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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꿈을 꾼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필진 리뷰 2007. 11. 12. 15:35 Posted by woodyh98


본격적인 영화 얘기에 들어가기 앞서 풀어놓는 잡담 하나. 대략 몇 달쯤 전에 꽤나 특이한 꿈을 꾸었던 적이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꿈 자체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었다. 이제는 무의식의 세계에서조차 더 이상 날지 못하고, 소년 시절의 로망인 거대 로봇도 등장하지 않게 된 이후로 내가 꾸는 꿈은 다 거기서 거기였으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기껏 해봐야 ‘이번 주는 로또나 한번 긁어볼까?’하는 정도의 느낌을 던져 주는 게 전부랄까. 따지고 보면 내가 기억하는 그날의 꿈도 그냥 잠자리가 좀 뒤숭숭했네 정도로 끝낼 수 있는 그런 꿈일 뿐이었다. 하지만 꿈 자체 보다는 깨어난 직후에 남겨진 그 묘한 여운이 그날의 꿈을 아직도 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꿈 속에서 난 누군가와 함께 있었고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비몽사몽 간에 어렴풋하게 의식이 깨어나고 있음을 느끼던 찰나, 꿈 속의 그녀가 내게 말한다. “이제 일어날 시간이네? 잘 가” 참 신기했다. 난 지금까지 꿈을 일종의 무의식적인 두뇌의 활동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꿈 속에서조차 이것이 무의식이고 곧 깨어날 것임을 인지하고 있다면, 거기다 그 안에 속한 허구의 캐릭터조차도 그 속성을 꿰뚫어 보고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의식일까 무의식일까? 이도 저도 아닌 시시껄렁한 몽상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꿈을 매개 삼아 겪어본 실감나는 가상 체험일까? 어쨌든 꿈 속의 그녀가 던진 저 한마디와 함께 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짧지만 깊게 ‘휴우’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신기한 건 잠깐 동안이라도 생각을 하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 뭔가에 홀린 듯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행동이란 사실이다. 물론 연예인도 아니고 내가 알고 지내온 것도 아닌 생면부지의 누군가와 함께 있는 꿈을 꾼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 몇 초 동안이라도 깨어난 뒤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준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잽싸게 일어나서 이불 개고 씻고 출근 준비해야 할 바쁜 아침 시간에 대뜸 내뱉었던 그 짧은 한숨의 의미가 난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것은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고 느껴볼 수도 없는 것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라고 말이다. 이명세의 [M]은 공개되는 것과 동시에 전작인 [형사, Duelist] 이어, 아니 [형사, Duelist] 보다 더욱 드센 논란을 몰고 왔다. 어떤 이는 말한다. 10분이면 될 이야기를 2시간 동안 늘려놨다고. 난 저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바이다.


다만 그 10분을 비판적인 입장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말로 [M]은 딱 10분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이야기가 설명 가능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한 남자가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린다. 잊혀진 옛 추억을 끄집어 내기 위해 희미한 기억들을 헤집는다. 그 와중에 허구인지 실제인지 모를 망상 속을 헤매게 된다. 첫사랑에 대한, 또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첫사랑을 되새기는 이야기는 쎄고 쎘다. 이미 [첫사랑]이라는 영화를 만든 적이 있는 이명세가 재차 동참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첫사랑에 대한 회고담과 판타지를 접할 수 있다. 그러나 첫사랑을 떠올린다는 것은 단지 옛 연인의 얼굴을 떠올린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에 [M]이 곧이곧대로 관습적인 첫사랑의 판타지를 재현시키고자 했다면 드라마 [겨울연가]가 그리했듯이 첫사랑과 꼭 닮은 누군가와 (혹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로 돌아온 옛 연인을) 조우한다는 설정을 끌고 왔으면 될 일이었다. 그것은 곧 시간을 뛰어넘어 완성되는 사랑의 신화를 뜻한다. 하지만 이명세는 그리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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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거와 현재, 의식과 무의식, 실재와 허구 등이 어지럽게 뒤섞인 공간 속에 주인공 민우를 던져 놓고 밑도 끝도 없는 이미지 추적 게임을 벌이듯 제자리를 맴돌고 이곳 저곳을 들쑤시고 다닌다. 이것은 한편으로 봉인되어있던 과거로의 초청장임과 동시에 번뜩이는 찰나의 영감을 위해 공상의 세계를 끝없이 유영해 나가는 여행길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 과정 위에는 단순히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한 노력뿐 아니라 머리 속을 뱅뱅 맴도는 막연한 몽상 덩어리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한 몸부림도 함께 겹쳐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M]은 미지의 대상에 대한 호기심 외에 민우가 봉착한 작가로서의 한계도 전제하고 있었다. 민우는 새로운 소설을 완성하고 작가적 초심을 되찾으려 고민을 하던 와중에 첫사랑의 미스터리와 마주하게 된다. 결국 이 모든 행위의 중심에 자리한 것이 바로 잊혀진 첫사랑이지만 달리 보면 첫사랑이란 작가로서의 자긍심을 회복하고 소설을 완성하겠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다가서기 위한 열쇠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즉, 민우가 찾고자 하는 것은 첫사랑과 그로 인해 촉발되었던 어떤 감정의 총체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란 얘기다.


