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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훈 감독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를 보면, 주인공 제휘가 얇게 얼어붙은 저수지의 중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양해훈 감독에 따르면, 이 장면은 실제로 살얼음이 언 위험한 상태에서 촬영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배우인 임지규의 발걸음이 오죽했을까. 그런데 이 장면에서 임지규의 연기는 극중 인물이 보여줘야 할 태도와 정확하게 부합한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결국 배우로 하여금 바닥이 깨질까봐 주저하는 발걸음을 옮기도록 만든 것은, 그의 연기력이 아니라 바로! 얇게 얼어 곧 무너질 것 같은 저수지다. 배후에서 영화적 리얼리티를 추동한 현실.

[펀치레이디]는 이종격투기 챔피언인 남편에게 죽도록 매 맞고 살아온 한 여성의 복수혈전을 그린 영화다. 주인공인 아내는 아버지에게서 남편에게로 그리고 딸에게까지 전이될 수도 있는 가정폭력의 연결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목숨을 건 분투를 펼친다. 이 영화에 관한 대게의 평은 부정적인데, 짜임새가 허술하고 이음매가 서툴다보니 허점이 많이 발견된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흥미로운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설정임에도 판타지를 가미시키면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 내려한 감독의 의도와 달리,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각할거리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주인공인 아내가 남편에 맞서기로 결심한 이유는, 가정폭력 때문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 혼자만 참아내면 다 괜찮을 줄 알았”던 바보 같은 여성이, 느닷없이 등장한 옛사랑의 죽음에 격분하여 돌발적으로 남편과의 대결을 신청했을 뿐이다. 뜬금없고 생뚱맞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폭력으로 속박된 인생과 절연하고자하는 자기정체성의 깨달음이 가져온 결과가 아니라, 일을 저질러놓고 보니 자신의 지난날이 더 없이 비참했고 무기력했던 자신이 한심했음을 알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래도 좋다. 어쨌든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무자격 무경험자를 트레이너삼아 격투기술을 연마하는 과정을 거쳐 링에 오르게 되는데, 주인공 하은(도지원 분)과 그녀를 지도하기 위해 밤마다 격투기도장을 찾는 수현(손현주 분)의 훈련과정이 압권이다. 위에서 살얼음판을 걷는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의 심정을 이야기했지만, [펀치레이디]의 경우는 그 보다 한 수 위다. 예컨대, 복근 단련을 위해 농구공을 배위에 내리 꽂는 장면이 있다고 치자. 현실이라 해도 초보자가 겪는 아픔은 대단할 것인데, 그것을 배우에게 실재로 한다? 아픈 척이 아니라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고통의 순간이 아니겠는가. 물론 실제로 그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손현주와 도지원이 고통 받는 이러한 연습과정을 보면, 내러티브상으로 보자면 웃을 수 없는 일인데, 도무지 웃음을 참을 길이 없다. 너무 리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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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리얼리티는 무엇을 유발하는가. 이종격투기 챔피언과 상대하겠다는 두 사람의 무모함을 증명할 뿐이다.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비현실적이라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떻게 가정주부가 단 세 달의 훈련을 통해서 격투기 챔피언과 싸우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작위적인 설정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가지고 폭력으로 고통 받은 여성의 복수를 포장하려 했다고 한다. 게다가 정작 실감나게 펼쳐져야할 격투장면에의 리얼리티는 품질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치중하려 했던 것일까? 훈련으로야 어떤 상대든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돌아가기 일쑤다. 결국 과정에서의 리얼리티는 코미디가 되어버린 반면 실전에서의 판타지는 내러티브의 개연성을 훼손시켜 버리고 만 것이다. 이는 너무 현실적이라서,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환상적이라서 현실의 한계를 또렷이 각인시킨 효과로 볼 수 있다. [펀치레이디]를 본 관객 대부분은 후자에 초점을 두었고, 그래서 영화가 비현실적, 비논리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영화적 리얼리티가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나치게 세밀하고 여과 없는 폭력 신을 볼 때 진정성을 느끼기 보다는 눈을 감고 싶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왜냐면 영화이기 때문이고 영화는 기본적으로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배우가 맞아도 맞는 게 아니요 죽어도 진짜 죽는 게 아님을 우리가 알기에 컴컴한 극장에서 스크린 속에 마음 놓고 자신을 맡길 수 있는 것과 상통한다. 반면 [펀치레이디]의 경우처럼 지나친 판타지가 현실을 잠식하게 되면, 오히려 현실의 견고한 벽이 또렷하게 드러나기 십상이다. 다시 말해 남성을 힘으로 이길 수 없는 현실의 벽을 넘고자 애쓴 극중 여성의 분투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치부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는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방에서 총질을 해대는 것과 진배없다. 이 영화가 데뷔작인 강효진 감독은 영화적 리얼리티와 현전(現前)에 대하여 조금 더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코미디와 휴먼드라마 중 하나를 선택했더라면 좀 더 나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도지원과 손현주의 연기는 특별히 언급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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