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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son Wells 에 관한 두 개의 노트

필진 리뷰 2009. 10. 6. 15:37 Posted by woodyh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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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석중


첫 번째 노트 [F For Fake] 

웰스의 데뷔작 <시민 케인>은 기본적으로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스튜디오 작품으로는 마지막인 <거짓과 진실, F for Fake>(1974)역시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엘미르 드 호리 Elmyr de Hory라는 당대의 위작 화가와 그의 전기를 쓴다는 명목으로 호리에게 기생하는 클리포트 어빙 Clifford Irving에 대한 이야기를 축으로 예술의 본질에 대한 농담같은 진단을 시도한다.

개인적으로 페이크 다큐멘터리는 개그의 범주로 넣어두는 편이다. ‘이제부터 나는 당신들을 속이도록 하겠습니다. 어디 한 번 속임수를 간파해 보십시오.’라고 호기 좋게 선언하고 시작되는 것 같은 이런 부류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 예를 들자면 우디 앨렌의 <젤리그, Zelig>(1983)나 마이클 윈터바텀의 <24시간 파티피플, 24 Hour Party People>(2002) 같은 경우를 들 수 있다. 이 영화들을 보면 도저히 같은 시간대에 있을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해서는 시치미 뚝 떼고 연기를 한다. 점잖은 영국식 억양으로 뻔뻔스럽게 관객 앞에서 ‘뻥’을 치는 스티브 쿠건의 모습은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나온다.

<시민 케인>의 앞부분. ‘News on the March’를 보면 ‘아메리칸 쿠빌라이 칸’이라고까지 불리던 찰스 케인이라는 인물의 일대기가 소개된다. 그는 역사 속의 중요한 장면들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심지어 2차 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유럽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도 만난다. 한 술 더 떠 그는 그 둘에게 평화를 역설한다.

세계 영화사의 상석에 오른 <시민 케인>을 둘러싼 지나치게 심각한 가치 평가는 오히려 영화 자체를 관객으로부터 떼어 놓았다. 누구나 <시민 케인>을 알지만, 누구나 <시민 케인>을 눈으로 보지는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다른 영화를 보는 행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물론 심각하게 영화를 보는 것이 나쁜것은 아니다. 그저 개인의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영화를 유희로서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나친 심각함은 영화를 오독할 소지가 크다. 웰스가 할리우드로 입성하는데 어떤 계기가 있어서 가능했는지를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요즘 영화의 홍보 카피로 딱 알맞은 ‘대국민 사기극’을 통해서였다. 영화 <스팅, Sting>(1973)의 트릭은 웰스가 저지른 악동 짓에 비한다면 애교에 불과하다.

웰스는 영화를 하나의 거대한 환영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태도는 <거짓과 진실>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을 마술사로 종종 여기며, 실제로 그는 상당한 마술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위대한 마술사인 후디니의 유명한 경구를 빌어 이렇게 말한다. ‘마술사는 마술을 연기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연기자는 무엇을 연기하는 것일까? 연기자가 진실을 ‘연기’할 때 그것은 진실이 되는가? 반대로, 연기자가 거짓을 연기할 때 그것은 거짓이 되는가? 웰스의 관심사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진짜냐 가짜냐, 혹은 진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보는 이에게 작용하는가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다.

웰스의 통찰력은 결국 영화장치의 속성을 관통한다. 그는 자신의 데뷔작을 거대한 허구와 현실을 오묘하게 엮어 만들어 냈다. 그것은 내용뿐만 아니라 – 케인의 실제 모델이 윌리엄 허스트다, 혹은 하워드 휴즈다 등등의 논란 – 영화의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시민 케인>은 딥포커스(전심초점)를 사용한 좋은 예로 많은 영화 입문서에서 다루어지지만, 사실 그러한 장면들은 대부분 영화적 트릭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웰스가 구축한 것은 전심 초점 공간 그 자체가 아니라 전심 초점 공간의 환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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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object의 어원 Objectum 은 ‘문제’라는 그리스 어에 근원을 둔다. 여기서 ‘주어지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 대상이 아니다. 결국, 던져진 것으로서의 대상은 바로 ‘문제’이다. 대상이란 나 자신(관객)이 끊임없이 사유해야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환영을 본다. 그런데 그 환영은 진실(진짜)이 아니다. 그럼에도, 관객에게 일어나는 반응은 진실(진짜)에 가까운 반응들이다. 여기서 주의. 진실에 ‘가까운’반응이어야만 한다. 이것과 저것이 완벽하게 정합적으로 똑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그리고 여기까지 근접할 때, 같은 것과 같지 않은 것 바로 그 사이에서 영화적인 운동이 발생한다. 여기에서 운동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를 포함한다.

 <시민 케인>도 그렇지만, <거짓과 진실>역시 웰스가 절묘하게 취하고 있는 현실과 허구 사이의 균형 감각을 맛볼 수 있다. 그는 모든 것이 진짜로 있는, 있었던 일인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또 어느 순간에는 어린아이처럼 이 모든 것은 농담일 뿐이라고 한 발 슬쩍 물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순응적으로 영화를 보는 것을 즐기는 관객에게 아마도 이러한 태도는 곤혹스러운 경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짓과 진실>은 기본적으로 즐거운 영화이다. 후반부의 피카소의 에피소드를 보면 (웰스의 오랜 ‘여자친구’라는 오야 코다Oja Kodar) 늘씬한 미녀가 피카소의 창문 앞을 지나간다. 피카소는 말 그대로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녀를 훔쳐본다. 슬쩍 창문을 가려 놓은 블라인드 사이로 이 노화가의 눈이 번득거린다. 그런데 피카소는 실제의 피카소가 아니라 마치 어딘가 잡지 사진에서 오려낸 것 같은, 그의 얼굴을 촬영한 스틸 사진이다. 여기서 웰스는 한 발 더 나간다. 피카소의 표정과 그가 그린 작품들을 병치한다. 피카소 창작의 비밀이 비로소 폭로되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피카소를 닮은 배우나, 또는 피카소를 직접 촬영하는 것보다는 더 좋은 방법이라고 맘대로 결정해 버린 것 같은 이 장면은 정말 익살맞다(어차피 제작비도 없는데. 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마치 ‘이 장면의 피카소가 진짜 본인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이 사람을 피카소라고 생각한다면, 혹은 착각한다면 그걸로 족하다’라고 눙치는 것 같다.

거짓과 진실, 그리고 그 두 개념의 사이, 또는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역학 관계의 끊임없는 변화들. 결국, 이 모든 것들이 던지는 질문인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이렇게 재기 발랄하게, 또한 기술적으로 놀라운 완성도를 통해 보여주는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웰스는 위대한 작가였다. 그리고 (저승에 있는 그가 섭섭하지 않게 이 말을 꼭 넣자) 역사상 가장 대책없는 장난꾸러기였다.  
 
"예술은 진실을 이해하기 위한 거짓말이다." - 오손 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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