그렇다면 어느 소설가의 관념 속에서 존재하는 고민과, 정돈되지 않는 자의식에의 탐구를 과연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 것인가? 이야기가 머리 속에서 뱅뱅 맴돌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모르겠다던 민우의 고민은 정말로 같은 곳을 계속해서 뱅뱅 돌고, 어둠 속을 배회하는 것으로 시각화 된다. 어렵고 난해하다며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오지만 따지고 보면 이명세가 고수하는 입장 자체는 한편으로 직접적이며 정직하기까지 하다. [M]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는 비쥬얼로써 혼란에 빠진 인물의 심리상태를 표현하는 영화다. 그리고 이명세의 영상은 ‘내 마음은 저 호수처럼 맑고 잔잔하다’라고 전후 맥락을 맞춘 문법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며 단박에 내지르는 시적 언어에 더욱 가까이 다가 서 있다. 그는 펜 대신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누군가의 내면을, 그 감정의 상태를 계속해서 환기시키며 체험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영화의 근본주의자라는 감독 본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야 없겠지만 분명 [M]은 초기영화의 원초적인 기능과 맞닿아 있는 작품이다. 사운드와 이미지의 충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M]은 초기의 무성영화가 그리 했던 것처럼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보존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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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어떤 상황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것뿐 아니라 어떤 특정의 시절, 더 나아가 그 때의 감정까지도 덩어리 채 씹어 삼키듯, 되새기며 담아내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환된 것이 첫사랑이다. 첫사랑의 본질이란, 결국엔 그것이 두 번 다시 재현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머리 속에서 ‘뱅뱅 돌던’ 의식의 실마리를 찾으려 끊임 없이 같은 곳을 ‘뱅뱅 돌던’ 민우는 마침내 먼 옛날 미미의 집 앞에서 자전거를 끌며 ‘뱅뱅 돌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 내는 것으로 그 원류를 찾아낸다. 하지만 현재의 민우에게 그 때의 풍경이란 직접 개입할 수는 없는, 그저 말없이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몽상 속의 이미지에 불과할 따름이다. 시골 동네임을 감안하더라도 도저히 90년대 중반의 그것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민우의 고향 풍경은 그의 의식 속에서 한껏 미화된 지난 기억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그러나 이명세의 1993년작 [첫사랑]을 연상시키는 세트와 조명은 그 자체로 일생에 단 한번뿐인 그 모습 그대로 박제화 되어버린 어떤 감정의 묶음을 자극하는 열쇠가 되어주고 있다. 이제 그 공간 속에는 김혜수가 연기했던 영신은 없고 유령처럼 떠도는 이연희의 미미가 들어서 있다.


영신이 그토록 가슴 설레며 바라보았던 연극연출가 창욱 역의 송영창은 세상에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중년 사내가 되어 돌아왔다. 그때의 사람들은 떠나고 없거나 이미 변해버렸건만 무의식의 와중에 오롯이 남아있는 풍경만큼은 오래 전 지나쳐온 감정들을 환기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두 번 다시 재현될 수가 없는 것이다. 소녀에서 숙녀가 되어가던 [첫사랑]의 영신은 ‘우앙’하며 터져 나오는 울음과 함께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그 시절을 지나쳐 갈 수 있었지만 이미 성인이 되었고 자의식과의 끝없는 싸움이라는 숙명을 안고 살아가야 할 소설가 민우는 아쉬움 속에서 그 시절을 곱씹을 수 밖에 없다. 미미가 울며 불며 소리쳐도 그것은 꿈 속의 공허한 외침이며 현재를 상처 내서라도 기억되고 싶은 과거의 넋두리에 불과할 뿐이다. 분명 이명세가 화두로 꺼내 올린 첫사랑은 단 10분이면 모든 설명이 끝나는 유아기적 판타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사건과 감정이 남기는 여운이란 시간과 외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첫사랑]이 그러했듯, [M] 또한 찰나의 감정이 지니는 영속성을 담고자 하는 영화이다. [첫사랑]에서 이명세는 봄날의 목련꽃처럼 져버린 그때 그 시절에의 아쉬움을 영원할 수 없기에 더욱 소중한 유한성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 냈었다.


이제 그 업그레이드 확장판이라 할 수 있을 [M]에 이르러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감정들을 마치 주술처럼, 화면 위로 불러내려 한다. 중요한 건 첫사랑과 그에 얽힌 체험만이 아니다. 그 순간에 느꼈을 단 한번의 감정, 그리고 그 이후에 남겨져 있다가 부지불식 간에 떠올라 송곳처럼 마음 속을 헤집고 삐쳐나올 그리움이야말로 [M]을 휘감고 있는 미스터리의 실체인 것이다. 어떤 대상 너머에 있는, 잡을 수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말로썬 제대로 설명조차 되지 않을 그 무엇인가를 담아내려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가장 근본적인 야심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소설 속에 첫사랑을 (정확히는 그 첫사랑의 이미지를) 등장시키고 더 나아가 소통까지 하려 드는 주인공 민우는 분명 영화를 만드는 감독 이명세의 분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에게 영화는 일종의 노스탤지어이며 자신만의 이상한 나라를 향해 떠날 수 있게 하는 요술봉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영화란 그리움에 지친 어느 몽상가에게 허락된 유일한 휴식과 만남의 공간이다. 어느 멋진 날에 내가 꾸었던 꿈과 그 꿈에서 깨어나며 내쉬었던 깊은 한숨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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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soulco.tistory.com BlogIcon 지성의 전당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존재한다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

    2019.02.05 17:28 신고


2007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이명세 감독의 [M]이 공개되었다. 예상대로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형국이고 의외로 비판의 칼을 든 평자들이 많은 듯한데, 비판과 호평의 간극이 워낙 크다보니 관객입장에서는 생각을 정리하는데 적지 않은 곤란을 겪는 듯하다. 그런데 특정 영화에 대하여 비판과 상찬이 동시에 벌어질 때면, 대게의 경우 비판 쪽이 우세승을 거두기 마련이다. 웬만큼 명쾌한 논증을 펼치지 않은 한, 작심하고 비판하는 쪽을 이기기에 어렵기도 하거니와 칭찬보다는 비판의 잣대가 더 엄격하고 자극적이며 현란한 언술을 동원하기 때문이다.

[M]을 둘러싼 많은 논쟁 글을 보면, 대체로 전통적 영화의 재현방식과 서사에 대한 논의가 대종을 이루고 있음에도, 호불호에 대한 명확한 논증이 뒷받침 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 보니, 주로 이야기가 약하다거나 비주얼로 허술한 이야기를 가리려했다 것이 논점으로 부각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쉬운 대목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첫사랑’에 관한 그림을 그린다고 할 때, 피카소처럼 그로테스크하게 그릴 수 도 있고, 장욱진처럼 점묘화법의 동화적 분위기를 낼 수 있으며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 유의 추상적 이미지로 채울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느 것이 더 사실에 가깝게 묘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첫사랑’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있기는 한 것일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이명세의 근작들은 오히려 19세기 영국화가 윌리엄 터너 William Turner의 빛과 색채의 마술에 가깝다. 터너는 일찍이 "내가 눈보라를 그린다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게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장면이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라는 말을 미술학도들에게 남겼다.

