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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son Wells에 관한 두 개의 노트 ②

필진 리뷰 2009.11.01 14:19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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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석중

숙명론적 미궁- 개인과 세계, 그 내밀한 충돌


세계 영화사 혹은 영화 관련 서적들의 상석에 자리잡은 오손 웰즈의 데뷔작 <시민케인, Citizen Kane>(1941)은 기묘한 예지력으로 가득한 영화다. 마치, 웰즈의 또 다른 작품 <맥베스, Macbeth>(1984)가 이미 미래를 알아버린 인간의 비극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시민 케인>은 웰즈의 그 이후의 삶을 거의 정확하게 예견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사후적 해석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론의 여지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왕 시작한 김에 좀 더 멀리 나가보자면, 웰즈의 지나친 명석함은 자신이 결국 어디에 이르게 될 것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견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웰즈와 스튜디오의 불화, 그럼에도 스튜디오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했던 그의 프로젝트들. RKO의 전폭적인 지지를 통해 만들어진, 연극계의 신동이라 불렸던 젊은 감독의 데뷔작 <시민 케인>. 그리고 그 이후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완만하고 어쩌면 필연적인 하락의 여정들.

거칠게 이야기해서, 웰즈의 영화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개인과 세계의 접경지역, 그 지점들에서 벌어지는 격렬하며 내밀한 마찰과 충돌의 순간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스튜디오의 의도에 맞추어서 만들어 졌다는 <이방인, The Stranger>(1946)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웰즈는 비범한 개인과 그를 둘러싼 세계가 부딪히는 과정을 주의 깊게 보여준다. 나치 전범인 찰스 랜킨 Dr. Charles Rankin / Franz Kindler은 종전 후 미국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중의 자아, 두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세상에 드러나 있고, 또 하나는 자신만이 알고 있다. 어느 날 그에게 전쟁 중의 동료가 찾아온다.

자신이 묻어버린 과거 속의 누군가가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 혹은 과거의 시간을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 이러한 주제와 이야기 구조는 <아카딘 씨, Mr. Arkadin>(1955)에서 더욱 강화되고 반복된다. 숨기와 찾기라는 추적의 형식은 웰즈의 거의 모든 영화들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다. 이러한 모든 사건들은 스크린 속의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계 위에서 벌어진다. 영화사적 맥락에서 웰즈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필름 느와르의 세계를 창시했다. 웰즈의 <악의 손길, Touch of Evil>(1958)은 필름누아르 장르의 완성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나 자신과, 세상이 알고 있는 나 자신 사이의 틈새. 그 사이에 웰즈의 영화들이 존재한다. 그의 영화는 나를 어디에 위치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들을 다룬다. 과연 나는 어디에 존재할 수 있는가? 세계의 광장 한 가운데 인가? 아니면 가장 깊은 자신의 내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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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케인>은 케인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당대의 언론 재벌이자 뉴스의 중심이었던 케인의 사망은 기자들의 관심을 끈다. 그들은 케인이 과연 누구였는지, 그가 마지막으로 남겼다는 ‘로즈버드’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생전에 케인을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들은 케인에 관해 증언하지만, 증언자들의 기억은 케인을 설명하지 못한다. 영화는 친절하게도 로즈버드 라는 이름의 어릴 적 케인이 타고 놀던 눈썰매를 보여주는 것을 끝맺는다. 그러나 이러한 고의적인 드러냄으로 인해 진실에 대한 혼란은 더욱 가중될 뿐이다. 톰슨의 말: ‘그건 퍼즐의 한 조각일 뿐이야.’

종종 웰즈의 인물들은 숙명론에 심취한 고집쟁이처럼 보인다. 웰즈 자신이 직접 연기한 영화 속 인물들은 물론이고, 안소니 퍼킨스가 연기한 <심판, The Trial>(1962)의 주인공 K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모든 정황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명백한 상황에서도 K는 물러서지 않는다. 그에게 세상과의 불화는 이미 준비 되어 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용감하지만 무모한 돈키호테인가? 아니면 현명하지만 비극적인 자살자인가? 기관원들이 흘려버리듯 도망치며 던져 넣는 다이너마이트로 죽음을 맞이하는 K의 모습은 마치 폭사하는 시지푸스 같다.

