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만에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영화, 나홍진 감독의 상업 장편 데뷔작 [추격자]를 보았다. “물건이 등장했다”는 기자시사회에서 흘러나온 입소문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영화는 관객의 바람을 온몸에 안고 쫓는 자와 이러한 기대감을 하나씩 깨뜨리며 쫓기는 자 사이의 추격전을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미진이 사투하는 모습과 엄중호 곁에 붙여놓은 그녀의 딸을 수시로 보여줌으로써 소외되기 쉬운 인물을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았으나, 데뷔작에서 이만한 성과를 거둔 전례가 그리 많던가.

특별한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누구나 단편영화를 찍음으로써 영화감독에의 꿈을 시작한다. 그런데, 단편영화라는 것이 그리 만만하게 볼 대상이 아니다. 길어야 30분 미만인 시간 동안 감독 자신의 메시지를 드러내는 가운데 압축과 터뜨림을 두루 도모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작비랄 것도 없는 소자본으로 한편에 영화를 찍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오로지 필모그래피가 쌓일 뿐이니, 밤새 이어지는 술자리와 재능에 대한 상호부조성 칭찬만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스탭과 배우들에 대한 유일한 보상일 따름이다. 비록 어설프고 허술한 촬영현장이지만 미래의 대가를 꿈꾸는 이들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렇게 찍은 영화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담보물이 되어 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김삼력 감독의 [아스라이]에서 주인공 상호는 자신의 후배가 “영화 좆도 못 만들면서 영화제 돌리지나 말지 쪽팔리게...상금 타먹으려고 영화 찍느냐”고 대들자, “그래도 찍었으면 돌려봐야지, 돈을 구해야 영화를 찍지, 그러려면 작품이라도 부지런히 돌려야지” 않겠냐고 말한다. 재능 없이 열정만 품고 살아온 영화지망생의 서글픈 탄식이지만 그나마 영화제라도 초청 받는 것이 얼마나 운 좋은 일인가. 김삼력 감독만 해도 10년 세월을 단편영화를 통해 내공을 닦으며 때를 기다린 끝에 비로소 상업 장편 [아스라이]를 찍을 수 있었다. 눈을 돌려 보면 주위에 이런 젊은이들이 꽤 많이 있다. 영화제마다 응모해도 몇 년 동안 한 번도 초청되지 않는 감독들이 부지기수다. 그래도 이들에게 (단편)영화는 삶의 의미이자 존재증명에 다름 아니다.

3년 묵은 쑥을 찾는 사내가 있었다. 모친의 병구완을 위해서는 반드시 3년 된 쑥이라야 했다. 대체 누가 쑥을 3년씩이나 묵힌다는 말인가. 세상천지 어디에도 3년 된 쑥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 3년이 흘렀고 모친은 임종했다. 이 어리석은 남자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단순하다. 3년 전에 쑥을 심었더라면 그는 모친을 살릴 수 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3년 묵은 쑥을 찾을 생각만 했지 쑥을 심어 3년을 기다릴 생각은 안 했던 것이다.
어느 때보다 한국영화가 어렵다는 소리가 넘쳐나는 시절이다. 당장 살아남아야하니 자본의 선 순환구조를 위해 자금회수가 빠른 아이템을 찾아야 하는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다. 참신한 창작물보다 검증된 원본 있는 이야기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도 당연할 테다. 하지만 한국영화계가 대작에 한 눈 팔고 흥행의 단맛에 취해있는 동안, 매체들이 스타에 넋이 빠져 여배우의 쇄골 따위를 친절하게 전달하는 동안, 현장비평가들이 구색 맞추기로 독립영화를 언급하는 동안에도 단편영화 감독들은 (너무나 익숙한)경제적 어려움을 당연시 여기며 영화를 만들어 왔다. 나홍진은 이렇듯 척박한 토양이 배출해낸 단편영화의 힘을 상징하는 다른 이름일 따름이다. 충무로 제작자들이 독립영화제를 찾고 졸업영화제에 관심 갖는 것은 될성부른 나무를 찾기 위해서일 터이다. 이왕이면 더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고 제작까지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찾아낸 신인 중에 제 2, 제 3의 나홍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단언컨대 한국영화의 미래는 단편영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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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문화든 기초가 탄탄해야 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단편영화로 상업영화가 추구할수 없는 새로운 시도등으로 점점 문화는 탄탄해지고 다양해지며 강해질수 있는것 같습니다. 좋은글 잘 봤습니다.
2008.02.18 17:29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