이명세는 [M]에서 ‘첫사랑’의 느낌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고, 영화근본주의자라고 기꺼이 천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명세가 비주얼에 목을 매건, 빛과 소리에 천착하건 엄밀히 말하자면 관객이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또한 감독이 영화에 따라 비판의 대상이 되듯이 비평하는 이들 역시 자신의 글로 평가받아야 한다면, 이야기가 없다거나 내러티브가 단조롭다거나 하는 식의 단편적 서술을 비평도구로 사용해서는 곤란하다. 이는 비평가 자신의 비평적 자산이 빈곤하다는 것을 드러낼 따름이다. 구체적이면서 확실한 논거를 제시해야 하고, 전통적 서사에 대한 이해가 있은 후에 영화비판의 도구로 사용할 때 비판은 설득력을 가지게 되고, 누구라도 귀 기울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초기 영화에는 영화적 이야기라는 것이 애초에 있지 않았다.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던 1895년 12월 28일로 돌아가 보면, 뤼미에르 Lumiere 는 그저 ‘시오타 역에 기차가 도착하고’ ‘공장 노동자들이 돌아가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을 찍었을 뿐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이야기도 들어있지 않다. 일상적인 장면을 재현한 것 외에는. 그것은 멜리에스 Georges Melies 가 우연한 순간에 발견한 몽타주를 파악하지 못한 채 마술공연에 사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자면, 재현된 영상이 이야기를 가지지 않았으므로 감독의 연출이 무의미했다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발생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관객들은 달려오는 기차를 피해 허겁지겁 지하 카페를 빠져나가야 했다. 영화적 재현과는 달리 관객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기차가 보이고-나를 향해 돌진할지 모르며-위험한 상황이니-나는 피해야한다)

이렇게 초기 영화는 이야기의 발생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의 완성은 관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즉, 영화는 현실을 재현하는 도구였으나 그 자체에 이야기를 품고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명세가 스스로 근본주의자라고 했던 근간에는 초기영화가 보여준 이야기의 자연발생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내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때문인지 몰라도 [M]에는 운동-이미지가 부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인물들의 행동이 영화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인데, 오히려 이명세는 시간-이미지의 개념을 빌려와 시공간을 해체하고 현실과 꿈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의 영화가 예술임을 증명하려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비평가는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모순, 그러니까 고전영화의 ‘이야기 없음’과 현대영화의 특징인 ‘시간-이미지’의 이종교배가 뒤엉킴으로 인해 발생하는 관객과의 거리감 또는 이질감을 짚어내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 할 수 있다. 결국 [엠]에 대한 비판은, 단순히 비주얼에 집중한 안일한 연출기법을 문제 삼기보다는 감독이 영화를 인지하는 관념자체를 파헤침으로써 보다 본질적 문제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믿는다.

[M]은 빛과 어둠의 공간을 지배하고 분할하는 전지자로서의 이명세의 역할이 확연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꿈의 교차로에 서성거리는 민우와 미미를 만날 수 있는 이 영화에서, 필자는 다른 공간과 확연히 비교되며 몇 차례나 등장하는 일식집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혹자는 일식집 시퀀스가 일종의 맥거핀이 아니냐고 했지만, 그렇지 않다. 민우 일행이 언제나 ‘다금바리’를 주문했던 이 공간에서 [형사 Duelist](2005)가 보여준 농염한 화려함이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투박한 낭만 따위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과 돈과 결혼과 집 같은 일상적 화제가 쉼 없이 부상하는 가운데 민우의 현재상태가 드러날 뿐이다.(이명세는 지독하게도 이 장면에서 조차 목소리를 왜곡시키며 현실감각을 마비시키려 한다)

민우의 아파트와 ‘뤼팡’ bar와는 달리 평범한 조명에 단출한 장식이 전부이면서 오로지 일상적 대화가 오가는 장소인 일식집은, 잡지사 편집장과 은혜 아버지 등을 번갈아 만나 같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동안에도 외적 변화가 없다. 결국 일식집은 민우의 혼란스런 현재를 반영하는 도구이며 시공간이 멈춰버린 현실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곳을 벗어나자마자 엄습해오는 옛사랑의 그림자. 추억. 공포들. 그러므로 이야기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유발시킬 수 있었으며, 단지 잠재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이렇게 영화의 가장 많은 소재로 쓰였던 사랑과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 현실과 꿈이 변주되는 동안 이명세는 가장 보편성에 기댄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려가며 끝없이 빛과 어둠을 관객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관객 각자의 기억과 경험을 떠올려가며 ‘첫사랑’을 완결시켜보라는 듯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가 일부 혹은 다수의 관객에게 불편함을 안겨주고 있다는 점이다. 자의식의 과잉이요 비주얼에 목맨 자기도취 필름이라고 말한다. 충분히 이해 가능한 주장들이다. 대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M]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일까? (다수 관객은) 이야기 발생 가능성조차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무조건 관객의 무지함으로 몰아세울 일 만은 아니다.

빛과 어둠의 조화로움이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과 만나 황홀한 미장센을 만들어낼지라도, 정말로 그! 첫사랑이 애초부터 가공된 것이라면 우리는 이 현실을(아니면 환상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앞서 현실과 맞닿은 장소로써의 일식집을 이야기 했지만, 우리의 현실과 영화 속 세계의 괴리감은 차지하고라도 영화 안에서조차 고의적으로 현실이 왜곡되는 것은 우려할 수준이라 여겨진다.

이명세의 근작들에서 나타나는 일종의 경향들, 이를테면 실재와 가공, 현실과 꿈의 경계를 해체함으로써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방법으로써의 매혹적 영상을 선택한 것을 탓할 마음은 없다. 다만, 영화관을 나와서도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해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관객이 적지 않다면 그것은 명백히 감독의 책임인 것이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를 오랫동안 좋아했던 이들에게 [M]은 현기증을 유발하는 영화임에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세는 영화근본주의자로서의 행보를 더욱 공고히 가속화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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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표현'(expression)이며 '창조'(creation)다.

역시나 이명세 감독의 이번 영화 에 대한 반응도 전작인 <형사 Duelist> 때와 마찬가지로 양쪽으로 엇갈리는 듯하다. 호의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둘 중 하나. 그 중간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통 모르겠다는 부류와, 영화의 원초적 영역인 이미지와 사운드의 실험적 시도만으로도 즐거움은 충분하다는 양측의 상반되는 입장. 선택은 자유일 것이다. 그건 취향의 문제이며 성향의 문제일 테니까.

