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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에 따른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목구멍이 타들어간다. 입이 바싹바싹 마른다. 손에 땀이 줄줄 흐른다. 성적표를 기다리는 고등학교 수험생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상영 시간에 늦을까봐 마음 졸이는 처량한 영화애호가의 이야기다.

3일 저녁, 오후 일곱 시 정각에 출발한 버스는 좀체 앞으로 나아갈 줄 몰랐다. 6일까지 징검다리마냥 놓여있는 휴일 아닌 휴일에 지방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많아져서일까, 버스는 서울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정차에 정차를 거듭한다. 저녁이 깊어만 갈수록 타는 듯한 긴장감은 속력을 늦출 줄 모른다.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미리 도착한 친구들의 문자와 전화가 줄을 이룬다. “너 어디야? 영화 시작하기 직전이야!”, “나도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논산을 아까 지났어.”, “이래가지고 너 정시에 도착할 수 있겠어?”, 조금 망설인 나의 횡설수설한 대답, “내가 정시에 도착할 수 있다면 조지 로메로에게 혼이라도 팔겠어!”

잠시 숨을 가라앉히고 식상한 이야기를 꺼내보자. 전작의 파격과 성공에 대한 기대치는 언제나 후작에 영향을 준다는 정석은 이 세상 어떤 감독이라도 피해갈 수 없는 절대 진리다. 조지 로메로의 신작과 윌리엄 프레드킨의 신작을 같은 공간에서 같은 날에 볼 수 있다는 것은 호러영화의 골수팬들, 그리고 나에게 엄청난 전율을 선사하기에 마땅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을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은 두 전작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엑소시스트>를 망라하는 (꽤 오래된) 후작을 감상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 누구라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기차는 달리고 버스는 날랐다. 전주 톨게이트를 지나기 한참 전부터 졸린 눈을 부릅뜨고 두 손에 짐을 꼭 쥔 채 버스에서 내려 뛰어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가까스로’ 정시에 도착해 친구가 발권해준 티켓을 받아들고 상영관으로 축지법을 구사하듯 뛰어 들어갔다. 로메로와 프레드킨의 '시간적 조우'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위하여.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3.47배 뒤떨어진,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일기>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이야기하기 전에, <살아있는 빵들의 밤>이라는 패러디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아마도 조지 로메로에 향수를 묻고 지내는 서정적 영화팬. <빵들의 밤>이라는 저예산 패러디 영화가 돌발 상영되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던 가장 큰 이유는 로메로의 원작 때문이라는 것, 이 정도는 물론 기본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0년 전 좀비영화의 획을 제법 굵직하게 그어주신 우리의 대부 조지 로메로의 대표작 중 대표작이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오마주를 바친 수많은 공포영화들을 열거하기조차 힘든 만큼 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입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만큼 실망도 큰 법. 세상과 '너무' 타협하신 로메로의 신작 <시체들의 일기> 되시겠다.

<시체들의 일기>는 기본 모토를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두고 있다. 다만 <시체들의 일기>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비해 너무 편해졌다는 것이다. <블레어 위치>를 연상케 하는 초반부와 중반부는 관객들을 좀 더 편안한 좀비의 세계로 인도하기에 적합하다. 핸드 헬드와 정형 컷을 오가는 영화의 미장센은 불쾌함, 혹은 메스꺼움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촘촘히 짜여 있다. <시체들의 일기>는 적재적소에서 치고 빠지는 로메로의 유머가 여전히 존재하는 영화다.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서 좀비를 묘사하기 위해 풀 샷과 미들 샷을 번갈아 썼다면 <시체들의 일기>에서 그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쓸데없는 클로즈업을 남발하지 않는다. 죽어가는 사람의 가족과 형제를 피하지 않고 설정해 인간적인 살인을 구사하는 연출력도 여전하다. 그러나 <시체들의 밤>은 앞서 말한 대로 외부와의 공유를 너무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싶어 한다. 재밌는 것 하나, 이 영화에는 정치적 의미의 '반전 시위'를 촉구하는 메세지가 포함되어있다. 인간과 기계, 혹은 인간과 세균간의 학살이 넘쳐나고 그 속에서 인류가 인류를 죽여야만 하는 슬픈 서정의 드라마가 종종 눈에 들어온다. 영화 속 작위적 드라마는 로메로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있어 당연히 술술 넘어가는 영화적 장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을 처음 만나 숨죽이고 스크린에 집중하던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비극 중 비극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위는 낮아졌고 메세지는 너무 넘쳐난다. 노장의 욕심일까. 각종 미디어의 오버랩은 결국 영화를 망치는 지름길로 작용한다. 인류애적인 관점에서 영원한 평화를 꾀하는 것이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좀비영화는 이런 것이 아니잖은가.



