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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락에 찌든 남자, 영수는 자신의 세계 안에서 환멸을 느끼고(그와 동시에 자연스레 발병한 간경변으로 인해) 시골 요양원에 내려가게 되고 그곳에서 8년째 머물며 사람들을 돌보며 동시에 힘겨운 투병생활 중인 은희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곧이은 은희의 요구로 그들은 그곳을 나와 단둘이 살게 되지만 곧바로 사소한 이유들로 갈등을 일으킨다. 계속 쌓여가는 갈등과 다시금 찾아든 도시의 유혹에 점점 영수는 은희와 현재의 생활에 실증을 느끼고 결국 그녀를 떠난다. 병든 몸을 이끌고 홀로 남겨진 은희는 어떻게 될까? 그러나 영화는 시골에 혼자 남게 된 은희를 보여주지 않고 다시 방종한 일상으로 돌아온 영수의 세계에 카메라를 비춘다. 그는 다시 돌아온 그곳에서 행복할까?


허진호의 네번째 영화 <행복>은 그가 다루어 왔던 익숙한 세계, 연애가 시작되면서 으레 걷게 되는 어떤 수순을 보여준다. 낯선 곳에서의 출발, 새로운 사랑, 사소한 갈등, 갈등이 불러일으킨 잠재적 불안으로 인한 새로운 환경과 사랑을 포기하기에 이르는 하나의 결단, 그리고 뒤늦은 후회. 하지만 나는 그저 무책임하게 이 영화의 스포일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생각했지만 이건 뭔가 아주 위험한 방식으로 관객과 게임을 벌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 연애담에는 이상하리만치의 어떤 속도감이 있다(이 영화의 영화적 스타일을 말하는 게 아니다). 멜로드라마에 기대하거나 보여 지는 이야기와 장면, 그리고 그것이 진행방식이 너무도 급격하게 이루어지고, 이것이 너무나도 뻔히 드러남에서 오는 어떤 불안이 영화를 보는 내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불안감 사이에는 여지없이 영수의 환영의 자리가 들어온다.


판타지를 판타지라고 말해버리는 무모함

그는 요양원이 있는 시골 버스정류장에 내리자마자, 건너편 수퍼마켓 앞에 앉아있는 은희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영수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설렘을 드러낸다(그녀는 이때 그를 등뒤로 하고 거울을 보며 얼굴을 매만지는데 이 모습을 이후 두 사람이 처음으로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기 직전 다시 한번 보여준다). 그가 도착한 시골의 평화로운 요양원은 확실히 그가 이제까지 살아온 도시의 환경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공간이다. 모두들 새로 온 그를 환대하며 지나치리만큼 살갑게 반응한다. 이 곳에 요양온 사람들은 각자 병을 치유할 수 있으리란 믿음하나로 자신들의 몸이 언제 완쾌가 될지 모르는 불행한 일상이지만 그곳 모두는 별다른 근심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신경질적이면서도 자신의 병세에 비관적인 유일한 사람이 있다. 영수와 한 방을 쓰게 된 폐암걸린 중년남자는 처음 영수와 방을 함께 쓰는 순간부터, 그에게 알 수 없는 히스테리를 부린다(담배를 빌리는 척하면서 담배를 건네받자 담배를 부러뜨리며 "담배는 독약이야"라며 그를 몰아세운다). 그리고 몇 번의 등장 이후 중년남자는 그 방 화장실에서 목을 매고 갑자기 자살해버린다. 그런데 이상한건 그 이후이다. 영수와 은희사이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그 남자가 죽어버리자 갑자기 관계가 발전하더니 사랑을 하고 관계를 가진다. 더군다나 관계를 가지는 계기가 늦은 밤, 혼자서 뜯게질(?)을 하고 있는 영수를 은희가 창밖에서 보다가 그를 놀래 키고 대뜸하는 소리가 "여기 되게 귀신 많거든요"라며 놀린 뒤, 영수는 장난어린 말투로 무서우니까 같이 있자 말한다. 얼마 전 누군가 자살한 방. 그리고 그 방에서 귀신에 대한 농담으로 오늘밤 함께 잠자리를 하자는 우회의 속삭임. 더군다나 함께 방을 쓰는 사람이 죽음으로 영수가 혼자 쓰게 됨으로써 그들이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하나의 계기(왜 2인 1실의 방에 다른 환자는 들어오지 않는가? 영수가 이 요양원에 들어온 이후 이곳을 찾는 새로운 환자는 왜 없는가?).