평가야 분분할 수 있겠으나, 다만, 이명세의 영화적 ‘형식’과 관련한 구도자적 시도는 사뭇 남다른 구석이 있다. 단순히 그의 영화에 대한 고집에서가 아니라 그가 대중에게 영화적 지각의 다양한 채널을 선사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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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는 자신의 영화에서 ‘내용’을 보지 말 것을 주문하는 이다.(“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의미’야. M자 들어가는 말 중에 제일 싫어하는 단어도 의미 meaning, 메시지 message.”) 물론 영화에서 ‘내용’ 혹은 ‘의미’를 기대하지 말라는 이명세의 주장에는 다소 과한 부분이 없지 않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데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세헤라자데가 왕에게 매일 밤 들려주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사람의 죽은 목숨까지 살려놓지 않던가. 게다가 현대는 ‘이야기’에 목말라 있는 ‘뮈토스’(mythos)의 시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명세의 일견 독불장군식의 독백이 무게감 있게 들려야할 지점이 있다면, 그가 영화의 표현의 영역을 갱신하고 있거나 적어도 그 같은 노력을 경주함에 아낌이 없다는 연유에서일 것이다.

들뢰즈는 ‘예술은 개념의 창조’ ― 정확하게는, 예술이 아니라 ‘철학’이 개념의 창조라고 말했으나, ‘창조’는 곧 영화를 포함한 예술의 근본적 과제이기도 하므로 ― 라고 말했는데, 이명세가 꼭 그렇다. 표준화되고 규범화되어 화석과도 같이 점점 굳어져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영화적 감각에 그는 일침을 놓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무기한 가사상태에 빠져있는지 모를 현대의 둔탁한 영화적 감각의 갱신이야말로 그의 화두인 셈이다. 게다가 최근 들려온 잉마르 베리만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라는 두 거장의 죽음이, 마치 영화의 ‘상징적’ 죽음에 대한 하나의 징후처럼 보여지기도 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이명세의 이 같은 시도는 어쩌면, 그 시도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어떤 기묘한 울림을 던져주기도 한다.

이명세가 영화 속에서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유도 그와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시시각각 ‘영구혁명’을 겪고 있는 기술의 발달이야말로, 디지털 영화의 부상과 함께, 영화적 표현 영역의 확장이라는 목적에 더할 나위 없는 기회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기술이 진보하고 있는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건 죄악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이명세를 두고 ‘영화의 근본주의자’란 네임태그를 붙이는 경우를 왕왕 목격한다. 이명세 자신이 인정하기도 했다. ‘근본주의자’라는 용어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이 단어 자체만으로는 어떤 의도로 이명세를 평가하는지를 자세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명세를 가리키는 경우 ‘근본주의자’라는 호칭의 사용은 그 맥락을 살펴보았을 때 대체로 부정적인 쪽에 가까워 보인다. 한 영화주간지의 전문가 평점을 옮겨본다. “미몽(迷夢)은 미혹(迷惑)을 부르고 미망(迷妄)을 키우나니”(박평식). “의미심장하지 않은 스타일의 허망함에 빠지다”(유지나). “미사여구의 M”(김혜리).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 또한 진부할 따름’(김봉석)이라는 의외의 지적도 있다.

이명세는 일종의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아전투구식의 ‘외부’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내적’ 싸움이라는 고독한 그것을? 그에게 화두는 ‘영화’(film)와 ‘영화’(movie) 모두를 아우르는, 혹은 그보다 선험적인 ‘영화(Cinema)'다. 이명세는 지금도, 아직까지도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내려놓지 않았다. 어쩌면 그만둘 수도 없을 것이다. 앞에도 언급했지만 그런 그의 영화세계와 영화를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다. 좋아하는 이에겐 ‘황홀’(이동진)일 것이고, 싫어하는 이에겐 ‘타인의 취향’이면 그만인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이명세에게 ‘엘리트주의자’라는 꼬리표만은 붙이지 마시기를. 엘리트주의자라면 자신이 믿는 확고한 그 어떤 ‘억견’(doxa)이 있을 것이겠으나, 이명세에게 그 같은 투명한 답안지는 없다. 또 어쩌면 그걸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그 답안지를 찾아나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다만 그는 그 순간을 순수하게 즐기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차라리 그는 저 까마득한 84년 <고래사냥>의 조감독 시절부터 품어온,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탐색을 2007년인 지금까지도 놓고 있지 않는, 외려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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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 여성 좀 그만 괴롭혀!