<버그>로 돌아온 '나이 드신' 윌리엄 프레드킨

이제 두 번째 불평을 해보자. <엑소시스트>의 공포는 로메로의 좀비 영화와 전혀 다른 입장을 고수하며 호러 팬들의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다. <엑소시스트> 또한 수많은 후작을 낳으며 승승장구했던 종교색채를 가득 담은 호러 중의 호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쯤 되면 당신은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2008년 현재, 로메로와 프레드킨을 쌍벽을 이루며 급격하게 떨어지는 나이 겨루기를 몸소 체험하고 계시니 어찌 아니 슬플 수 있겠는가.

<버그>는 결코 실존하는 벌레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의 모토로 존재하는 ‘벌레’는 인간이 만들어낸 편집증적 시각을 기반으로 한 환상에 불과하다. 두 남녀는 이런 강박관념에서 만나 서로에 대한 믿음과 연민의 벽을 쌓아가면서 결국 ‘세상의 끝’을 보고 만다. 그들이 삶과 과거의 아픔에 대한 압박감을 통해 이룩해내는 최악의 경지는 실로 경이롭다. 두 남녀는 자신들이 뿜어낼 수 있는 최상의 소재가 과거를 기억해내는 것이라 생각하고, 바로 여기서 잘못된 잣대를 이용해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이것은 분명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전선에서의 창작 행위이며, 또한 그로 인해 인간은 세계 전쟁보다 더 거대한 ‘스스로의’ 파멸을 맞는다. 평범한 미색 일상에서 날이 시퍼렇게 서 앞뒤를 판가름 할 수 없는 총천연색 일상으로 삶이 전환될 때,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불안하기만 하다.

하지만 불만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존 카펜더처럼 프레드킨은 극적이고 위험한 수위 분출을 통해 ‘종말’을 예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버그>는 실험이 아닌 안정적인 연출을 택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통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대변하려는 남자의 입은 결국 변명 아닌 변명을 낳게 된다. 남자와 여자가 공유하는 것이 과거라면, 굳이 그들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아도 날카로운 소음을 내고도 모자랄 것이 없었으련만 남녀는 절대 과거에서 벗어나 상황을 바라보지 않는다. 영화는 연극에 기반으로 한 원작을 토대로 촬영되었다. 연극에 뿌리를 둔 많은 영화들이 상황연출에 중점을 두었던 것처럼 <버그> 또한 영화 자체가 연극을 바탕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그 곳에서 발전하지 못한다. 연극적 미장센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서 남는 것은 배우들의 신랄한 연기와 제대로 발현되지 못한 핏빛 결말일 뿐이다.



