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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해프닝]에 대한 다른 생각

강민영이 쓴 글(당신이 걱정하는 모든 것 [해프닝])의 처음, “<해프닝>이 던지는 화두는 인간 생존, 혹은 인간존속에 대한 문제다.” 과연 그럴까? 센트럴파크에서 집단 자살사건이 벌어지는 프롤로그를 지나면 주인공 엘리엇의 생물 수업이 보여진다. 엘리엇이 학생들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왜 벌들이 사라졌을까?”이다. 학생들은 여러 가지 의견들을 말하고, 그중 엘리엇이 가장 수긍하는 대답은 “자연의 현상은 완벽히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영화는 처음부터, 그리고 제목에서부터 말하고자 바를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영화는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을 보여주는 것에 주력하고 있다. 되풀이되고 있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대구법은 이 영화의 경계 혹은 진의를 강조한다.

강민영 글의 중간,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무차별적으로 식물들은 바람을 통해 특정 물질을 내뿜는다.” 과연 그럴까? 영화 내에서 식물들이 바람을 통해 특정 물질을 내뿜는다는 것은 하나의 유력한 가설일 뿐이다. 영화는 갑자기 벌들이 사라진 것처럼, 고래들이 육지로 몰려와 자살(?)을 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인간에게도 올 지 모를 현상을 그저 보여주고 있다. “인간 생존과 인간 존속”의 문제는 인간이 설정한 화두일 뿐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려 하는 것은 동물로서의 인간에 더 가깝다.


당신이 기대하는 어떤 것


“쇼크와 공포 효과를 제대로 활용하며 강렬하게 시작한 <해프닝>은 시간이 갈수록 미스터리의 해답에 접근하기보다는 자극적이고 반복에 불과한 자살 행위들만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권총으로 머리를 쏘거나 목을 매달고, 혹은 짐승에게 참혹하게 뜯기며 먹이가 되기를 자처한다. 첫 R등급 영화로서 그에 어울리는 폭력의 수위 조절은 성공적일지 몰라도, 이야기로 관객을 매료시켰던 샤말란의 장기는 영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재앙이 벌어지기 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주인공 부부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재확인하며 관계 회복을 맞이하는 상황은 실소를 자아낸다.”


위의 글은 『씨네21』에 실린 김종철의 글을 발췌한 것이다. 이 한 단락은 영화에 대한 확실한 요약인 동시에 성급한 오류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끝난 후 뒷자리에 앉았던 이름 모를 관객들의 대화는 이렇다. “뭐야, 이거. 호러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고 대체 이 영화의 주제가 뭐야?” “자연을 보호하자는 거네~” 다시 말하지만, 이 영화는 어떤 현상, 제목 그대로 “happening” 에 대한 현시일 뿐이다. 이 현상을 보고 어떤 결론에 이르던지 관객의 자유겠지만, 영화가 유보한 결론과 필연성을 덧붙이지 않고 이 영화를 이해할 순 없을까?



제1의 자연과 제2의 자연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구름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모양을 바꾸고 하늘도 그에 따라 변하고 구름도 변한다. 이 영화에서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람이다. 식물을 움직이게 하는 바람은 자살소동의 유력한 용의자처럼 보여진다. 이 부분에서 생각할 것, 그 시선의 주체는 인간이라는 것,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심리를 투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게오르그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에서 제1의 자연과 제2의 자연을 정의한다. 침묵하는 제 1의 자연이 있다면, “인간이 만들어낸 구조물인 관습의 세계는 제2의 자연이다. 제1의 자연과 마찬가지로 이 제2의 자연은 단지 알려져 있는 필연성의 체계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필연성은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제2의 자연은 자신의 진정한 실체 속에서는 파악될 수가 없다. …중략… 제1의 자연에 대한 제2의 자연의 낯설음, 즉 자연에 대한 현대의 감상적인 태도는 스스로가 만든 환경이 인간에게는 이제 그들이 안주할 고향이 아니라 감옥이 되어 버렸다는 체험의 투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제1의 자연과 제2의 자연이라는 외투를 벗은 인간의 존재이다. 엘리엇과 앨마와 제스는 알 수 없는 공격에 노출된 사람들을 따라 도시를 떠나고 온갖 가설과 추론에서 벗어나 집단에서도 이탈한 후에야 죽음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 허허벌판을 헤매다 들어선 모델 하우스의 가짜 물건들은 인간들이 안심하고 즐기고 누리던 모든 것들의 실체는 허구일 뿐이라는 상징이고, 집단을 떠나 혼자 살고 있는 괴팍한 노인에게서는 무위자연의 평온함이 아니라 자신의 이기심에 갇힌 인간의 허울이 보인다.

노예를 숨겨주던 창고에 살고 있던 개구리처럼 한낱 무의미한 것의 정점, 즉 진실되고 깊은 인간의 노력도 결국에는 무위로 끝나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나 아니면 인간이 결국 무가치한 존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제2의 자연(관습과 제도)이 만들어낸 제1의 자연과의 결계 안에서 가려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 인간의 에너지


김종철이 언급한 “특히 재앙이 벌어지기 전 사이가 좋지 않았던 주인공 부부가 우여곡절 끝에 사랑을 재확인하며 관계 회복을 맞이하는 상황은 실소를 자아낸다.”는 부분. 왜 감독은 그 부부의 관계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을까? 가족과 아이의 생존을 둘러싸고 혹자는 이 영화를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우주전쟁>에 빗대기도 하지만, 나이트 샤밀란 감독은 필연성과 인과관계보다 미스터리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그의 관심은 <식스센스>에서 비롯된 ‘반전’에 대한 기대치를 따라잡지 못해 고군분투한다는 세간의 평을 뒤로 한 채 순수한 결정체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엘리엇은 공포에 떨고 있는 제스에게 인간이 가진 에너지에 대해 말한다. 엘리엇은 감정에 따라 색이 변하는 반지를 가지고 다니는데 영화에서 그 반지의 색깔은 어떤 암시를 전달한다. 두 그룹으로 나뉘어서 도망칠 때 언뜻 보여지는 반지의 색깔은 파란색이고, 혼자 사는 노파가 죽고 나서 엘마와 제스를 만나러 밖으로 나가기 전 반지의 색깔은 노란색이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흔히 알려진 파란색의 의미는 평온함이고 노란색은 사랑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것은 의도된 트릭일 수도 있지만 샤밀란 감독이 주목한 것은 인간의 에너지다.

결국 제스의 아버지인 수학교사가 말하던 확률의 설득력과 식물 농장 주인의 가설과 엘리엇의 과학적 지식을 뒤로 하고 남는 것은 세 주인공의 에너지이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 이 난국을 어떻게든 헤쳐나가야겠다는 의지, 죽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내뿜는 인간 감정의 에너지 말이다. 제도와 관습에서 벗어난 인간이 지닌 순수한 에너지는 인간에게 반응한다는 식물의 에너지와 동격처럼 보여지고 있다.

왜냐고 묻지 말자. 왜 주인공은 살아남았는지, 왜 동일한 사건이 또 일어나는지, 앞으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해프닝>을 보고 나서 생긴 고민이라면 더더욱 쓸데없다. 이 영화는 “왜”라는 질문을 하는 영화가 아니라, 현상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이 가진 외피를 벗겨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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