필진 리뷰 2007. 11. 5. 00:38 Posted by woodyh98
  여성을 가학으로 몰아가는 남성 판타지


최근에 나는 많은 편수의 한국 영화를 보지 못했다. 아니, 못 본게 아니라 볼 영화가 없어서 안본 것이지만 최근에 본 <행복>과 <엠>은 정말 형편없었다. 이 영화들을 비판하는데에는 다른 어떠한 관련 지식이나 거창한 수식이 필요없이 그냥 영화적으로 비판하면 된다. 왜 자꾸 말도 안되는 영화들을 글로써 포장하려고 드나? 형편없는 영화를 말이 되게 하기 위해 그 사람은 자꾸만 거짓말을 하거나 말들을 지어낸다. 이것은 그 사람의 영화보기에도 발전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비평가로써의 자격을 제대로 가추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안타까움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특히 이 두 영화가 불편했던 이유는 상업적, 형식적인 과장된 포장에 있어서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여성을 남성적 판타지의 영역 안에 봉인해 버림으로써 자신의 의도를 정당화화려는 영화적 제스추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 영화들에게서 적지 않은 실망과 당혹감을 받았다. 이것이 <행복>에서는 서사적으로, <엠>은 작가적 목적 자체가 결여된 것에서 비롯되는데 우선 <행복>에 짧은 첨언을 해보자. 나는 이미 이 영화에 대해 비교적 긴글을 썼으며, 그 안에 이 영화에 대해 할 수 있는 얘기는 모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진호가 서사를 진행시키는데 있어서 관객이 그것을 알아 차리지 못하도록 교묘히 짜놓은 간교의 기술에 대해 보다 핵심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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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행복>을 보면서 가장 섬뜩했던 순간은 영수가 은희의 유골을 뿌리고 그들이 살던 시골집에서 영수가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마치 속죄의 의미로 은희의 사진을 부여잡고 대성통곡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불편한 것은 그저 장면에서 드러나는 센티멘탈리즘이 아니라, 영수가 마지막 요양원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왜 그전에 그들이 살던 집을 거친 후에 비로소 요양원으로 들어가는가? 라는 점에 있다. 그때 영수 돌아온 그 집은 1년전 그가 떠나기 직전 상태 그대로 유지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은희가 병원에 입원하기 바로 전까지에도 혼자 그 집에서 생활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 일으킨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의아해 하는, 영수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 마치 단죄를 받듯이 철저하게 망가져가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불편한 게 아니라, 영수가 그러는 동안 생략된 은희의 서사는 마치 시골의 단둘이 행복했던 그 집을 죽기 직전 끝까지 영수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그 둘만의 공간을 홀로 지키고 있었을 거라는 잉여를 만들어 내는 순간, 영화가 굉장히 섬뜩해지는 동시에 역겨워지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것을 확인한 후에 비로소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영수를 보여주는 씬의 배치는, 남성의 판타지 안에 여성을 지나치게 도구화시켜버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요양원에 돌아가는 영수의 모습으로 끝내버림으로써 판타지가 실제로 전이하기 이전에 그 세계 자체를 아예 완전히 봉인시켜버리는 굉장히 나쁜 결론을 만들어 낸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행복>은 올해 최악의 한국 영화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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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엠>은 애초부터 영화적 목적 자체가 결여된 영화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을 막을 생각이 없지만 이 영화를 보고 굉장하다, 영화란 매체에 입각한 영화다, 이명세는 대가이다. 라고 말할때 나는 속된 말로 식겁한다. 이것은 영화에 대한 취향이나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얘기이다. <씨네 21>의 김혜리 기자도 지적하였지만 <엠>을 비판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가 너무 뻔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야기를 묻어버리는 이미지의 과잉, 이건 과잉이 아니라 과시한다. 라는 게 맞다.

어떻게 해서든 현란한 영상으로 영화를 채워 넣으려는 과욕, 그리고 그것을 흥이나듯 자랑하는 이명세를 바라보아야 하는 우리의 민망함, 그 민망함을 무마시키기 위해 한다는 얘기가 또 결국은 그 고색창연한 첫사랑에 대한 사연, 여기에는 <행복>과 마찬가지로 남성의 판타지를 유지시키는 방법으로 반드시 여성의 죽음을 거쳐야만 한다는 일종의 가학이 존재하지만 <엠>은 그 보다 더 나아가 한국 남자들이 갖는 첫사랑에 대한 철저한 환상, 자기 연민을 유치함으로 오히려 드러내 놓고 보여줄 때 자신의 영화 안에서 이야기만으로 풀어낼 수 없는, 스스로 창조해낸 그 세계가 실제적 세계라는 믿음을 관객에게 제시하지도 못하는 감독의 무능을 감추려는 안쓰러움이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꿈과 현실이 경계가 불분명하다라는 것은 정확한 논점이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이 영화 안의 세계 자체가 아무런 생기도 없는데 이런 논쟁이 가당키나 한가? 당신은 정말 <엠>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 세계 안에 살아있는 인물들이라고 느껴지는가? 또 그들의 삶이 실제라고 믿어지는가? 그냥 스타들의 육체만 가지고 와서 소리지르고 과장된 제스추어를 한다고 그것에 없던 감정이 생기나?

그렇지 않으면 영화에서 무엇하러 배우들을 데리고 와서 연기를 시키고, 또한 그들의 연기를 무엇때문에 우리는 보는가. 말 그대로 다 그것이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라는 세계 안에 몰입시키기 위해 이제껏 영화라는 매체가 만들어 낸 역사가 아닌가. 왜 이명세는 영화가 만들어 온 역사를 부정하려고 드는가. <엠>이 영화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한테 나는 뭐라고 답해 줘야 하나. 나는 지금 논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두 영화는 영화 자체로도 나쁘지만 그것이 어떤 남성의 판타지를 작용시키고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해 여성을 도구화하고 영화적으로 과장한다는 점은 몹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아예 서사의 기승전결을 포개놓은 곽경택의 <사랑>을 거론한다는 것은 구차한 일이다. 여기에선 (당연히)여성은 죽고 그것에 더해 남자도 기꺼이 그 길을 택한다. 영화에서 주진모의 마지막 제스추어와 그 순간을 붙잡아 두려는 곽경택의 프리즈 프레임, "이 환상에서 깨져버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남자의 저 처절한 몸부림. 이것을 영화 바깥에서 보면 마치 너도 죽고, 나도 죽는 거의 한국 영화의 자멸을 보는 듯 하다.

물론 최근 한국 영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기적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영화계에 중심에 있는 중견감독들의 신작들이 하나같이 전작에 비해 미학적으로 한발짝도 나아가지도 못하고 더군다나 같은 얘기를 비슷하게 변주해 나간다는 점은 관객의 한사람으로 거의 절망적이라 할 만하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더이상 할 얘기가 없다면 나 역시도 그에 대해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이것이 관객을 현혹시키고 또한 그것을 소비하게 만드는 하나의 방편으로 이용한 것이라면 이제 더이상 그들의 새로운 영화를 볼 일은 아마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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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ddd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걸 글이라고..ㅉㅉㅉ

    2007.11.05 14:26
  2. ddd2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게 따진다면 온 세상은 남성을 도구화한 영화로 가득차 있습니다. 남성이란 이유로 그냥 당연시 되는 것들..너무 많지 않습니까.

    2007.11.05 15:33
  3. ddd3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휴.....................................ㅜㅜ
    너무나 소중한 글입니다. 왜 아직 우리 남성 감독들은 케케묵은 여관방 감수성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지.. 답답할 따름이에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심지어 새로운 남성성 모델이라고 매스컴이 그렇게 떠들어대는 강동원이 M에서 사용되는 방식만 봐도 한국 영화계는 여전히 답보중이라는게 아이러니하게 드러나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너무 답답해요..

