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할 것도 거창할 것도 숭고할 것도 없는 단순한 이야기에 멜로드라마가 개입하고, 시대적 배경과 도시개발의 성공적 모델로 알려진 파주라는 공간이 뒤엉키면서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가는 영화 <파주>에서, 나는 운동권 지식인의 잔상, 즉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시대의 흔적을 보았다.
수배를 피해 숨어들어간 선배의 집과 형의 교회를 거친 중식은 결혼을 통해 그녀의 집으로 들어간다. 주거불명에서 주거확실한 자로의 편입. 시국사범에서 공부방 선생을 거쳐 철대위주동자로의 위상변화. 세 명의 여자가 그와 관계했고 그를 기억하거나 사랑했으며 그에게서 떠나간다. 적어도 시작은 그렇게 보였다. 그런 그가 보험사기로 구속이 되다니. 뭔가 이상했다. 조국통일을 위해 청춘을 불사른 정치범에서 졸지에 보험금에 눈먼 잡범으로 추락한 것이다. 노무현과 김대중이라는 386의 버팀목이 사라진 시대에, 개발독재시대의 신화적 기업가가 대통령이 된 시대에, 박찬옥은 안개 자욱한 파주에서 길을 잃은 중식의 행로를 통해 여전히 정주하는 공간이 아닌 심리적 은신처를 갈망하며 존재증명에 골몰하고자 발버둥치는 운동권지식인들의 초상을 노정한다.
박찬옥이 <파주>에서 내세운 중식은 자유로운 영혼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는 철저한 은둔자인 동시에 주거지의 안온함과 불안을 동시에 안고 살아갈 운명을 타고 난 인물로 보인다. 그는 거리에서 외치는 법이 없다.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며 벌이는 투쟁이 아닌 자신의 거점을 확보한 후 그곳을 발판 삼아 일을 도모하는 전형적인 파르티잔이다. 공간을 벗어날 수 없는 자, 거리에 설 수 없는 자, 그러니까 자기 공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인물이 중식이다(그는 도로에서 커피를 팔 때도 천막 밖으로 나와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 수배시절의 불안과 조심성이 몸에 밴 탓인지 몰라도, 어떻게 해서든 공간을 확보하려는 그의 생존법은 은수와의 결혼으로 이어지고 처제 은모의 연정을 싹틔우도록 기능한다. 중식의 이야기를 은모의 시점으로 볼 수밖에 이유가 여기 있다.

“왜 이런 일을 하는지”에 대한 확신마저 사라진 한 남자가 끝내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은 누군가의 사랑과 그늘이었다. 그것이 중식의 시대착오적 패착이다. 그리하여 중식에게 새겨지는 가장 더러운 인장. 즉 ‘사랑하지 못했던’ 아내의 집에서 ‘아무 것도 아닌’ 첫사랑과 함께 일을 도모하던 자에게 씌워진 ‘보험 사기범’이라는 불명예다. 조국통일과 정의와 평등을 부르짖던 운동권지식인에게 이보다 가혹한 형벌이 있을까? 사랑 없는 이념과 대의는 이토록 허약하고 속절없다. <파주>는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를 살아온 감독의 자기성찰이자, 아직도 스스로의 감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지식인 앞으로 배달된 고해성사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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