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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의 반가운 귀환 [행복]

필진 리뷰 2007. 10. 12. 07:56 Posted by woodyh98

바람을 휘모는 여자

은희(임수정)는 ‘바람을 휘모는 여자’다. 그리고 그녀는 폐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중증 폐질환자다. 일반인의 40% 정도의 기능밖에는 쓸 수가 없다. 마음 놓고 뜀박질 한 번 할 수 없다. 대신 은희는 바람을 휘몰이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법을 가지고 있다. 스크린 앞 관객인 우리는 그녀의 마법을 ‘볼’ 수 있는 귀한 행운을 선사받는다. <행복>에서 은희의 바람/바램은 어느 순간 훨훨 한판 춤사위를 펼친다. 그 바람은 어느 순간 우리 눈앞에서 목격되더니 또 어느 사이 우리의 피부 속으로 들어와 박혀버린다. 그 바람을, 영화 속 이미지에 불과한 바람을, 지각할 수가 되는 것이다. 기이한 체험이다. 또, 그것은, 진귀한 체험이다.

영수(황정민)와의 첫 읍내 나들이. 그 둘은 ‘함께’ 버스를 탔으며, ‘함께’ 자장면도 먹었고, 또, ‘같이’ 영화도 보았다. 요양원으로 돌아오는 언덕길 중턱. 숨이 차올라 어느 돌 위에 걸터앉은 은희가 영수와 첫키스를 하던 그 순간, 은희 주위 바람의 미세한 결들이 자르르 춤을 춘다. 바람의 소리도 덩달아 스스스 들린다. 그리고 느껴진다. <봄날은 간다>에서도 그랬다. 허진호는 영화 속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우리 몸에 각인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이다.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영화 속 환경을 바라보던 내 몸이 움찔움찔 무조건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새삼 느끼게 된다. 일상의 지극히 단조로운 편린들이 어느 순간 표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을. 그 순간은 허진호의 마법이 펼쳐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 무-의미는 의미가 된다. 존재는 탈-존재(ex-sistence)가 된다.

하지만 변한 건 없다. 은희 주변의 바람은 그제나 저제나 항상-이미 그 곁을 지키고 있던 것이다. 내 삶을 채우던 내용물은 어제나 오늘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을. 마찬가지로 미래에도 내 삶의 내용물은 별반 달라질 게 없다. 물론 지금은 급변하는 소위 ‘현대’다. 현대(modern)라는 말로도 모자라 그 앞에 ‘탈/후기’(post)라는 접두어까지 갖다 붙이는 세상인 것이다. 언제 어느새 무엇이 변할지 모른다. 우리의 일상을 채우는 사물들은 지금 현재에도 이른바 ‘영구 혁명’을 겪고 있는 중인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적어도 허진호는 ‘상품’의 영구혁명을 믿지 않는 ‘보수적인’ 사람이다. 영수가 서울에 올라와 머무는 예전 여자친구인 수연(공효진)의 고층 오피스텔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의 정경을 보시길. 요양원이 있는 시골 한적한 풍경보다도 어찌나 단조롭고 무미건조하게 묘사되어 있는지. 그에 비해 계절이, 환경의 변화가 느껴지는 시골의 모습은 외려, 어쩌면 역설적이게도, 어찌나 다채로운지.

때문에 삶의 내용 ‘그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고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삶의 내용을 채우는 형식 ‘그 자체’야말로 시시각각 얼마나 다채롭고 풍성하냐고,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첫키스를 나누던 그 때 그 순간 은희와 영수 곁을 휘돌던 바람의 존재감은 그 이전의 그것과 얼마나 그 존재론적 위상이 다르냐고,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둘의 첫 읍내 나들이 때 같이 먹던 자장면은 또 얼마나 다르냐고 허진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은희의 느린 밥 먹는 속도가 언제는 ‘지겹게’ 돌변하는 것이고, 노후 자금 몇 십억의 존재감이 또 언제는 제 삶의 가장 확실한 (것‘처럼’ 보이는) 지향점으로 다가와 내 삶을 결정짓는 것이며, 영수와 은희 둘의 존재감으로 꽉 채워지던 그들 살림집의 저 충만함이 언제는 또 은희 하나만으로도 채워져야만 하는 것이다, 라고 허진호는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매번 변하는 사랑의 마음, 그것의 내용도 새로울 것이 없는 거라고, 도대체, 맙소사, 제길헐, 허진호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의미에서 의미로

