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영화는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표현'(expression)이며 '창조'(creation)다.

역시나 이명세 감독의 이번 영화 에 대한 반응도 전작인 <형사 Duelist> 때와 마찬가지로 양쪽으로 엇갈리는 듯하다. 호의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둘 중 하나. 그 중간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부류와, 영화의 원초적 영역인 이미지와 사운드의 실험적 시도만으로도 즐거움은 충분하다는 양측의 상반되는 입장. 선택은 자유일 것이다. 그건 취향의 문제이며 성향의 문제일 테니까.

평가야 분분할 수 있겠으나, 다만, 이명세의 영화적 ‘형식’과 관련한 구도자적 시도는 사뭇 남다른 구석이 있다. 단순히 그의 영화에 대한 고집에서가 아니라 그가 대중에게 영화적 지각의 다양한 채널을 선사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명세는 자신의 영화에서 ‘내용’을 보지 말 것을 주문하는 이다.(“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의미’야. M자 들어가는 말 중에 제일 싫어하는 단어도 의미 meaning, 메시지 message.”) 물론 영화에서 ‘내용’ 혹은 ‘의미’를 기대하지 말라는 이명세의 주장에는 다소 과한 부분이 없지 않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세헤라자데가 왕에게 매일 밤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사람의 죽은 목숨까지 살려놓지 않던가. 게다가 현대는 ‘이야기’에 목말라 있는 ‘뮈토스’(mythos)의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명세의 일견 독불장군식의 독백이 무게감 있게 들려야할 지점이 있다면, 그가 영화의 표현의 영역을 갱신하고 있거나 적어도 그 같은 노력을 경주함에 아낌이 없다는 연유에서일 것이다.

들뢰즈는 ‘예술은 개념의 창조’ ― 정확하게는, 예술이 아니라 ‘철학’이 개념의 창조라고 말했으나, ‘창조’는 곧 영화를 포함한 예술의 근본적 과제이기도 하므로 ― 라고 말했는데, 이명세가 꼭 그렇다. 표준화되고 규범화되어 화석과도 같이 점점 굳어져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영화적 감각에 그는 일침을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무기한 가사상태에 빠져있는지 모를 현대의 둔탁한 영화적 감각의 갱신이야말로 그의 화두인 셈이다. 게다가 최근 들려온 잉마르 베리만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라는 두 거장의 죽음이, 마치 영화의 ‘상징적’ 죽음에 대한 하나의 징후처럼 보여지기도 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이명세의 이 같은 시도는 어쩌면, 그 시도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어떤 기묘한 울림을 던져주기도 한다.

이명세가 영화 속에서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유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시시각각 ‘영구혁명’을 겪고 있는 기술의 발달이야말로, 디지털 영화의 부상과 함께, 영화적 표현 영역의 확장이라는 목적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기술이 진보하고 있는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 죄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명세를 두고 ‘영화의 근본주의자’란 네임태그를 붙이는 경우를 왕왕 목격한다. 이명세 자신이 인정하기도 했다. ‘근본주의자’라는 용어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이 단어 자체만으로는 어떤 의도로 이명세를 평가하는지를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명세를 가리키는 경우 ‘근본주의자’라는 호칭의 사용은 그 맥락을 살펴보았을 때 대체로 부정적인 쪽에 가까워 보인다. 한 영화주간지의 전문가 평점을 옮겨본다. “미몽(迷夢)은 미혹(迷惑)을 부르고 미망(迷妄)을 키우나니”(박평식). “의미심장하지 않은 스타일의 허망함에 빠지다”(유지나). “미사여구의 M”(김혜리).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 또한 진부할 따름’(김봉석)이라는 의외의 지적도 있다.

이명세는 일종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아전투구식의 ‘외부’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내적’ 싸움이라는 고독한 그것을? 그에게 화두는 ‘영화’(film)와 ‘영화’(movie) 모두를 아우르는, 혹은 그보다 선험적인 ‘영화(Cinema)'다. 이명세는 지금도, 아직까지도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내려놓지 않았다. 어쩌면 그만둘 수도 없을 것이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그런 그의 영화세계와 영화를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다. 좋아하는 이에겐 ‘황홀’(이동진)일 것이고, 싫어하는 이에겐 ‘타인의 취향’이면 그만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이명세에게 ‘엘리트주의자’라는 꼬리표만은 붙이지 마시기를. 엘리트주의자라면 자신이 믿는 확고한 그 어떤 ‘억견’(doxa)이 있을 것이겠으나, 이명세에게 그 같은 투명한 답안지는 없다. 또 어쩌면 그걸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그 답안지를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다만 그는 그 순간을 순수하게 즐기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차라리 그는 저 까마득한 84년 <고래사냥>의 조감독 시절부터 품어온,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탐색을 2007년인 지금까지도 놓고 있지 않는, 외려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 아닐까.

댓글을 달아 주세요

BLOG main image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영화 비평 매거진 '네오이마주'의 공식블로그입니다. 더 많은 글은 http://neoimages.co.kr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by woodyh98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21)
필진 리뷰 (260)
필진 칼럼 (149)
사람과 사람들 (55)
문화와 세상 엿보기 (10)
그리고... (41)

달력

«   2019/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3,158,893
  • 06

네오이마주(neoimages)와 영화 깊게 읽기

woodyh98'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