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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좋아. 열 받으면 지는 거죠”


영화 [8마일]에서 주인공 버니 래빗의 친구이자 랩베틀의 진행자이기도 한 퓨처는 살기등등한 기세로 서로를 노려보는 랩퍼들을 달래기라도 하듯 저렇게 말한다. 맞다. 옳으신 말씀이다. 싸움도 냉정하고 침착한 놈이 더 잘하는 법. 흥분 잘하고 열 내기 좋아하는 놈은 소리만 요란할 뿐 실속이 없다. 결국 승리는 차분하게 결정타를 날릴 기회를 기다릴 줄 아는 녀석이 가져가게 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욕설과 분노의 찌꺼기들을 마구 마구 긁어 모아 상대방의 면전에 토해내는 랩베틀의 세계에서 은근슬쩍 차분함과 냉정함의 미학을 설파하다니. 물론 두 말할 필요 없이 분노는 갱스터랩이 지닌 에너지의 원천이다. 랩베틀의 현장에서 랩퍼들이 서로에게 쏟아내는 랩 가사의 내용도 태반이 상대방에 대한 비방과 욕설들뿐이다. 앨범에 수록되어 발매되면 ‘19금’ 딱지가 붙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불량하며 불온한 에너지로 들끓는 뒷골목의 세계. 아마도 이것이 갱스터랩과 랩베틀에 대한 고정관념일 텐데 [8마일]을 보고 난 뒤에 떠오른 생각은 랩베틀의 세계가 폭력적인 성향을 띄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게까지 폭력적이지는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렇게까지’라는 수식어가 이도 저도 아닌 듯 애매하게 느껴진다면 다시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어차피 랩베틀의 주요 내용을 이루는 게 조롱과 비방인 다음에야 여기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정치적 공정성을 기대한다는 건 무리일 것이다. 분명 갱스터랩 자체는 과격하다. 하지만 총대신 마이크를 든 갱스터들이 일합을 겨루는 랩베틀의 현장은 일방적이지도, 무자비하지도 않다.

그곳은 확고한 룰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무턱대고 선빵을 날릴 수도 없고 내가 한바탕 독설을 쏟아 부었으면 상대방에게도 반박의 기회를 줘야만 하며 기분이 상했다 해서 멱살잡이를 하거나 주먹을 날려서도 안 된다. 오로지 랩으로만 눈 앞의 적을 난도질할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선 상대방의 흠집을 하나라도 더 찾아내야 하고, 자연스럽게 주도 면밀한 관찰이 이뤄질 것이며 당연히 냉정함을 유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열 받으면 지는 거라는 퓨처의 말은 괜한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승패가 갈라지게 되면 결과에 대한 깨끗한 승복이 이뤄지니, 이쯤 되면 과연 랩베틀을 험상궂은 청년들의 불량한 모임 정도로 치부할 수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랩베틀이 벌어지는 클럽 내부에서만 그러는 것 아니냐고? 그렇다면 다른 장면을 주목해 보도록 하자. 버니 래빗이 일하는 공장의 노동자들이 점심시간에 급식차 앞에서 주거나 받거니 랩을 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시발점이 되는 것은 역시 막연한 분노다. 갑갑한 현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분노를 쏟아 붓기에 적당해 보이는 만만한 상대를 향한 분풀이. 그 결과는 동성연애자인 공장 동료를 향한 비방과 조롱으로 이어진다. 식사중인 노동자들의 이목이 집중된 이 현장을 버니 래빗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누군가의 성 정체성을 두고 면전에서 폭언을 일삼으니 명백한 인신공격이요 인권침해의 현장이 아니겠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자리에서 오고 간 것은 막말이 담긴 랩 가사가 전부이다.

같은 공장에 동성연애자가 있다 해서 근무조건 상의 불이익이 가해진 것도 아니고 집단 구타를 한 것도 아니다. 거기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편을 들어준 다른 노동자도 있다. 반박의 도구 역시 랩이며 이렇게 즉석에서 벌어진 베틀의 현장에서도 클럽과 마찬가지로 룰은 지켜진다. 회식 자리에서 술 퍼 마시고 멱살잡이 하는 것 보다는 훨씬 흐뭇한 광경 아닌가? <8밀리> ⓒ유니버설픽처스물론 편견도 없고 화낼 일도 없는 세상이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분노할 일이 없다면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날릴 일도 없고 조롱을 당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노를 어떻게 제어하고 다스리느냐의 문제다. 공정함과 배려의 시선까지는 심어주지 못하겠지만 랩과 랩베틀로 이루어진 거리의 문화가 분노를 순화시키는 창구의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버니 래빗을 둘러싼 현실이 각박하다 보니 [8마일]의 세계에도 분명 폭력은 존재한다. 영화 속 디트로이트의 거리는 그다지 살기 좋은 환경은 되지 못한다. 거기다 애인이 다른 남자와 몰래 정사를 나누는 현장을 목격한다면 어느 누구라도 버니 래빗처럼 폭발하고 말 것이다. 허나 이 상황이 주는 교훈은 딱 한가지뿐이다. 폭력은 결국 더 큰 폭력을 부르게 된다는 것. 흠씬 두들겨 맞고 도망간 녀석이 자신의 패거리를 끌고 와서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달리 무슨 도리가 있을까? 이쯤 되면 애인 뺏기고 집단 구타까지 당한 버니 래빗의 굴욕과 분노를 해소할 수 있는 건 랩베틀 무대에서의 승리 밖에 없어 보인다.