그러나 웰즈는 인물들을 단순히 영웅적이거나 비극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은 평면적이거나 입체적이라는 단어로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시민 케인>에서 케인의 충복인 번스타인은 전형적인 대중영화 화법의 조연 캐릭터처럼 보인다. 그러나 케인 재단을 운영하는 그의 늙은 모습을 보며 그가 혹시 현명한 광대는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웰즈의 진정한 깊은 심도 deep focus는 공간이 아니라 인물들의 내면 묘사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만들어내는 미장센은 종종 인물들의 내면이 거꾸로 뒤집혀 바깥으로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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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즈의 영화 속 인물들은 '사이의 존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악의 손길>에서 웰즈 자신이 연기한 퀸랜 Hank Quinlan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손에 묻은 피를 씻으려고 강물에 손을 담근다. 그런데 강물에는 오물이 가득하다. 손에 묻은 피를 지울 수는 있겠지만, 정말로 그 손이 깨끗해질 수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런데도 그는 아주 고집스럽게 손을 씻고 또 씻는다. 비대한 몸집을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절룩거리며 걷는 그의 모습은 압도적으로 위압적이지만, 마치 덩치만 커다란 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랜만에 그를 만난 타냐 (무성 영화 시절의 스타 마를렌느 디트리히가 연기했다.)는 그를 보고 '사탕과 초컬릿을 너무 많이 먹어 살이 찐 것 아니냐'고 말한다. 퀸랜이 동료에게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할 때, 그는 마치 심통이 잔뜩 난 젖먹이 아이 같다.

웰즈는 인터뷰를 통해 찰스 포스터 케인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마 그는 이들 모두를 사랑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케인은 이기적이기도 하고 헌신적이기도 하다. 이상주의자이기도 하고 비열한 악당이기도 하며, 매우 위대한 인물인가 하면 별볼일 없는 하찮은 인간이기도 하다. 그를 이야기하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이렇게 다르다. 그는 한 작가의 객관성에 이해 판단되지 않는다."   - 앙드레 바쟁, 『오손 웰즈의 영화미학』 (p.88 현대미학사 1996)

웰즈에게 인간이란 고정된 개념과 말로 설명될 수 있는 단일하고 항상성을 지닌 존재로 이해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평생에 걸친 셰익스피어에 대한 열정에서 우리는 그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재해석 될 수 있었던 생명력은 바로 끊임없는 갈등과 번민의 상황 속에 내 던져지는 인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셰익스피어의 세계 속에서 인물들은 변절자, 제왕, 음모자, 가련한 희생자, 폭군 등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그 나름의 자리에서 아주 격렬한 갈등과 번민을 겪는다. 이들은 마치 아주 짧은 구간을 눈이 볼 수 없는 속도로 왕복 운동을 일으키는 진자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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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즈는 인물들을 숙명론적인 미궁 속으로 던져 넣는다. 그 안에서 갈등과 번민을 겪는 인물들은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제껏 드러나지 않고 있던 자신의 내적 에너지를 길어 올린다. 웰즈에게 비극의 탄생은 곧 인간 존재의 새로운 탄생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희망일까 아니면 정말로 새로운 출발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웰즈라면 둘 모두 가능할 수 있다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무언가 의미가 확실하고 고정된 것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생각하기를 종종 멈춘다. 너무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그저 바라보거나 혹은 방관해도 될 것처럼 생각한다. 웰즈는 바로 이 순간, 진짜와 가짜, 믿음과 의심, 슬픔과 기쁨, 용감함과 무모함, 비천함과 고귀함을 한 자리에 슬쩍 놓아둔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명확하다고 생각될 때 관객은 그저 스크린 밖에 방관자로서 게으르게 남겨진다. 웰즈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따분해서 견디지 못한다는 투로 모든 익숙한 것들을 슬쩍, 장난꾸러기처럼 흔들어 놓는다. 웰즈의 영화는 대단히 전형적인 인물 구도와 이야기 구조를 가졌음에도 흔한 전형성의 인력권을 너무도 가볍게 훌쩍 벗어나 버린다.

웰즈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불가사의한 숙명론적 미궁 저 건너편에서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왕과 협잡꾼, 비천한 거렁뱅이와 위대한 도망자들의 세계 그 안쪽으로 넘어오라고, 그들과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그들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라며 당신에게 낮고 설득력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이 초대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 바로 이 지점에서 웰즈의 영화는 언제나 새롭게, 다시금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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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fungames.im/games/driving/ BlogIcon Driving Games  수정/삭제  댓글쓰기

    예 예 그 일을 사랑

    2012.08.29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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