그리고 이 사실을 안 다른 환자들과 그곳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의 사랑에 보내오는 만장일치의 축복.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어떠한 불안이나 근심이 자리할 틈이없는 세계. 여기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너무도 쉽게 이 세계가 영수의 판타지라고 승락해 버리는 무모함이 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곳을 떠나 둘만의 신혼집 비슷한 걸 차린다. 그런데 영화에서 표현되어지는 그들이 신혼집을 차리고 정확히 다음날, 처음으로 사소한 말다툼으로 인해 갈등이 일어난다. 영수가 읍내로 장을 보고 온 사이 소낙비가 내리고 은희는 영수에게 먹일 약초 풀을 비를 홀딱 맞으면서 캐고 오고 집으로 돌아온 영수는 이것을 알고 그녀를 꾸짖는다. "넌 조금만 감기걸려도 어떻게 될지 니가 더 잘 알잖아!, 애가 멍청한거니? 궁상맞은거니?" 그러자 은희는 힘없이 대꾸한다. "말 조심해" 그런데 영화 속의 영수는 순간 속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병세는 영수의 그것보다 훨씬 심각하다. 하루에도 몇 번 호흡기에 의지해야하는 상황, 언제 숨이 멎을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 또 다른 현실의 문제들을 깨달은 영수는 이 환영의 세계에서 빠져나야만 한다.


이별을 받아들이는 은희의 씬

그런데 영수가 요양원에 있을 때에는 찾아오지 않았던 친구들이 그의 시골집으로 찾아온다. 물론 영수가 돈이 궁한 나머지 친구에게 연락해 찾아온 것이지만 그 친구는 하필이면 예전에 영수의 애인과 함께 영수집에 찾아온다. 그리고 그녀가 서울로 한번 올라는 말에 서울로 잠깐동안 돌아가고, 다시 돌아간 서울에서 그는 더 이상 시골에서의 영희와의 생활을 원치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 시골로 내려가 은희에게 혜어지자고 말한다, 혹은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은희가 말하도록 설득시킨다. 순간, 이후 이들이 헤어지고 각자의 삶을 살아갈 때 영화를 보는 당신은 이 이별이 너무나 쉽게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물론 모든 연애가 그렇지 않냐고 말할 테지만 알다시피 그녀는 몸이 많이 아픈 여자다. 더군다나 가족은커녕, 주위에 그녀를 돌봐 줄만한 이는 그 누구도 없다. 그렇다고 다시 요양원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여의치 않을 것이다(원장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떠난 그녀를 영수가 버린 사실을 그곳 사람들이 수근거릴 게 뻔한 사실이다. 더불어 사람들은 그런 영수를 비난 할 것이다). 나는 영수의 (비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그런 결정과 그에 따른 비교적 쉽게 이루어진 이별 사이에 어떠한 잉여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과 관련된 은희의 단독적인 두개의 씬이 존재한다.



