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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한번 내리지 않는 나라, 자메이카 봅슬레이 선수들의 동계올림픽 출전기를 그린 영화 <쿨러닝 Cool Runnings>의 한 장면,

“썰매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탈룰라 어때요?”
“매춘부 이름 같다. 어디서 따온 거야?”
“우리 어머니 성함이요.”
“아주 예쁜 이름인걸!”



이 썰렁한 대화는 썰매가 없다보니 욕조에서 연습하는 장면에서 등장하고 있는데, 이 시퀀스는 지미 클리프 Jimmy Cliff 의 I Can't See Clearly Now 가 흐르던 훈련 장면과 더불어, 비인기종목의 애환이 담긴,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으나 웃어넘길 수 없는 명장면 중 하나다. 그런데,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벌어졌다. 한국 봅슬레이 대표팀이 월드컵과 세계선수권 출전권을 따낸 것이다.

이번 쾌거가 영화 <쿨러닝>의 환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단순히 척박한 환경을 딛고 이뤄냈다는 점 뿐 아니라 미국대표팀이 1993년에 사용하던 봅슬레이를 500달러에 임대하여 경기에 출전했다는 것에 기인한다. 즉 우리 대표팀이 경기에 사용한 봅슬레이에는 KOREA 대신 USA가 선명하게 적혀있었다는 것인데, 그 사연을 들어보면 기막혀 말이 안나올 정도다.

때는 2003년, 대표팀의 수훈갑인 강광배 선수는 한국인 최초로 봅슬레이 선수가 된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강원도청이 봅슬레이 팀을 창단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인데, 이미 루지와 스켈리톤으로 동계올림픽을 밟은 강 선수는 후배에게 길도 터주고, 미개척 종목의 저변확대를 목적으로 봅슬레이로 전향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경기장이 없어 대표 선발전을 일본 나가노에서 치러야했고, 창단 때 구입했던 대표팀 전용 봅슬레이는 탈 수 없을 만큼 부서진 상태였다는데, 그래서 대회 때마다 외국에서 빌려 출전해왔다는 것이다.

3수를 고집할 정도로 평창동계올림픽에 집착하는 강원도와 동계올림픽유치단은 그간 무엇을 했는지 의문스럽다.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나라의 대표팀이 장비를 외국팀에서 임대해 사용하는 현실, 과연 납득할 만한 수준일까? 무슨 명분으로 동계올림픽을 치루겠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이번 일을 계기로 무수한 뒷얘기들이 공개된 것은 천만 다행스런 일이라 하겠다.

비단 봅슬레이 뿐 아니라 비인기 종목 선수들의 아픔은 이루 열거할 수 도 없다. 바로 얼마 전 경기 도중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한 권투의 최요삼 선수가 그러했고, 한창 인기몰이 중인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핸드볼 선수들도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성적지상주의와 1등 만능주의는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쳐’야 제대로 정신이 박힌 운동선수라고 말한다. 중, 고등학생조차 ‘경기장에서 죽을 각오’ 가 되어있다는 식의 비장한 인터뷰를 서슴지 않는 것도 이런 때문이다. 장비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도 정신력으로 버티면 된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라니!

역경을 딛고 일어선 승리, 조국에 바친 영광,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감동의 드라마라는 말보다 값싼 포르노그래피가 또 있을까? (한 때는 스포츠 영웅이었으나) 결국 이 거대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담보 잡혀 육신을 탕진한 선수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목에 건 메달의 색깔로 노고의 질량을 가늠하는 사회에서 패자에게까지 건네질 박수는 없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아마도 며칠 내로, 봅슬레이 팀 전용 봅슬레이 구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개인 또는 단체가 의로운 후원자를 자처하며 뒷북을 치면서, (장비 사줬으니) 좋은 성적에 대한 부담을 지울 게 뻔하다. 게다가 새 봅슬레이가 생겼으니 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선수들의 환하게 웃는 사진이 담긴 기사가 이어질 런지도 모른다. 이것이 감추고 싶지만 엘리트 지상주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스포츠 후진국의 자화상이요, 한국 스포츠의 현실이다.

<쿨러닝>의 종반, 자메이카 봅슬레이 팀 선수들은 경기 도중 부서진 봅슬레이를 어깨에 지고 결승선을 통과한다. 그때 터져 나오는 환호와 박수. 그것은 꼴찌에게 보내는 격려의 박수가 아니라 인생승리자에게 보내는 존경어린 찬사에 다름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더 없이 좋았던 이유는, 철저하게 개인적 욕망에 집중하면서 그것이 촉발시키는 스포츠의 역동성과 드라마가 찰기 있게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노고를 국가이데올로기 안으로 편입시키거나 과대포장하지 않은 소박함에 있다.

봅슬레이 국가대표팀이 <쿨러닝>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설사 보았다고 해도 그들의 경기력 향상에는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엉뚱한 친구들의 유쾌한 소동극을 통해 잠시나마 여유를 가지고 스포츠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었다면 어떤 실전비디오보다 유익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따금 특정 사건과 관련해 한편의 영화가 다시 회자되는 것을 보면, 영화가 단순하게 오락을 위한 도구가 아님을 새삼 느끼게 된다. 영화에 대한, 영화를 평가하는 위치에 놓인 사람으로서 무한책임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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