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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2


(스포일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악보를 쥐고...

장면 하나. [즐거운 인생]의 중반부. 활화산’의 기타리스트인 기영은 드러머인 혁수를 찾아간다. 혁수는 캐나다에 가족을 보내고 기러기 아빠로 지내고 있다. 어느 날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였고,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떠나려 한다. 기영은 떠나려는 혁수에게 악보를 건넨다.

후반부 장면을 보면, ‘활화산’의 멤버들 모두 이 악보가 쥐고 있다. 그 악보는 대학시절 ‘활화산’ 멤버였던 상우가 남기고 간 유작이다. 곡명은 ‘즐거운 인생’. 20년 만에 재결성된 ‘활화산’의 멤버는 백수 기영, 기러기 아빠 상호, 대리운전자 성욱, 그리고 상우의 빈 자리는 그의 아들인 현준이 채운다. ‘활화산’은 20년 만에 재결성된 락 밴드다.

장면 둘.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와 전편인 [세 친구]에는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비 오는 날 남자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여자에게 찾아간다. [세 친구]에서는 그 여자 아이의 초상화를 가져간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는 그녀를 위해 작곡한 곡의 악보를 건네준다. 하지만 비참하게도, 그림과 악보는 비 오는 아스팔트위에 떨어진다. 떨어진 순수한 첫사랑의 기억처럼, 비 오는 아스팔트위의 종이는 향수가 되어갔다.
두 장면을 놓고 봤을 때,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은 [와이키키브라더스]와 비슷한 이야기인 듯하다.

아니면 떨어진 그 악보를 주워서 새롭게 시작하는 이야기다. 닮은 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과거를 추억하는 것. 과거 음악을 했던 친구들의 손에 악기가 없는 것. 어쩌면 [와이키키브라더스]의 성우([즐거운 인생]의 상우와 이름도 비슷하다.)가 죽은 걸로 가정했을 때, 나머지 친구들이 모여서 [즐거운 인생]을 찍은 것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엄연히 다른 판본의 영화다.


-과거를 불사질러라.

이준익의 영화 [즐거운 인생]의 출발점은 흔들리는 가부장(들)이다. 기영(정진영)은 아침이면 바삐 움직이는 아내의 눈치를 본다. 깨어있지만 잠들은 척하며 딸과 아내가 나가기를 기다린다. 그는 백수다. 혁수(김상호)는 캐나다로 떠난 가족들을 부양하는 기러기 아빠. 성욱(김윤석)는 회사에서 정리해고 당해, 낮에는 택배 일을 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한다. 그의 아내는 아이들의 교육에 온갖 정성을 다 바친다. 그 때문에 성욱의 등골은 나날이 굽어져 가는 듯하다. 세 명의 남자들은 저마다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

아내에게 용돈을 받는 기영이나, 아내가 끓여주는 된장찌개가 그리운 혁수나, 매일 같이 돈 이야기를 하는 아내를 둔 성욱이나, 모두 다 지긋지긋한 현재를 탈피하고 싶어 한다. 문제는 그들이 등에 짊어진 ‘가족부양’과 이 시대의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위신이다. 아버지로서의 위신이 늘 그들의 발목을 잡아왔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만 하게 만들었다. 혹은 그들은 불안해한다. 백수인 기영이 아내와 딸의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는 건, 그 자신이 이 시대의 가장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즐거운 인생]은 가부장의 권위와 위신을 불사지르는 영화다. 이 때 위신이 떨이지는 것이 아니라, 활활 타올라 없어진다. 그건 20년 전 ‘활화산’이 다시 부활하면서 시작된다. 물론 계기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 ‘상우’가 어느 날 주검으로 나타났을 때부터다. 상우의 아들은 아버지가 남기고 간 기타를 태우려고 한다. 이걸 본 기영은 불 속의 기타를 건져낸다. 영화는 이때부터 시작한다. 다행히도 기타는 가방만 불탔지, 가방속의 내용물인 기타는 온전한 상태였다.

이준익은 과거의 것을 태워버린다. 이 때 불타는 건 내용물을 둘러싸고 있는 외피다. 기타 가방만 불타고 기타는 고스란히 남은 것처럼, 이 영화는 386세대가 등에 지고 있던 역사의식과 가부장의 힘겨움을 모두 불살라버린다. 그리고 직입한다. [즐거운 인생]은 점점 자아도취, 무아지경의 영화로 변해간다.

눈치 볼 것도 없으며, 과도한 의무는 피해가도 된다는 약간의 쿨 함이 영화를 가로지른다. 세 친구를 이해한다는 사람들의 시선도 꽤나 옹호적으로 변해간다. 이 때 [즐거운 인생]은 일종의 변화를 꿈꾼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의 외피를 하나 둘 태워버리거나, 타인의 시선을 바꾸어 나간다. 무엇을 불태우는 걸까? 이 영화의 ‘상우’라는 존재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세 친구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 같은 존재며 기억 저편에 위치해 있다.