첫번째는 영수가 잠깐 서울로 돌아와 있는 동안 전 애인의 집에서 다시 시골 집으로 내려가는 것에 대해서 하루 내내 고민하는 동안 교차로 시골에서의 혼자 남은 은희를 보여 줄때이다. 영수는 전 애인이 일로 나가있고 없는 동안 그녀의 집에서 종일 고민하고 있으며, 저녁이 되서야 전 애인이 집으로 돌아온다. 그때 울리는 전화벨에 전 애인은 왜 받지 않냐고 묻자, 그는 그냥 둘러 넘긴다. 그리고 다음 숏은 낮에 수도가에서 설거지를 하는 은희를 보여준다. 그리고 수도꼭지가 터져 은희가 힘겨워하는 장면이다. 이어서 바로 그날 저녁에 영수에게 언제 돌아 오냐고 (전화를 받지 않는)그의 핸드폰에 음성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 그녀를 보여준다. 그들은 지금 서로 다른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전화를 받지 않는 영수의 숏에서 바로 수화기를 들고 있는 은희를 보여줘야 했지만 허진호는 구태여 낮에 고장난 수도꼭지를 붙잡고 전전긍긍하다가 울상이 된 그녀의 모습을 먼저 보여준 다음 밤 장면으로 넘어갔다(그때 하필이면 터진 수도꼭지. 생각보라 집안에서 이런 일들을 처리하는 건 대개 남자들의 몫이다). 이 편집은 말이 안되지만 어쩌면 은희의 숏으로 넘어가기 전에, 전화벨 소리를 듣고 그 전화를 받을지 말지 갈등하는 사이 영수는 혼자 시골집에 남겨진 은희의 일상을 떠올린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영수의 밤에서 은희의 밤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문득, 영수의 빈자리로 힘들어 하고 있는 그녀의 낮을 생각하는 내면의 외재화가 끼어들 때 그것은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를 위한 숏이 아니라 디제시스안에 있는 영수에게 보여주기 위한 말그대로 잉여의 숏, 혹은 씬. 그런 다음 다시 시골로 내려간 영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희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왜냐하면 그들이 헤어져야 이 이야기는 성립이 된다).


두 번째는 은희가 헤어지자는 영수의 설득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장면이다. 전날 영수의 헤어지자는 말에 은희는 울고불고 매달리며 자신이 더 잘하겠다고 그에게 사정하지만 이미 소용이 없다. 다음날 지쳐서 나란히 누워있는 두 사람. 그때 영수가 잠든 사이 은희는 깨어있고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숏에서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밖에 홀로 나와 있는 은희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한다. 심장이 40%만 기능하는, 조금만 오래 걸어도 숨이 차는 그녀가 연인의 변심에 대한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뛰는 것이다. 그녀는 정말 죽을려고 했을까? 그런데 이 씬에서 한 숏은 이 영화에서 매우 생소한 방식으로 찍었다. 그녀가 집을 나와 바깥에 있는 설정 숏다음에 정면 숏을 이어지더니 이 앵글에서 그녀가 뛰자 갑자기 카메라도 같이 움직이며 후진 트래킹을 한다(그런 다음 이 영화의 본래 형식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롱숏에서 뛰어가는 그녀를 패닝한 다음 약간 왼쪽에서 픽스로 그녀가 뛰다 쓰러져 울부짖는 걸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몇 안 되는 드문 카메라 움직임이 등장하지만 이때의 움직임은 (이 영화에서)비교적 가장 역동적이며 드러나도록 촬영되었다. 카메라의 이동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인물의 정면 숏이 나온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그녀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본다. 사실 그녀의 정면 숏은 그 전에도 나온다. 놀이공원에서 기구를 타는 영수를 바라보는 그녀를 정면 바스트로 보여주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때의 그녀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위쪽 너머를 보고 있다. 갑작스럽게 정면으로 쳐다보는 주인공과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카메라의 움직임. 이때 그녀는 단순히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뒤편 밖의 그 누구를 응시하고 있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마음의 고통, 뒤이은 자살적 행위, 이때 은희의 시선이 바깥 누군가와 마주한 듯한 이 이상한 전시의 효과. 혹은 그 착시가 불러일으키는 누구가를 향한 그녀의 애타는 마음.