어떤 삶의 내용(물)은 의미가 되고, 또 어떤 삶의 내용(물)은 무-의미가 된다. 의미에서 무-의미에로의 전이. 그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빈 공간이 있다. <행복>에는 삶과 죽음의, 시골과 도시의, 그리고 행복과 불행의 간극이 존재한다. 그리고, 영수를 찾아온 수연의 도시적 패션감각과 은희의 수더분한 시골 패션감각이라는, 이번엔, 서울로 올라간 영수의 손에 어울리지 않게 들려진, 은희가 건네준 분홍색 꽃무늬 곶감 보따리와 그 보따리를 저 위에서 휘두르는 깜깜한 도시의 빌딩숲이라는, 사이-간극이 존재한다. 간극이 있다는 것이다.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것이다. 이 간극을 어찌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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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읍내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던 요양원 언덕길에서 은희는 말한다. “영화관에서는 남녀 연인이 손도 잡고 그런다던데.” 영수도 화답한다. “이렇게 한적한 오솔길을 남녀가 걸을 땐 뽀뽀도 한다던데.” 은희는 손을 잡자고 말하지 않는다. 영수는 뽀뽀를 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바로 그날이던가? 비가 내리는 요양원의 밤에 은희는 영수에게 또 이렇게 말한다. “이 방에서 귀신 나온다던데.” 은희가 말하지 않은 건 귀신이 나오는 방이니 함께 있자,라는 말이다. 은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간극의 언어’는 서로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또, 마법같이, 그 빈 공간이, 간극이, 빈틈이 메워진다.

영수의 요양원 룸메이트 아저씨 석구(박인환)가 쪽지 한 장을 남기고 요양원 식구들과 ‘작별’하던 날. 쪽지에는 짤막하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잘 죽는다. 너는 잘 살아라.” “너는 잘 살아라”라고 했건, “너‘도’ 잘 살아라”라고 했건 문자적 표현이 중요한 게 아닐 것이다. 석구의 진의는 “너‘도’ 잘 살라”는 것일 게다. 못나게 죽고 폼나게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저는 잘 죽고 너는 잘 살자는 것이었을 게다. 놀라운, 이번엔, 석구 아저씨의 마법. 죽음과 삶의 간극이 허물어진 것 아닌가!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물이 일치(!)한 것이다. 그러니까 헤겔의 ‘대립물의 일치’.

행복과 불행이라는 대립물의 일치도 마찬가지 아닐까. 대립물의 일치는 곧 세계의 균열을 뜻한다. 변심하여 마음이 흔들리는 영수가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아, 미치겠다”고. 왜 미치겠다는 걸까. 해결책이 보이지 않으니까,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 자신의 마음이 분열되어 있으니까. 도무지 이 세상을, 자기 마음을 알 수 없겠으니까. 나도 모르겠다. 당신은 아시는지. 알면 부디 이 미약한 나에게도 선처해주어 알려주시길.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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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삽입곡으로 한대수씨의 <행복의 나라>가 쓰인다. 엔딩 크레딧 때 이 곡이 흐른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은 한동안 이 곡의 여흥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지도 모른다. 어떤 영화는 음악이, 삽입곡이 마음 한 켠에 오롯이 박혀버리곤 하는데 <행복>이 그렇다. 허진호 감독 또한 <행복>의 시작이 <행복의 나라>였다고 밝힌다. “무엇보다 내가 <행복>을 만들게 된 건 한 대수 버전의 노래 ‘행복의 나라로’를 영화 속에 꼭 넣고 싶었다는 것, 그리고 앞서 말했듯 아프고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외딴 곳에서 둘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화관 암등이 켜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더라도 끝까지 조금만 더 자리를 지키고 앉아계시길. 감독의 마지막까지의 배려에 끝까지 화답해주시길.



좋은 멜로드라마

멜로드라마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신파적일 수밖에 없다. 허진호의 눈부신 전작들과 비교해봤을 때, <행복>의 중반 이후 역시 다소 신파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허진호의 <행복>은 그럼에도 ‘좋은’ 멜로드라마다.

좋은 멜로드라마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신파적 서사의 빈틈을, 그것을 지켜보는 수용자-관객-독자 자신의 서사로 채워 넣을 여지를 제공해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행복>이 그랬다. 영수의 변심, 그것에 뒤이은 작별의 순간 앞에 직면한 은희는, 한 번도 원 없이 해보지 못했던 뜀박질로 자신의 폐를 자극한다. 은희는 예전 첫키스 때의 바람의 마법을 다시 한 번 불러일으키고 싶다. 차가운 비포장 도로 위에 나둥그러진 은희의 몸 주위로 바람의 마법이 다시 한 번(!) 찾아온다. 하지만 예전 그 때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바람의 마법은, 이번엔, 건조한 낙엽의 휘몰아침만을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이 순간 나의 서사는 ‘언제 어느 때’로 점프한다. 자정을 전후로 한 흑석동 미로의 골목 사이사이를, 어디가 어딘지 알지도 못한 채, 엉엉, 꺼이꺼이 곡소리를 내던지며 휘젓고 다니던 그 때 그 언제로. 한 대수씨의 <행복의 나라>와 함께 스크린 위를 오르던 엔딩 크레딧 때도 나의 서사-기계는 또 한 번 작동한다. 여러 스탭들의 이름 사이에서 어느새 나의 이름과 그의 이름을 발견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허진호의 <행복>은 우리에게, 자신의 잊고 싶었으나 결코 잊고 싶지 않았던 개인적 서사와 마주 대면할 기회를 제공해줄 것이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그 때 소환되는 서사는 ‘행복’의 서사가 될 것이다.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던 요양원 체조를 하던 영수와 은희의 서사처럼 말이다. 그러니 허진호의 <행복>은 ‘좋은’ 멜로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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