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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1


재수생 시절, 수능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화영연화]가 개봉했다. 순진했던 나는 내 인생의 ‘화양연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상상하며 이 영화의 관람을 포기했다. 왕가위는 너무도 많이 얘기되는 작가였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비디오 관람의 체험으로 이해되는 작가 중 하나였다. 물론 이런 작가는 무수히 많다. 심지어 100살에 가까운 올리베이라의 영화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한편도 못봤고, 100편의 영화를 찍은 임권택의 영화를 스크린으로 본 건 한 손으로 겨우 꼽을 정도다. 이 부분에 있어 영화라는 매체는 상당히 취약하다. 음악과 도서는 시공을 뛰어넘어 내가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축복된 환경 속에 늘 놓여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는 ‘개봉’ 이라는 시간과, ‘스크린’ 이라는 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는 타이밍이다. 무조건 보고 싶은 영화가 수두룩하지만, 절대로 볼 수 없는 환경에 처해있다면 죽었다 깨나도 주어진 시공을 초월하기 힘들다. 그래서 영화는, “나는 이 영화 언제, 어디서 보았다.” 라는 체험이 괜한 자랑이자 특권이 될 수도 있는 환경에 놓여있다. 반면에 그러지 못해 거의 죄의식 수준으로 시달리는 사람도 꽤 있다. 오늘 낮에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와 인터뷰가 있었다. ‘시네마테크 친구들 영화제’와 ‘2008년의 시네마테크의 운영계획’ 등에 관한 얘기가 주로 오갔다. (이 인터뷰는 곧 게재될 예정이다) 그리고 스크린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의 의미와, 영화를 대하는 겸손한 태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렇다. 시네마테크는 나 같은 게으른 동시대의 관객들과, 혹은 영화 매체의 탄생을 목격하지 못한 모두의 동시대 관객을 위한 매일 재개봉관이다.

스크린으로 처음 접한 왕가위의 영화는 어느 날 깜짝 상영의 기회로 본 [아비정전]이었고, 개봉작의 첫 경험은 2004년의 [2046]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왕가위의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일종의 부채의식을 갖은 그런 부끄러움이 동반된 짝사랑이(었)다. [화양연화]를 2007년 마지막 날 하루 전, 다시 보았다. 언제까지 빚쟁이가 되어 고개 숙이기 싫었다. 무엇보다도 스크린 앞에서, 이 영화의 ‘무드’ 에 온몸으로 압도당하고 싶다는 매저키스트의 욕망이 불끈 솟았음을 고백해야겠다.

“아” 라는 감탄사가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은 어머니가 내뱉는 “아” 의 감탄사로 시작한다. 소설의 ‘나’는 “아” 라는 감탄사를 “뭔가 참을 수 없는 수치심에 사로잡힐 때, 그 묘한, 아, 하는 가녀린 비명이 새어나오는 법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새어 나온 것이지만, 아까 어머니의 그 탄식은 도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설마 어머니에게 나와 같은 부끄러운 과거가 있을리는 없는데, 아니, 그렇지 않으면 뭐지?” 라며 어머니의 발화에 의문을 품는다. 그렇게 “아” 라는 단독의 감탄사는 여러 의미로 궁금증을 유발한다. 나 역시 [화양연화]를 보며 저 무수한 의미를 생산해내는 단말마를 남발하며 끙끙거렸다. 솔직한 말로 이 영화를 다시, 그러나 처음으로 보고, 이 영화에 관한 글을 쓰기가 어렵겠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람은 자신이 어떤 압도적인 감정적 경험을 하게 되면, 그 상황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싶어한다.” 라고 누군가는 말했으나, 그리고 이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기도 하나, 오늘은 동의할 수 없음에 무게가 실렸다. 그럼에도 난 또 왜, 어떻게든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고 있는가.

[화양연화]에는 세 번의 ‘연기’가 있다. 양조위와 장만옥은 차우와 첸부인을 연기하고, 차우와 첸부인은 그들의 배우자, 혹은 그들 자신을 연기한다. 왜 그들은 연기하는가. 그것은 ‘진짜’에서 받을 상처의 무게를 줄이기 위한 목적의 연기다. 물론 그들은 세 가지 상황에서 모두, 어떤식으로든 온전한 연기에 실패한다. “인생에 연습이 어디 있나” 라는 한마디로도 설명할 수 있겠지만 다른 말로 이 상황을 바라보자. 첫 번째 상황, 바람핀 배우자들이 어떻게 만남을 시작했는지에 대한 상상. 두 번이 반복된다. 남자(첸부인의 남편)가 먼저 꼬시느냐. 여자(차우의 아내)가 먼저 꼬시느냐. 의 두가지 버전 사이에 남는 건, 하여튼 그들이 바람폈다는 끔찍한 실재다. 두 번 째 상황, 첸씨가 첸부인에게 바람핀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의 상상. 이 역시 두 번이 반복된다. 하지만 두 번의 연기를 통해 남는 건 사실 혹은 사실가능 여부를 판단하는 깔끔함이 아닌 역시 끔찍한 실재로 다가오는 감정의 파동이다. 세 번째 상황이 오직 한번만 반복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차우는 이별연습을 제안하지만, 이건 실제로 이별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와 두 번 째 상황은 말 그대로 상상의 시나리오 속에서 어떤 논리적인 답안을 찾으려는 불가능한 연습이었다면, 세 번 째 상황의 시나리오는 그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완성된다. 차우는 이별연습을 제안하기 전에 첸부인에게 고백한다. “날사랑했다는 말인가요?” 라는 첸 부인의 말에 그는 “나도 모르게...걷잡을 수 없이..” 단 한번의 연기 속에서 첸부인은 흐느껴 울고, 차우는 “울지마요...연습인데...” 라고 위로하지만 첸 부인은 차우의 고백에 같은 말로 대꾸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이별연습이 진행되고 있는 공간은 첫 번째 연기를 보여줬던, 바람난 배우자들이 서로 밀회를 나눴다고 가정했던 그 터널 속 공간이다. 그리고 차우와 첸부인이 만나게 된 계기는 배우자들이 바로 그곳에서 그런 식의 밀회를 즐겼기 때문이다. 밀회를 나눴다고 가정되는 이 공간에서 불륜은 시작되었고, 첸부인과 차우는 상상과 실재가 혼합된 이 공간에서 관계의 끝을 맺는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곳에서 두 번을 이별을 겪는다.

왕가위의 영화는 ‘무드’로 설명이 가능하다. 모순된 말이지만, 무드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은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말과도 통한다. 세 번의 연습이 필요했던 이유는, 결국 마지막 그 세 번 째 상황에서 분출되는 파토스를 ‘감각’할 수 있게끔 한 센스쟁이 왕가위의 필연적인 선택이자 배려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영화 중 하나는 센티멘탈한 요소를 값싸고 성의없게 곳곳에 배치시킨 영화다. 분명 왕가위 영화는 센티멘탈리티의 힘으로 무드를 이끌어 간다. 다만 차우의 말대로 “ 나도 모르게...걷잡을 수 없이..” 그렇게 나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이 스크린 속 [화양연화]에 매혹당했다는 말이 너무 길어졌다. 결국 난 또 영화를 설명하겠다는 욕망에 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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