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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9



어떤 영화는 멀미가 날듯한 현란함을 안겨주지만 어떤 영화는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답답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내겐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라는 영화가 그랬다. 인물들의 행동은 지리멸렬하고 뭔가 그럴싸한 사건도 없다. 후반부에 대형사건이 하나 터지기는 하는데 이것 역시 뭔가 드라마틱한 복선과 암시를 바탕으로 발생되는 일이 아닌지라 그다지 강한 폭발력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러다 보니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흔히 청춘 영화라 하면 연상될법한 경쾌하고 발랄한 음악이나 미소년 미소녀들의 각양각색 연애담과 저만치 거리를 두고 있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며 느낀 답답함의 근원지는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들이 보여주었던 알록달록한 총천연빛의 젊음에 길들여진 나 자신의 취향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늘 그랬듯 당장 나가서 연애를 하든 공부를 하든 뭐라도 해야 될 녀석들이 그 자리서만 머뭇거리고 있으니 답답증이 밀려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뜬구름처럼 주위를 맴돌면서도 절대로 잡히지 않는 낭만과 환상의 당의정을 걷어내면 남루한 현실이 그 본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파릇한 젊은이들이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다. 따지고 보면 쾌속정처럼 거침 없이 질주하는 인생이란 거의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시원스레 풀리는 것 하나 없이 지루하고도 답답하게 흘러가는 것이니까. 물론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뻔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또 다시 같은 이야기를 해야 한다. 너무도 당연해서 되려 잊기 쉬운 사실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기 위해서, 그리고 막연히 좋았었다 여겨지는 시절에의 향수에 대책 없이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걱정거리 하나 없이 마냥 즐거웠을 것만 같았던 시절에도 삶의 무게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좀 더 나이를 먹는다 해도 마찬가지다.

저 앞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작품이 굳이 성장영화로만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하였던 양해훈 감독의 말도 충분히 이해된다.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가 보여주는 것은 젊은 날의 한 때이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화두는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를 걷고 있는 제휘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다른 한쪽에선 그를 괴롭히는 패거리들이 경멸 어린 눈빛으로 제휘를 관찰하는 중이다. 과연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저수지를 건널 것인가 아니면 패거리들의 괴롭힘을 쭈욱 감수해 나갈 것인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얼음판 위를 종종걸음 치는 제휘의 모습은 그 자체로 삶의 불안함에 대한 은유를 담고 있다.


제휘가 저수지를 건널 때까지 발 밑의 얼음판이 깨지지 않고 버텨줄 거란 확신은 없다. 또 저수지를 건너면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표가 제대로 이행할지도 의문이다. 한번쯤 도박하는 심정으로 저수지를 내달려 볼 수도 있었고 좀더 용기를 내서 자신을 괴롭히는 표에게 대항해볼 수도 있었던 제휘는 결국 발만 동동 구르다 제자리로 돌아와 버린다. 용기도, 객기도 그 무엇 하나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제 풀에 지쳐 넘어간 자의 초라한 현실만이 화면 위에 던져지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한살이라도 젊을 때, 과감하게 부딪히고 도전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젊다 해서 고통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발 밑의 얼음이 깨져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하였다. 막상 부딪혀 보면 별 것 아닌 일들인데도 그 직전의 불안감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제휘가 표에게 느끼는 두려움이란 게 그렇다. 표가 휘두른 폭력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는 영화 속에서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인상을 찡그리거나 주먹만 들어올려도 지레짐작 겁을 먹는 제휘의 모습을 통해 그 둘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알고 보면 표의 싸움실력이 예상보다 신통치 못할 수도 있고 저수지의 얼음이 의외로 단단해서 일개 중대급 병력이 구보를 해도 멀쩡할 수도 있다.


 


흔히들 하는 말로 까짓 거 인생 뭐 있나. 그냥 포기하고 적당히 맞춰주며 살거나 한번 화끈하게 부딪히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는 거다. 그런데도 제휘는 왜 이리 답답하게 구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청춘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겠지만 그 시간들을 채우고 있는 것은 연이어 발생하는 사건 사고들이 아니다. 되려 사건과 사건 사이의 기나긴 정적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알지 못하기에 불안해하고 불안하기에 망설이던 날들의 연속. 중요한 건 어렵게나마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고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그 직전까지의 지루한 순간들을 그야말로 건조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영화라는 매체가 보여주는 건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빛이 새들어오지 않도록 창문을 틀어 막고 수준이 맞지 않아서 친구도 사귀지 않았다는 제휘의 답답한 일상도 한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한없이 정체되었다고 여겨지는 와중에도 삶은 끊임 없이 전진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확실한 진실일 터. 언젠가 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청춘은 푸르른 봄이 아니라 차디찬 겨울이라고. 그러나 겨울이라 하더라도 나름대로 운치 있는 그런 겨울이 아닐까 싶다. 제휘가 조심스레 내딛는 발걸음도 알고 보면 마냥 위험한 것만은 아니다. 장희와의 만남처럼 그것은 때때로 마법과도 같은 순간을 선사해주기도 한다.


물론 그 반대의 상황도 있다. 얼음덩어리가 깨지듯 불안한 일상이 마침내 균열을 일으키게 되는 그 때. 허나 미리 말했듯 불안과 두려움 너머에 자리한 실체란 의외로 작은 경우가 허다하다. 이 또한 어떤 식으로든 앞으로 나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제휘는 엉겁결에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짱돌을 날리지만 걱정했던 것만큼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사건은 비밀에 묻히고 금새라도 갈라질 듯 했던 얼음은 여전히 단단하게 발 밑을 지탱하고 있다. 그제서야 제휘는 마음 놓고 저수지 위를 내달린다. 먼저 선빵부터 날리고 볼일 이라는 것을, 또 저수지가 절대 깨지지 않을 거란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답답하게만 흘러가던 젊은 날의 한 때도 조금은 편안해질 수 있었을까?

좀 더 과감하게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을까? 글쎄. 어차피 한고비를 넘어서면 다른 고비가 찾아올 것이고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닌 난관 앞에서 또 다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닫힌 창문을 열고 마법처럼 공간을 이동해 간 제휘도 일상의 압박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현실은 여전히 살얼음판처럼 불안하게 유지된다. 그 앞에서 젊음을 화려한 미사여구로 마냥 아름답게만 포장할 수 없는 법이다. 청춘은 봄이 아니다. 봄에 꾸는 꿈도 아니다. 그저 봄을 그리며 꾸는 꿈일 뿐. 그 지리하고 반복적인 시간 속에서 소년들은 조금씩 조금씩 전진해 나간다. 쿵, 쿵, 쿵 소리를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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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in  수정/삭제  댓글쓰기

    심도있는 리뷰 감사합니다.<저수지에서 건진 치타> 공식 블로그에 퍼갈께요^^

    2007.09.06 13:32
  2. Favicon of https://neoimages.tistory.com BlogIcon woodyh98  수정/삭제  댓글쓰기

    min님/ 운영자 입니다.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07.09.06 15:29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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