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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14


과거를 현재화 하는 영화의 상업화된 기억 자체는 제 목적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조정되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집단적으로 공유된 기억을 역사라 하고,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을 기억이라 한다. 이에 따라 영화는 개인이나 등장인물의 기억과 그 기억을 관객과 공유하기 위해서 역사화하곤 했다.(註1) 그러므로 민족의 기억은 관객의 동일화를 얻어내기 위한 적절한 서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국 관객들이 집단적 기억이나 공적 경험을 다룬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반면 역사화 된 기억과 개인적 경험에 머무른 기억 사이에서 발생한 괴리는 관객을 혼동 시키게 된다. 게다가 역사의 행위주체자로 여성이 전면에 등장할 때 관객은 갈등과 모순을 더욱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한국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남성중심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하위 텍스트에 머물거나 후일담의 형식으로 거론될 뿐인 여성역할의 축소 은폐 경향은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발견되고 있다. 이제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에 나타난 여성의 역할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영화가 ‘광주민주화운동의 심장부까지 들어간 여성의 모습을 역사의 행위자로서 그려내고 있는가, 아니면 남성주체의 수동적 조력자에 머물고 있는가?’에 집중해서 읽어볼 것이다.


애도하는 자로서의 여성

다이 진화 戴錦華가  「그녀의 행동과 내레이션은 역사의 이면에서 발생한다. 남성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아름답게 색칠된 스크린의 덧칠 혹은 동떨어진 모호한 배경이 바로 그 이면 」(註2) 이라고 강조한 바대로, 대체로 영화 속 여성들, 특히 전쟁물과 역사적물처럼 남성세계를 그려낸 영화 속 여성들은 남성의 조력자를 넘어서지 못했거나 가정과 몸담은 조직의 울타리 밖으로 나오는 법이 드물었다. 즉, 여성은 역사의 주체나 행위자가 되지 못한 채, 죽은 남성을 애도하는 자로서 혹은 죽은 남성의 아이를 낳는 생산자로서 아니면 민족의 상징적 담지자로서 재현되곤 했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80년의 광주를 다룬 몇 편의 영화들, 이를테면 장선우의 [꽃잎](1996)과 이창동의 [박하사탕](1999)에서 여성은 남성을 애도하는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꽃잎]의 소녀는 죽은 오빠를 애도하며, [박하사탕]의 순임은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도 김영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로 기능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여전히 두 여성은 소녀 오빠의 친구들에 의해 기억되거나 김영호의 기억 속에 남겨진 첫사랑이라는 존재에 머물고 만다. 그렇다면 [화려한 휴가]에서 여성은 어떤 역할을 부여 받았으며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가?

80년 광주의 이야기를 그린 [화려한 휴가]에서 주요한 여성 캐릭터는 세 사람으로 압축된다. (영화초반 용대의 분탕질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 사라진 다방여급 미스 김도 포함해야 할까?) 어쨌거나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신애와 광주의 어머니로 상징되는 창수 모친, 그리고 인봉의 처까지, 이렇게 세 명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주인공 중 한사람이라 할 수 있는 신애를 보자.


광주의 목소리- 신애

영화에서 신애는 간호사이면서 한 남성의 흠모의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까 멜로드라마의 외피를 두른 영화에서, 10일간의 투쟁 기록은 이루지 못한 슬픈 연가와 등가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 영화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면서도 전면에 멜로드라마를 내세운 전략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민족주의를 표명하고 역사의 틈바구니를 헤집고 들어간 영화들 치고 여성의 역할을 주체적으로 묘사한 사례가 거의 없었거니와 하나 같이 멜로드라마라는 안전판 위에서 인물의 정체성을 고수하는 전술을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대체로 영화 속 여성은 이중적으로 서술되어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즉 여성이 홀로 자신을 드러내거나 내러티브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남성이라는 매개를 통해서 그 역할과 의미를 부여 받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남성의 회상이나 시점, 혹은 기록을 통해서 자신의 이미지와 기호를 획득하게 된다. 이렇게 텍스트 내에서 또 다른 텍스트가 생성되는 미장 아빔 mise-en-abyme(격자구조)은 여성의 주체성 형성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핵심기제라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애는 영화담론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가?

영화에서 신애는 강민우와 거의 한 몸을 이룬 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고 있다. 동생 진우를 태우고 간 성당과 운동회와 극장은 물론이고 시위현장과 시민군과 계엄군이 총격전을 벌이던 금남로에서도 어김없이 그녀는 목격되고 있다. 강민우가 연모하는 대상으로서의 신애의 잦은 등장을 문제 삼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민우와 신애 사이에서 싹트던 애정과는 별개로 그녀의 등장이 갖는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애는 영화가 진행될 수 록 다양한 남성들과 관계 맺으며 사소한 개인에서 역사의 목격자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평범했던 운전기사가 총을 들게 되는 명분을 동생의 죽음이 제공했다면, 그 명분을 강화시키고 광주사수의 정신을 북돋우며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을 혼자 남겨두지 않겠다"는 다짐의 부추기는 것도 신애의 역할이다. 이렇듯 신애는 남성인 민우의 정체성 분열을 막아내면서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기능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그리하여 광주를 사수해달라고, 우리를 잊지 말고 기억해달라는 외침을 통해 마지막 증인되기를 자처하게 된다. 그렇다면, 신애는 이 모든 역할을 독자적으로 수행해왔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에서 드러나듯이 신애를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놓이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강민우라는 남성주인공이다. 그녀가 민우의 시야에 들어옴과 동시에 그녀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애초에 그가 신애의 병원으로 찾아가지 않았다면, 영화 관람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계엄군의 만행을 목도하지 못했다면, 진우의 죽음을 지켜보지 않았다면, 그녀가 총을 들어 계엄군을 쏠 일도 없었을지 모르고 마이크를 들고 광주의 목소리 되기를 자처하지 않았을 런지도 모른다. 그저 실려 오는 부상자를 치료하는 역할에 그치고 말았을 런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은 그 시절 광주 여성의 역사의식이 남성에 못 미쳤다거나 수동적 위치에 머물렀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영화가 여성을 재현해내는 방식을 말하려는 것이다.


