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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5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곡이 뭐냐고 물어오면, 나는 주저함 없이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이라 답해왔다. 모차르트도 바흐도 브람스도 로시니도 또 차이코프스키도 좋지만 내게 있어 베토벤은 절대적 숭배대상이다. 그는 신의 목소리를 대변하듯 범접할 수 없는 음악세계를 창조한 인물이었다. 때문인지 그의 음악은 장엄하되 아늑하며 절제 속에서도 자유롭다. 바흐가 헨델과 비발디 등의 바로크 음악에 가까이 서있고, 모차르트 속에 클레멘티의 궁정연가가 남아있는 반면, 베토벤의 음악은 완전히 다른 유형을 추구한다. 고전주의의 최고봉이면서 낭만주의로의 가교역할을 했던 인물, 루드비히 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은 이렇듯 절대적이고도 자유로운 영혼의 소리를 오선지에 남기기 위해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야 했다.

[카핑 베토벤_ Copying Beethoven](2006)은 베토벤 일생의 마지막 시기, 그러니까 9번 교향곡 <합창>의 초연을 며칠 앞둔 시점을 배경으로 그의 카피스트인 안나 홀츠라는 가상의 여성을 내세워 거장의 말년을 조망하는 한편 그 시대 여성음악가의 험난한 노정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영화적으로만 보자면 빼어나다고 평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지만, 베토벤과 그의 음악을 버팀목 삼아 엮어가는 이야기는 클래식의 문외한이라도 흥미롭게 받아들이기 족할 정도이니 (애초에 음악영화임을 전제로 한다면) 조금은 너그러워질 수 도 있을 터이다.

당연히 영화의 초점은 <합창>교향곡 초연에 맞춰져 있다. 덧붙이자면 감독은 이 장엄한 작품의 이면에 스며든 이름 없는 이들, 특히 안나 홀츠라는 여성 작곡가지망생의 열정과 재능이 베토벤의 음악세계에 삼투되어 재창조되는 과정을 세밀하게 그려낸다. "여자가 작곡을 한다니, 개가 뒤로 걷는 것처럼 우스운 일"로 여겨지던 시대에 악보를 베끼고 몸종에 다름없는 위치에 놓인 여성을, 위대한 작품의 초연을 성공적으로 견인한 장본인으로 그려냈다는 것은 감독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대목이다. 이를테면 아그네츠카 홀란드 Agnieszka Holland 감독은 이 불멸의 작곡가의 음악적 동지로 한 여성을 내세우고는 신의 목소리를 듣고 표현하는 일이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설득력 있게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누구보다 권위적이고 남성적이며 고집불통의 마에스트로가 한낱 자신의 악보를 베끼는 여학생 발 앞에 무릎 꿇게 될 줄이야! 모름지기 ‘위대한 작품은 이성이 감성을 억누를 때 탄생한다’ 는 경구가 실현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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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갓 작곡을 배우기 시작한 애송이가 무례하고 거친, 당대 최고의 마에스트로와 음악적 교감을 이룬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닐 터. 따라서 감독은 괴팍하고 제멋대로인 마에스트로와 안나의 관계를 <합창>교향곡의 초연 무대까지 유보하더니, 열광의 무대에서야 두 사람을 음악적 동지로 결합시켜놓는다. 외형적으로는 베토벤의 귀를 대리하는 역할에 불과하지만, 거장의 음악에 대한 내면의 경외감이야 말로 모든 차이와 배경을 넘어 중심기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음악회 장면에서 베토벤과 안나를 번갈아 잡아내는 카메라의 현란한 패닝은 남녀의 격정적 정사를 방불케 하며, 두 사람의 손가락이 서로를 어루만지듯 흐느적거릴 때의 분위기는 어느 포르노보다 에로틱하다. 또한 정점에서 폭발하며 희열에 휩싸인 두 인물의 표정은 천상의 소리를 맛본 자의 오르가즘에 다름 아니다.

바흐와 헨델의 모습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리스트와 바그너를 혼동하는 이들일지라도 베토벤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흉상이나 초상을 통해 널리 알려졌거니와 사자갈기 같은 독특한 헤어스타일로 인해 한번 보면 쉽사리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카핑 베토벤]은 우리가 기억하거나 상상하는 베토벤의 모습 바로!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런 영화다. 게다가 에드 해리스 Ed Harris 의 완벽한 변신은 악성의 현현이라 칭하기에 손색없으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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