그것은 더 큰 폭력을 불러오지도 않고, 본인 스스로나 다른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도 않으면서 상대방을 산산조각 낼 수 있는, 정당하고 합법적이면서도 가장 달콤한 복수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버니 래빗의 복수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복수에 불과하다. 그의 현란한 랩이 눈가의 멍자욱을 지워주지도 못할 것이고 그가 겪은 것만큼의 물리적 고통을 상대에게 안겨 주지도 못할 것이며 무너져 버린 신뢰를 회복시켜주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신분상승을 위한 고속 승강기가 되어주는 것 또한 아니다. 그러나 버니 래빗이 느끼는 쾌감만큼은 진짜다. 언어와 리듬으로 짜인 랩이라는 틀 안에서 심사 숙고한 결과이기에 그것은 예술적이면서도 지적인 성취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게 바로 문화가 지닌 힘이 아닐까? 대중을 위로하고 그 속에 맺힌 응어리를 순화 및 해소시키며 또 다른 차원으로 승화시키기도 하는 것. 한 손엔 색안경을, 또 다른 한 손엔 19금 딱지를 손에 든 사람들에겐 거리의 청년들이 쏟아내는 그 직설적인 에너지가 여전히 세균폭탄과 같은 위험물질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진짜 위험한 것은 따로 있다. 폭력적인 대중문화를 승인하는 사회와 일상 속의 폭력을 묵인 및 승인하는 사회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위험한 사회일까? 일상 속의 폭력은 일방적이며 무자비하다. 그것은 순서 따윈 기다리지 않는다. 그리고 반박의 기회도 주지 않는다. 그저 선빵부터 지르고 무자비하게 상대를 밟아대기만 할 뿐이다.

[체인질링]의 크리스틴 콜린스는 자신의 아들에게 ‘먼저 싸움을 걸지는 말되 마무리는 네가 지어야 한다’는 합리적인 가르침을 제시했지만 우리는 사실 ‘누가 괴롭히면, 누가 건드리면 참지 말고 그냥 싸워라’라는 즉각적인 행동강령에 더 익숙하다. 확실한 기준점 없이, 애매하고 자의적인 고무줄 잣대에 따라 싸워라, 때려라, 라고 교육 받다 보니 폭력에 대해서도 그럴 만 했다, 상대가 먼저 원인 제공을 했다는 식으로 둘러치기 일쑤다. 보다 크고 거대한 폭력에 대해서도 책임은 고사하고 치졸한 변명만을 남발한다. 과연 이런 사회가 대중문화의 폭력성을 훈계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알고 보면 랩베틀의 현장이란 기본적인 소통이 보장된 곳이다. 그곳에서는 뭔가 반박의 여지를 찾아내기 위해서라도 상대방의 독설을 들어줘야만 한다. 버니 래빗이 파파독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도 자신을 향한 조롱을 새겨듣고 되받아 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힘과 권력을 앞세운 폭력은 일방적이다. 거기에는 소통의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다. 상대방의 말은 생떼거리 쓴다며 외면하고 여기저기 금기의 표찰들을 날려대며 몽둥이질을 가하는 사회가 안전해 봐야 얼마나 안전하겠는가. 애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말은 곧잘 하는데 기왕이면 싸우는 방법도 제대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교과서에만 적을 일이 아니라 그 질풍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하긴, ‘UNDER MY SKIN’도 용납 못해서 기어코 ‘UNDER MY SKY’로 바꿔 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바랄까. 그저 분노를 토해낼 마이크조차 갖지 못한 사람은 이렇게 글이라도 쓸 수 있게 내버려 둬 주길 바랄 수 밖에.


<8밀리> ⓒ유니버설픽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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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캬 글참예술이네

    2009.07.16 01:10
  2. EMINEM  수정/삭제  댓글쓰기

    흥분을 덜해야지 디스걸때 무슨 말을할지 더 잘떠오르자나

    2012.07.25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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