여기에 덧붙여서, 이 씬이 끝나면 다음 장면에서 은희는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무심하게 영수의 가방을 싸고 있다. 이제 서야 깨어난! 영수는 태도가 바뀐 은희에게 말한다. "미안해.." 그러자 은희는 "미안하면 나랑 살거야?" 끝내 대답하지 못하는 영수는 은희와 시골집을 등지고 그렇게 떠난다. 이때 그의 모습을 그들의 집과 함께 익스트림 롱숏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오프스크린으로 들리는 은희의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영수가 프레임 오른 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거의 앞쪽까지 어느 정도 걸어 왔을 때 비로소 컷이 되고 그의 클로즈업으로 바뀌는데 오프스크린의 은희 울음소리는 그 크기가 줄지도 않은 채 그대로 들려진다. 그러니까 롱숏이었 때 그녀의 울음소리는 공간적 객관성을 갖게 되지만 숏의 사이즈가 바뀌어 클로즈업이었을 때에는 마치 영수에게만 그 소리가 들리는(혹은 아무리 듣지 않을려고 해도 들리게 되는) 심리적 주관성으로 전환이 된다. 그 순간,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는 그의 얼굴을 오랫동안 보여줄때 마치 그가 서둘러 이 세계 밖으로 나가려는 듯한 어떠한 안간힘이 느껴졌다. 왜냐하면 그녀의 울음소리는 이 숏이 지속되는 한 영원히 들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상한 지옥으로의 영겁회귀의 이야기

그런 다음 영화는 오랫동안 암전된 뒤 수개월 후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은희와의 일들을 모두 잊은 듯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하고 있는 영수를 보여준다. 그런데 그의 생활은 순탄치가 않다. 더욱 더 방종한 삶을 살아가던 그는 친구와 의절하고 전 애인과는 완전히 관계가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재발한 간경변으로 결국 (이번엔 정말로)병원에 입원해 말 그대로 나락에 끝자락에서 힘겹게 버티고 서있다. 영수가 그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수소문 끝에 찾아온 요양원 원장은 그를 은희가 있는 병원으로 데려가고 그들의 재회는 은희의 죽음으로 짧게 끝나고 만다.

그제 서야 자신의 삶과 그녀를 버린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는 영수는 마치 이 모든 걸 다시 시작하려는 듯 은희와의 행복했던 나날을 보낸 요양원으로 돌아간다. 헌신적인 연인을 버리고 환락 세계로 돌아간 남자에게 보란 듯이 찾아온 불행(그는 이 환락의 세계 안에 안주해 있으면서도 전 애인에게 "넌 이렇게 사는 게 즐겁냐?"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런 그를 다시 만났지만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보내주는 여자. 그런데 그 미소는 뭔가 석연치 않다. 얼마 안 있으면 곧 죽을 사람. 자신을 내팽겨친 남자의 처참한 몰골. 이때 그녀의 미소의 의미가 그를 다시 만났다는 것의 긍정이 아니라 마치, 그의 불행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자의 미소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그러니까 관객에게 서울로 다시 돌아간 영수의 삶을 보여줄때 그것이 자신을 버린 남자의 불행을 생각하는 은희의 환상이라면 어떻게 할 텐가.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라고 생각한다.



