물론이다. 이럴 때일 수 록 평론가집단이 중심을 잡고 자기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관객에게 좋은 영화를 판단하는 눈을 키워주고 나아가 영화제작과 관련한 모든 이들에게 조언과 발전적 비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일조하는 것이야말로 비평가의 역할이요 평단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한국영화의 위기, 그 종착점에 이르러 평론가집단에게 바로 이 기능의 올바른 수행을 바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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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moonworx.egloos.com/ BlogIcon moonworx  수정/삭제  댓글쓰기

    영화 비평이 스스로의 중심을 잡고, 관객들도 비평에 열린 자세를 보여 영화에 관한 좋은 대화가 오갈 수 있길 바랍니다.

    2008.03.26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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