이런 게 바로 ‘심야상영’이다, 폴 앤드류 윌리엄스의 <오두막>

첫 번째, 두 번째를 지나 심야 상영, 특히나 ‘호러의 밤’에서 꽃 중에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단연 말미를 장식할 세 번째 작품이다. 나의 슬래셔 무비에 대한 갈증은 벌써 4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2004년 당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했던 <카니발! 뮤지컬>을 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는 마음껏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으며 소리쳤다. “슬래셔 무비란 바로 이런 것이지!” 그로부터 4년이 지나도록 나는 정통 슬래셔는 고사하고 매년 몇 차례씩 있는 공포영화 심야 상영에서도 쓴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러니 DVD로 조차 구하기 힘든 <카니발! 뮤지컬>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두 말 하면 입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다시 2008년으로 돌아와서 지친 몸을 이끌고 눈을 부릅떠 심야상영을 강행했을 때, 나는 ‘불면의 밤’ 섹션의 마지막 상영이 핏빛 낭자하나 웃음을 잃지 않는 펑키 호러무비이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체력이 남아있는 한, 웃기 위해 기도라도 해야 했었다. 내가 피를 말려가며 공포 영화 한 편을 위해 ‘매혈기’를 쓰고 있던 바로 이 시간, 마지막 상영의 기대는 실패했을까? 다행스럽게도 나는 구원을 받았다.

<오두막>은 제목부터 날이 서린 히치콕을 연상케 하는 코믹 슬래셔 무비다. 모두가 웃고 떠들어야 할 본질을 ‘영화’에서 찾는다면, 썩 잘 들어맞을 정도로 <오두막>은 재치가 넘친다. 덜 떨어진 등장인물들의 행위를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장담컨대 관객을 제법 만족시킬 정도로 ‘사람 썰기’를 강행했던 영화의 미장센은 연달은 상영으로 지친 분위기를 마음껏 띄워주고도 남았으리라. <오두막>의 재미가 중반을 넘어서도 급감하지 않는 이유는 ‘주인공은 다치지 않아’의 법칙을 말끔하게 도려내기 때문이다. 어리버리한 주인공들 중 멀쩡한 신체를 가지고 뜀박질을 해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들은 신체 일부가 잘려나감에도 불구하고 불타는 투지로 살인마를 잠재우기 위한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지만, ‘사람 죽이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머리가 잘려나가고 팔이 두 동강날 때 관객이 배를 잡고 폭소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노력에 뻔히 보이는 허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원스레 갈라주는 슬래셔 영화를 보면서 웃을 수 있는 축복을 누리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무엇보다 <오두막>은 적재적소에서 사람을 놀래키는 진면목을 발휘하는 힘도 가지고 계시니, 이쯤 되면 나의 넘버 원 슬래셔 무비인 <카니발! 뮤지컬>에 필적할 만도 하다. 잊지 말고 챙겨 넣어야 할 것은 앤디 서키스의 명연기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시간은 다섯 시 반이 훌쩍 넘었다. 지난 밤 혼자 <스피드 레이서>를 찍으며 재빨리 달려올 때 만 육천 원짜리 버스 뒤편을 비춰주던 달빛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눈을 찡그리고, 숨을 죽이고, 배를 잡고 깔깔거리고 나와 보니 해가 어느 샌가 뽀얗게 걸려있는 것이다. 밝아오는 아침을 미적지근한 기분으로 누리며 중얼거린다. ‘나는 비로소 전주에 온 것이로구나!’ 다크 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고 피곤에 졸여진 머리와 마음이 심야상영 무사관람을 마친 나를 압박한다. 그러나 축제는 지금부터가 아닌가! 지친 몸을 추스르고 다시 한 번 눈을 부릅뜬다. 전주의 새벽을 만끽하며, 다섯 시간 뒤에 있을 또 다른 영화를 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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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댓글입니다

    2008.05.05 13:47
  2. 허허...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년이 생각나네요...
    졸음을 못참는 저였지만 불면의 밤 섹션을 보자 왠지 구미가 당겼더랬지요.
    하지만 결국 전 영화 세 편 중 한 편을 본 후엔 내리 고개를 무릎에 쳐박았지요...
    그리고도 피곤에 쩔어 조금이라도 쉴 곳을 찾으며 다음엔 불면의 밤은 보지 않으리... 했었는데 이 글을 읽으니 다시 보고 싶어지는데요? 자학적근성..ㅋㅋ
    잘 읽었습니다^ ^

    2008.05.06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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