광주의 여인- 창수 모친과 인봉의 처

다음은 창수 모친의 경우이다. 민우가 계엄군에게 쫓겨 숨어들어간 집에서 아들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끝내 주검이 된 아들을 부여안고 오열을 터뜨린다. 사실 영화에서 이 어머니의 역할과 비중은 크지 않다. 그럼에도 배우 나문희가 가진 무게감은 수많은 희생자의 어미를 대표하는 상징적 어머니로 그려지고 있다. 게다가 눈까지 먼 그녀의 육체가 드러내는 한은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다. 또한 영화에는 몇몇의 아내 혹은 어머니인 여성이 등장하고 있다. 계엄군에게 뭇매를 맞아 죽은 병조의 어머니와 인봉의 처가 그들인데, 인봉의 부인의 경우는 도청에 애를 업고 와서는 집으로 데려가는 데 까지 성공하지만, 최후의 결전을 앞둔 밤 인봉의 출정에 이를 악물로 눈물을 참고 보내야 했던, 그 시절 광주 여인을 대리하고 있다. 그녀 역시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편 훗날 역사의 주체가 될 남성(아들)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재생산자 역할 또한 충실히 수행 할 것임에 분명하다.

이렇게 [화려한 휴가]속 여성들은 기존의 역사를 소재로 한 한국영화 속 여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신애라는 여성주인공이 남성의 성적대상이기는커녕 숭고한 정신의 계승자로서 그리고 그 정신을 전파하고 사적기억을 공적역사로 치환시키는 담지자로서의 역할확장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다른 캐릭터들과의 차이를 둘 뿐이다.


역사의 각주로 표기된 여성들

주지하다시피 [화려한 휴가]는 멜로드라마의 이름으로 공적역사를 소환하고는 환기시키는 영화다. 영화가 배경으로 삼은 10일 간의 치열한 투쟁이 남성중심으로 이뤄졌음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단순가담자로 분류시키어, 시민군에게 밥을 해주거나 부상자를 치료하거나 아니면 거룩한 전투를 앞둔 남편의 옷소매를 잡아끌면서 남성 정체성을 균열시키는 수동적 조력자 정도에 머물게 만든 것은, 이 영화가 이룬 성취나 의미를 떠나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제아무리 역사 속 여성의 강인함을 논한다 할지라도, 모든 남성이 몰살되는 상황일지라도, 여성은 남성을 애도하고 그의 죽음을 기억하여 증언할지언정 총을 들고 적의 심장을 겨누는 대열에 당도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것마저 스펙터클로 치환하면서 관객의 심금을 울리려 한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남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역사에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자로서의 여성, 설사 그 매개체에 힘입는다 하더라도 역사의 각주로 표기될 수밖에 없는 여성의 위치를 영화가 재확인시켜 주는 지점이다.

모두가 웃고 있는 사진 속에서 결코 웃지 않는 신애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광주의 끝나지 않은 아픔을 본다. 그것은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역사가 빚어낸 그림자 뒤에 웅크리던 여성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남성중심의 역사 속에서 산화하지 못한 채 죽은 자를 애도하는 처지에 놓인 자신이 못미더운 표정이다. 또한 살아남았으되 20년 가까운 세월을 침묵해야했던 광주 시민들의 단장을 애는 심정이 담긴 얼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외상(外傷)의 기억은 향수라는 감정 등을 통해서 주체가 보존하고 싶은 감정이 아니라 의식 속에 사라졌다고 여겼던 것이 현실로 뒤늦게 갑작스럽게 되돌아와서 고통과 상처를 낳는 것이다. 외상이 잠재성과 뒤늦음을 특징으로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간당한 도시, 광주를 위하여

너무 늦게 너무 멀리 돌아 우리 앞에서 다가온 80년 광주의 이야기가 [화려한 휴가]를 통해 첫 발을 뗐다. 그 의미 있는 시도에 박수 보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과연 영화 속 여성들이 그리고 신애가 그날 살아남은 자로서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고 외치는 광주의 목소리가 되기에 적합한 인물로 그려진 것인지 되묻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화려한 휴가]에는 도저한 역사의 시선이 결여되어 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희망과 새 시대의 가능성을 찾을 수 없다. 눈물이 흐르지만 가슴 절절한 아픔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 광주는, 그저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주듯 ‘종료된’ 역사에 다름 아닌 것이다. 때문인지 몰라도 자꾸만 [꽃잎]의 소녀가 머리 속에서 맴돈다. 강간당한 소녀가 광주요 광주가 곧 강간당한 소녀라는 메타포가 머리를 어지럽힌다.

‘......그녀가 당신에게 다가오더라도 걸음을 멈추지 말고, 그녀가 지나간 후 뒤를 돌아보지도 마십시오. 그녀를 무서워하지도 말고, 그녀를 피해 뛰면서 위협의 말을 던지지도 마십시오. 그저 그녀의 얼굴을 잠시 관심 있게 바라보아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 최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중에서


註1 : <한국영화라는 낯선 경계 > 김선아, 커뮤니케이션 북스.
註2 : <영화와 욕망 : 다이진화의 연구에서 페미니스트 맑시즘과 문화정치학(Cinema and Desire:A Feminist Marxism and Cultural Politics in the Work of DaijinHua)> 다이 진화, 뉴욕: ver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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