그를 볼 수 있는 건 영정 사진을 통하거나 84년 대학가요제를 준비하던 ‘활화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통해서 볼 수 있을 뿐이다. 고로 ‘상우’라는 존재는 현재에 있는 우리들에게 가상의 존재이다. 세 친구를 모이게 하는 촉매역할을 하고 있거나, 유령처럼 영정 밖으로 튀어나와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찾으라고 이끌어주는 도우미 같은 존재다.


상우의 죽음 덕분인지 세 친구들은 현실에 존재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버린다. 기러기 아빠 혁수는 결국,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캐나다로 떠나지 않는다. 택배와 대리운전을 병행하던 성욱은 대리운전을 그만둔다.-성욱의 택배가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이라면 야간운전은 아이들 사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한 노동이다- 기영은 애초에 버릴 게 없는 백수였으므로, 변화를 꿈꾼다. 아내를 설득하고 딸 아이에게 인정받는 아빠가 되는 것, 그 변화는 아주 천천히 이루어진다. 기영은 점점 당당해진다. 백수보다는 기타리스트가 더 낳다는 딸과 아내의 시선은 그를 조금 더 행복하게 해준다.

특이하게도 세 멤버 모두 몸에 문신을 새기지만, 오직 기영만이 그 문신을 가족에게 보여줄 수 있다. 혁수는 캐나다에 가족이 있고, 성욱은 밤낮없이 일만하기 때문에 아내에게 문신을 보여줄 틈이 없다. 기영은 아주 자랑스럽게 밤마다 아내에게 문신을 들킨다고 말한다. 또 딸이 보는 앞에서도 어깨쭉지에 있는 문신을 드러내놓고 다닌다. 당당함! 즉 그는 아버지로서 인정받고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반면, 변화한 자신을 보여줄 가족이 없는 친구나, 보여주고 싶어도 보여줄 기회가 없는 친구는 변화한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다. 기영은 스스로 타인의 눈을 통해서 자신의 변화를 인지하고 있는 자다.

물론 영화는 세 친구의 껍데기를 모두 불태워버린다.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플래시백이 없다는 것. 즉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향수를 담고 있는 영화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탈피해 현재에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영화다. 물론 영화 전반에 걸쳐 과거를 추억할 만한 멜로디의 음악이 흐른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당당하지 못하고, 가정에서 홀대받는 386세대다.

누구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고, 각자의 추억 속에 산다면 웅크린 자폐아들의 향수일 뿐이다. 이준익은 그 고리타분한 옛날 이야기(?)가 싫었던 건지, 단순히 지금을 즐기자는 이야기를 건넨다. 상우는 죽었고 그 빈자리는 그의 아들인 현준이 차지한다. 그리고 현준을 둘러싼 건 아버지의 친구들인 ‘활화산’ 멤버들이다. 하지만 락 밴드가 오래 지속되기 위해서는 과거를 향수해서는 안 된다. 또한 현재를 짓누르는 과도한 무게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껍데기를 불태우는 작업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불태우고 무아지경에 빠지고 나서야 이 영화는 성대한 축제를 즐길 준비가 끝났다고 말한다. 해체 위기에 놓였던 ‘활화산’멤버는 각자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한 자리에 모인다. 비록 악기는 없지만, 입을 악기 삼아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있지도 않은 기타와 드럼을 가진 것 마냥 신나게 한 판 연주를 벌인다. 이 때 카메라는 이들을 중심으로 360도 패닝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패닝은 난도질당한다. 도는 족족 중간 중간 끊어지고 다시 연결되는 어지러운 편집을 감행하는 데, 이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다. 만약 360도 패닝을 한 컷으로 보여줬다면, 이들의 모습은 세 명이 하나가 되는 조화를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없이 난도질당하는 사이 이들은 각자가 하나의 쇼트를 담당하게 되고, 그 사이 이 세 명의 인물은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 장면에서 느낄 수 있었던 건 무아지경, 자아도취에 빠진 한 인물들의 모습이다. 기영과 혁수, 성욱은 그렇게 자기 세계와 행복에 미쳐서 빠져나올 줄 몰랐던 것이 아니었을 까? 비로소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껍데기를 불태워버린 마냥...

상우의 아들인 현준은 ‘활화산’이 해체되려고 하자 기영에게 부탁한다. 활화산이라는 밴드의 이름을 자신이 만들 밴드에 쓰게 해달라고. 이 때 영화는 명백히 과거를 불사질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회에 조용히 반항한다. 현준 스스로 아버지가 싫어했던 음악을 다시 하는 것처럼 이들의 삶은 세상을 흔드는 변화가 아니라, 자기를 짓누르던 타자의 시선에 반항하는 것이다.

[즐거운 인생]은 불타버린 과거, 그 잿더미 위에서 다시 출발하는 도약이 필요하다고 넌지시 읊조린다. 이름만 빌려왔을 뿐, 그리고 사진만 남았을 뿐.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남은 자는 나약해진 자기를 추스른다. 이들은 말한다,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건 바로 그대이며 바로 나라고... 그러니 이 영화를 본 우리들도 쓸데없는 껍질일랑 불태 버리자! 인생은 즐거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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