    2007.11.05 18:00
  4. hdfkg,d  수정/삭제  댓글쓰기

    M에대해선 할 말씀이 없으셔야 할 듯....중요한걸 이해하지도 못하고 글을 쓰다니...ㅠㅠ M에서 강조하고 있는것만 빠뜨리고 얘기를 하고 계시니 저야말로 답답하네요...ㅠㅠ

    2007.11.05 22:18
  5. 흠..  수정/삭제  댓글쓰기

    글에서 언급된 영화를 모두 보지 않은터라 내용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게 없네요..ㅎㅎ 다만 영화를 너무 여성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셔서 많은 남성분들이 불만을 토로하실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별거가지고 다 따진다고 하는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것 같지만 영화든 무엇이든간에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맘에 드네요~
    다만 전체적으로 글이 너무 딱딱하고 어려워서 쉽게 읽히지는 않는군요. 그래서인지 우디님에게 그 영화가 왜그리도 끔찍했는지 공감하기가 힘듭니다. 아..역시 영화를 보지 않아서겠죠?^^;; 아무튼 잘 읽고 갑니다~좋은 글 많이 쓰세요~

    2007.11.06 01:11
    • Favicon of https://neoimages.tistory.com BlogIcon woodyh98  수정/삭제

      제가 쓴 글이 아니지만 대답을 드리자면요, 남성적 시선에 갖힌 판타지에 대한 문제제기를 류태희 필지가 제기한 것이지요. 또 두 영화 다 전작과 미학적으로 발전한 것이 없지 않느냐에 대한 우려이기도 하고요. 말씀하신 대로 다양한 시각 중 하나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네요.

      2007.11.06 03:03 신고
  6. 쩝.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딜가도 패미가 문제구만. 왜 사람과 사람의 일로 보지 않고 남자와 여자로 양분해서 세상을 보지? 이게 흔히 말하는 여자들의 패거리 문화인가? 주인공의 성별이 서로 바뀌었다면 그건 남자에 대한 폭력인가?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이 얼마나 비논리적인가를 보여주는 글.. 페미들은 정말 지겨워 페미야 말로 남녀차별의 원흉이지.

    2007.11.06 01:18
  7. ddd4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 여자라서 공감가고 남자들은 공감이 안가는가보군요. 흠님 댓글읽고 써봅니다. 이 글이 너무 여성적인 시각으로 본다라.. 단지, 영화에서 너무 남성의 판타지만 강조한다는 생각을 쓰는 것만으로 시선이 여성적인건가..? 그것이 패미라는건가? 이게 편견인가? -_-; 나 참.

    2007.11.06 01:21
  8. 쩝.  수정/삭제  댓글쓰기

    마치 이글에 반대하는 의견은 남자라서 그렇다는 원천봉쇄를 하고 있네요. 남성적인 판타지? 이 영화 어떤 부분이 남성적인 판타지인지? 자기를 지고지순으로 사랑하고 기다려주는 여자가 있다는게 남성적인 판타지인가? 만약 지고지순하게 기다려주는 남자였다면 이건 여성적인 판탄지라고 욕할라나? 그냥 자기가 기분나쁘면.. 자기랑 비슷한 사람이면, 자기랑 같은 성이면 즉 손해좀 보는것 같으면 상대성의 판타지이구만.. 그걸 모르고 꼭 남성과 여성으로 이분해서 보는것 그게 페미. 사람과 사람의 일로 보시오.

    2007.11.06 01:38
  9. Kirk  수정/삭제  댓글쓰기

    죄송한데 각종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로 쓰이는 신데렐라 스토리는 여성적인 판타지죠? 쓰레기같은 여성적 판타지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비판할 의향은 없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가치관과 비판의식을 갖든 그건 개인의 자유입니다. 다만, 편협하고 편향적인 시선으로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인 문제로 치부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면 거기서부터 공감을 얻기가 힘듭니다.

    2007.11.06 07:27
  10. 관객  수정/삭제  댓글쓰기

    둘 다 나름 재밌게 본 관객으로서 다소 불쾌하네요. 물론 전 여자.. ㅎㅎ 이 글 쓰신 분은 아마도 여자분이시겠죠?? 이 글은, 같은 여자로 하여금 불쾌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글입니다. 참으로 답답하네요.. 왜 세상을 꼭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서 보시는 건가요?? 그리고 <행복>에서.. 글쎄요.. 전 은희가 그 집에서 혼자 계속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던데요?? 제가 영화를 잘못 본 건가요?? 전, 은희가 그 뒤로 어떻게 살았을까.. 아마도 희망원에 다시 들어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살았던들 그게 무슨 대순가요? 여자, 남자를 떠나서,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인데.. 부디 '여성'의 시각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여성'이 아닌 '우리'로서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때 비로소 남성으로부터도, 또한 같은 여성으로부터도 진정으로 인정 받는 패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2007.11.06 09:52
    • Favicon of https://neoimages.tistory.com BlogIcon woodyh98  수정/삭제

      이 글의 필자는 남자입니다. 페미니스트도 아니고요. 필자가 비판을 하는 건 소재나 주제가 아니라 감독이 영화 안에서 여성을 가둬두기 위하 파놓은 형식들이랍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2007.11.06 20:00 신고
  11. 뭐라는거야  수정/삭제  댓글쓰기

    어떤 영화의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딴지건다는게 말이 되는가?
    어떤 소설의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딴지건다는게 말이 되는가?
    수많은 예술이나 과학 들의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따지는 건 종교주의자들과 님같은 페미들이다.
    예술은 있는 그대로 봐주면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명작도 있고 졸작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당신처럼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비평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예술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2007.11.06 10:25

2007.10.24

(스포일러를 언급할 영화는 아니지만 여하튼 만땅입니다.)

“[M]의 키워드는 백일몽, 일상의 기이함, 그리고 첫사랑의 감성이다”
“관객의 마음은 갈대와 같고 연애 상대와 비슷하다.”

그러니까 이 두 발언은 이명세 감독의 지향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M]이 지향하는 바와 지금, 여기 이명세 감독이 서 있는 지점. 자신만의 키워드를 밀어붙인 극단의 형식 실험과 그 안에서 관객을 끌어안고자 하는 노력들 말이다.

근질거리는 입과 손을 주체 못하고 결론부터 꺼내자면 과잉의 수사학 또는 이미지의 황홀경쯤 되겠다. <형사 Duelist>의 연장선상에서 비주얼리스트로서의 자의식을 한껏 더 뽐냈지만 영화-운동 이미지를 실험했던 그가 이번엔 빛과 어둠을 들고 나왔다.