영수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 뒤 그의 생활을 영화가 보여줄 때 나는 이상하게도 영수의 주관적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라는 느낌을 받지 못 하였다. 그가 은희를 떠남으로써 마치 예정이라도 된 듯이 그의 불행을 영화가 차례로 보여줄때 그것이 누구가의 의해 펼쳐내 보여진다라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영수가 자신의 비릿한 삶의 현실을 거울에 비춰지는 자신의 얼굴을 통해 자각하는 장면에서도 그의 주관적 시점에 의해 그가 보는 자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45도 각도의 이동숏으로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영수를 거울 속 그의 얼굴과 함께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 왜 허진호는 이미 영화시작 앞에 자신의 세계에서 끝장 다본 남자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는가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지옥으로의 영겁회귀. 사실 그는 서울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갔어도 되었다. 그런데 그는 굳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어떻게 보면)불행을 자초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본래자리에 지키고 있는 사람들(친구와 전 애인)은 전혀 바뀐 게 없는데 왜 그는 그 세계가 자신의 빈자리로 바뀌어졌다고 착각하는가? 그리고 그는 왜 그곳에서 철저하게 망가지는가? 그러니까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 영화는 어떤 서사적 잉여안에 영수를 자꾸만 가두려고 하고, 이때 그들이 헤어진 이후의 서사와 그들이 다시 만난 이후의 서사 사이의 물리적인 시간의 지연, 생략 혹은 건너뛰기를 초래한다.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바로 이 영화의 배경인 계절의 순차적 방식이다.
 
분명 그들이 헤어지는 부분의 계절은 늦가을 혹은 초겨울이다. 그리고 영화는 다음해로 점핑하여 도시에서 생활하는 영수를 보여 줄때 서울의 계절은 여름이고, 다시 가을을 건너뛰어 그들이 병실에서 재회하는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만일 우리가 영화에서 영수가 다시 돌아간 서울에서의 시퀸스를 제거한다면 마지막 그들의 만나는 씬은 그냥 영수가 시골집에서 나오고 몇 일 뒤에 나오는 씬으로 붙여도 무방하다고 보면 어떻겠는가(여기서 영수의 얼굴을 엉망이지만 그가 입고 있는 옷은 그 앞에 영수가 잠깐 서울로 갔다가 시골로 돌아왔을 때 입었던 옷과 같은 옷이라는 걸 기억해 주길 바란다).


절망적인 마지막 숏

그렇게 놓고 보면 이상하게 서사 바깥에서 독립적으로 있는, 서울로 다시 돌아온 영수는 혼자 참으로 혹독한 여름을 난 셈이다. 은희와 행복했던 그 햇살 가득한 여름과는 다른 잔인한 햇살이 가득 찬. 그리고 그 햇살에 그는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병원 건물 앞에서 쭈그려 앉아있는 영수).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영수는 요양원 원장을 다시 만나게 된다. 카메라는 미디움-롱 사이즈의 투숏 안에 그들을 잡고 있는데 이때 화면 안의 음영이 이 두 사람의 공간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누고 있다. 그러니까 곧이어 그녀가 은희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데려다주는 씬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이 숏이 서사 바깥에 있는 영수를 다시 서사 안으로 개입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면 어떡하겠는가. 요양원에서 은희와의 생활이 영수의 환영이라면 그 대구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 영수의 상황이라면. 마치 디제시스 밖에서 영수와 은희, 서로가 상대방의 세계를 바라보고 그것이 환영이라고 말하며 위태로운 경계 긋기를 이어갈 때 그 사이에서 애처롭게 멜로드라마의 구조를 이어가는 그들을 우리는 바라보아야 한다.

그때 이제껏 영화를 보고 있었던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나? 결국 관객이 이 통속적인 이야기를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를 놓고 벌이는 허진호가 제안하는 게임의 방식에 관객은 자꾸만 무료해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영수는 다시 요양원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미 그녀가 죽고 없는 그 곳은 세상과 동떨어진 금욕과 감금의 공간이다. 마치 마지막 결말만 놓고 보면 리베트와 올리베이라의 근작들이 떠올려 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비약인 것이 이건 그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시키기 위한 허진호의 영화이다. 타락한 남자가 지고지순한 사랑을 저버린 비통한 사연. 그가 정말 낯선 곳에서 다시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사랑할 수 있을까? 정말 (관객으로 하여금 평등하게 하기위해)영화는 이 마지막으로 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눈바람이 날리고 어두운 구름을 배경으로 한 요양원으로 영수가 들어가는 모습이 이 영화의 마지막 숏이다. 참으로 절망적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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