빛과 어둠? 조명으로 먹고 들어가는 영화의 광학적인 기본 원리 아니냐고? 그렇다. 이명세는 점점 영화 근본주의자로서의 자의식을 공공히 해나가는 중이다. 강동원과 이연희, 공효진을 내세워 지극히 상업적인 홍보 전략을 취하는 이율배반적인 예술 영화를 내놓은 셈이다. 어찌됐건 1시간 50분을 취하게 만드는 잔상들이 쉽사리 떠나지 않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근데 개봉 전까지 일반 시사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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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와 이명세는 이야기 구조를 무시하고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형사 Duelist>, 그의 최근 두 작품 모두 스무 자 사이에서 간단하게 요약 가능하다. < M >도 ‘결혼을 앞두고 첫 사랑의 기억과 마주하는 소설가 민우(강동원)의 백일몽’ 쯤 되겠다.

요약한 스토리와 달리 전통적인 문법으로 < M >을 따라잡기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격이리라. 전작 <형사 Duelist>가 이미지와 운동감을 화면으로 구현하기 위한 목표의 일환으로 조선시대 여형사 남순(하지원)과 범인 슬픈 눈(강동원)의 추적과 사랑이란 대강의 이야기를 드리워 놓은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또 어떤가. 우직한 형사(박중훈)가 말 없는 살인범(안성기)을 쫓아가는 기본 얼개 요소요소에 에피소드별 시퀀스를 채워 넣은 단순한 구조였다. 언뜻 두 영화를 떠올려 보라. 극적 감동이나 이야기의 재미보다 감탄할 만한 이미지와 장면들이 더 선명할테니.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배경으로 한 계단 살인신, 박중훈과 안성기의 철로 옆 격투신, 강동원과 하지원이 달 빛 아래 검투를 벌이던 액션신 말이다.

< M >은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고 또 한 발짝 양보한다. 우선 이명세 감독의 미장센과 빛과 어둠을 스크린으로 투영하는 영화적 실험은 사극이었던 전작보다 진일보 했다. “빛나는 어둠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감독의 의도는 부담스러우리만치 200% 전달되고도 남는다. 남순과 슬픈 눈의 사랑이 생뚱맞았다는 전작과 달리 첫사랑에 기억에 미혹되는 민우의 이야기는 감정이입의 정도는 각자 다를지언정 그 감정의 연원만큼은 분명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 점에 있어 ‘친절한 명세씨’란 별명은 분명 영화와 일치한다.

이명세 감독은 “꿈에서 깨어나기 전 빛나는 어둠의 상태”를 그리고 싶었단다. < M >에서 꿈은 그 시작이요 출발이다. 민우를 쫒는 미미의 나레이션과 미스테리가 꿈인지 현실인지, 루팡바에서 미미를 만나는 것이 실제인지 환상인지는 중요치 않다. 민우는 아침이면 언제나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깨어 일어나고, 여지없이 어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다, 이건 첫사랑에 관한 ‘백일몽’이다.

이를 관객에게 체험케 하는 것은 몽환적이고 황홀한 비주얼이다. ‘빛과 어둠’을 구현하는 홍경표 촬영감독의 카메라와 최철수 조명감독의 빛은 고전 느와르 영화를 21세기에 버전업 시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야말로 매혹적이다. 또 한 낮의 거리 장면도 자신의 장기인 세트에서 처리한 이명세 감독만의 감각은 영화가 빛의 예술이라는 걸 다시 한번 인지시킬 만한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다.

그럼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 M >의 구석구석을 요리조리 뜯어보자. 전작이 <지독한 사랑>과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사극으로 찍었다라면 은 ‘괴로운 남자’가 유령 소녀와의 ‘첫사랑’을 경유해 히치콕 이전의 고전 느와르로 빚어낸 백일몽이다. (여기서 이 백일몽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이 백일몽은 비주얼리스트 이명세답게 지극히도 인공적이고 인위적인 디제시스와 조명으로 수놓은 꿈이다.

이명세 감독이 친절히 달아놓은 주석인 세 키워드를 가슴 속 깊이 받아들이고 체험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를 홀리는 비주얼이 계속 시신경을 자극하지만 가슴까지 전달되는 감흥으로 받아들일 관객들이 얼마나 될까. 확실히 < M >은 고수들의 영화이거나 영화에서 내러티브란 아무 상관없다고 솔직히 고백할 관객들의 영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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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첫사랑. 아무리 곱씹어 봐도 < M >은 재앙과도 같았던 흥행 실패작 <첫사랑>의 부연이거나 14년 뒤 이야기다. 기술적 업그레이드거니와 미미의 시점에서 보자면 <사랑과 영혼>과도 같다.

구닥다리 미용실, 빙글빙글 도는 자전거, 극장과 바닷가, 처음으로 손을 잡을 때의 미세한 떨림까지. 2007년 이연희의 미미는 1993년 김혜수의 영신에 다름 아니다. 순수한 소년, 소녀가 처음으로 사로잡힌 사랑이라는 감정을 잡아낸 그 떨리는 순간. 구체적 현실은 거세한 채 향수로 가득 찬 이 회상신은 어쩌면 촌스러울 정도로 정화된 정서를 세련된 영상 언어로 구현해 내는 이명세의 영화관과 맞닿아 있다.

현실을 탈색시킨 노스탤지아의 공간으로서의 플래쉬백. 학교를 찾아가 기억을 떠올린 오대수처럼 민우는 고등학교 동창의 결혼식 뒷풀이에서 미미를 떠올린다. 그리고 재현되는 <첫사랑>의 오버랩. 연극반 강사는 소설가가 됐고 미대 1학년생이던 영신은 구천을 떠돌다 민우에게 찾아온 소녀 미미로 남았다.

그러니까 기억을 되새김질 하는 민우의 혼돈, 그 꿈과 현실의 경계를 관통하고자 하는 < M >의 욕망은 첫사랑으로 귀결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나중에 당신이 아주 많이 많이 슬퍼했으면 좋겠어”라는 미미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이것이 누가 꾸는 꿈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하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경계를 지우고자 하는 작업에서 세 인물의 내레이션이 반복적으로 재생된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혹은 혹시 민우와 함께 있는 ‘그녀’가 민우인지 은혜인지 헷갈리게 촬영됐다고 한들 별 다른 차이가 있을까?

만약 전통적이고 단선적인 내러티브로 읽는다면 이건 결혼을 앞둔 잘나가는 남자의 불안과 강박증에 관한 아주 나이브한 보고서로 볼 수도 있다. 부유하고 아름다운 약혼녀와의 결혼이 왠지 순수했던 ‘첫사랑’의 기억을 훼손하는 것만 같은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에 관한 이명세식 대답. 감정의 원형질의 탐구자답게 이명세가 첫사랑을 다시 불러온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화려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보고나면 허탈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알고 봤더니 결혼직전의 불안을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는 소설가가 창작에 매달리고, 첫사랑을 불러오고, 술을 마셔대는 이유가 <사랑과 영혼> 혹은 <천녀유혼>이었다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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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백일몽. 어찌됐건 이 꿈을 시각화하는 이명세의 비주얼에 대한 감각은 정말이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다. 고전 느와르의 세계에 도착한 꽃미남 강동원의 매력 또한 거부하기 힘들다. 쉴새 없이 등장하는 페이드 인과 페이드 아웃의 효과는 그야말로 관객들 또한 꿈꾸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고, 저속 촬영과 스톱모션 등 현대영화와 이명세 감독이 지속적으로 실험해온 기법들이 빼곡히 스크린을 채운다.

영화의 출발이 미미이며 미미를 쫒는 저승사자가 등장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점 또한 이 백일몽의 아우라에 일조한다. 전체적으로 강렬한 조명의 콘트라스트 또한 세트와 함께 이명세 감독의 장기이자 < M >에서 방점을 찍은 부분 중 하나다. 여름날의 강렬한 빛이 도드라지는 건 어둠이 있어서고 이 빛과 어둠에 대한 강조는 현실과 꿈, 현재와 과거의 대비와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도저히 세트라고 믿어지지 않는 거리신이나 과도할 정도로 어두운 민우의 집은 이러한 분위기를 북돋우는 이명세식 미장센의 결정판이다. 이건 또 ‘미스터리’의 ‘M’을 따왔다는 < M >의 맥거핀 과도 같다. 혼돈과 미스터리의 시각화는 갖가지 촬영 기법과 이 블랙 & 화이트의 강렬한 대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고 화려한 색감으로 운동 이미지를 극대화했던 <형사 Duelist>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어쨌건 압도적 비주얼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기이한 일상. 과장을 좀 섞자면 민우의 절반은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바톤핑크>의 바톤핑크이자 금발 여인을 쫒아 시계탑에 오르는 <현기증>의 제임스 스튜어트다. 여기서 <바톤핑크>에서 붉은색 주조의 화면은 블랙으로 대치하고 타자기는 컴퓨터 자판으로, 또 현기증의 두 여인은 미미와 은혜로 치환하면 흥미로울 법 하다.

어쨌건 민우의 심리상태를 은유하는 과장법은 세 번에 걸쳐 반복되는 일식집 장면으로 대변된다. 원고 독촉을 하는 것이 나인지, 출판사 사장인지, 나를 괴롭히는 것이 나인지 장인인지, 여기에 내가 왔었는지 내가 꿈꾸는 것인지 민우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한 논객은 여기서 ‘장자의 꿈’을 끌어들이는 나이브하고 오독에 가까운 해석을 써내려갔지만 이 장면들은 제목도 그럴싸한 <남자는 괴로워>를 연상시킨다.

초현실주의 작풍의 그림이 걸려 있는 이 일식집 세트는 마침내 세 번째에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이중, 삼중의 화면 구도를 통해 중첩되고 반복되는 민우의 혼란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창작과 결혼직전의 불안감의 엄습은 이명세식 과장 연기법을 나름대로 소화해낸 강동원의 새로운 연기 덕에 더욱 더 도드라져 보인다. 그리고 연결 장면으로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와 함께 ‘블랙아웃(필름 끊김)’ 현상을 겪은 민우를 잡아냄으로서 꿈인지 현실인지의 모호함을 강조한다. 과연 민우는 미미와의 뒤늦은 추격전과 로맨스, 그리고 은혜와의 일상을 모두 공유하기는 한 걸까? 뭐, 세 사람의 꿈이어도 상관없다는 듯 영화는 흘러가지만 말이다.

역시 중요한 건 이 모든 질문에 해답은 중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저 우리는 비주얼리스 이명세의 전적으로 시각적인 텍스트에 초대된 손님일 뿐이다. 영상으로 느끼면 그 만일뿐. 소화불량에라도 걸릴 것 마냥 과도한 이미지의 황홀경과 형식 실험을 통해 그 혼란함과 신경증, 그리고 첫사랑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대리체험하면 되는 것이다.

촬영과 조명, 사운드의 삼위일체를 완성한 < M >은 그러나 그 끝에 도달하고 나면 왠지 모르게 허무해 진다. 첫사랑에 대한 회상에 젖거나 고단한 현실을 둘러볼 여유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내러티브는 액션의 실험을 거쳐 기이한 로맨스로 마무리했던 <형사>보다 친절해졌지만 이미지의 황홀경으로 빈약한 알맹이를 가릴 수는 없어 보인다.

어차피 글 초반에 이명세는 근본주의자라고 밝힌 바 있다. <디워>가 800만 관객을 긁어 모으는 나라에서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고답적인 주장을 펼칠 생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M >은 매혹은 될지언정 감동이나 충격을 전해주는 성질의 작품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90년대 초반, 이명세의 비주얼은 리얼리즘에 경도된 충무로 지형도에서 기술적으로는 촌스러울지언정 분명 새로웠다. 그러나 갈수록 이명세의 영화에는 점점 사람 냄새가 나지 않는다. 사람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이 빈약해진 자리를 차지한 화려한 ‘어떻게’가 소화불량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과연 이미지에의 경도와 실험이 과연 어떤 영화적인 ‘무엇을’에 복무했는지에 대한 문제제기 말이다. “시나리오를 쓸 때 항상 관객이 우선이다. 우직하게 당신을 사랑한다고 연애편지를 꾸준히 쓸 뿐”이라는 이명세 감독의 발언은 어쩌면 의도된 수사이거나 순결한 근본중자의 구애일 것이다. 또 팬으로서 그의 영화에 대한 애정에는 감탄하고 차기작을 평생 기다릴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만의 인공적인 세계에서 헤어 나올 생각이 없는 이명세 감독의 행보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기 보다는 우려의 감정이 드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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