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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2'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9.12.15 2009 서독제 장편초청작 <경계도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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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원

홍형숙 <경계도시2>

2003년에 제작된 이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 영화로서의 형식에 대한 논의를 하기엔 우선적으로 껄끄러운 지점이 있다. 영화가 소재주의에 함몰된 경향을 운운할 수는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가 소재로 삼은 대상에 대한 무지, 즉 송두율 개인에 대한 삶을 언론을 통해서 보도 받은 대로 알고 믿고 있었던 역사적, 정치적 무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의 부끄러움을 사실 스스로도 숨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국내의 독립 다큐멘터리 운동의 시작이 된 공동체 중 하나인 서울영상집단에서 영화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적으로 사회 정치적인 운동으로서의 다큐를 만들어오는 홍형숙 감독은 이 영화의 카메라를 여러 사람에게 옮겨 다니면서 찍게 한다(촬영자만 5-6명은 되었던 것 같다). 그녀가 카메라를 들지 않았을 때는 스스로 카메라에 등장해보이기도 한다. 여러 사람이 든 카메라에 담기는, 이 영화의 소재이자 주제인 송두율의 모습은 어떤 함축적 경계를 두고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감독의 관찰자적 내레이션이,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송두율의 말보다 더 신뢰가 가는 광화문 전광판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헤드라인이, 그가 검찰에 출두할 때만 쫓아다니는(즉 국내에서 주로 이루어진 그의 학술활동 등엔 관심이 전무하다시피 한) 기자들의 무식한 폭력에 가까운 취재 행태가 그를 계속 경계선 위로 몰아세우는 느낌을 준다.


송두율의 통일철학에 대한 핵심론은 변두리로 몰려나고 그의 배후 세력 캐기에 온통 집중하는 이 나라의 주류 언론들은 그를 정치인이나 연예인의 가십거리에 열 올리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서 대한다. 당시엔 진실처럼 우리 위를 군림했던 이들의 명제와도 같은 주장들은 1년도 채 안되어 거짓임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당시 진실로 받아들였던 자신의 기억에 보다 절대적인 우위를 둔다. 송두율이 구속되는 이미지가 남았을 뿐, 그가 무죄가 되어 언론과 그로 인해 좌우지되던 남한 사회를 향해 가했던 일침을 제대로 본 사람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문 것이다. 게다가 그가 독일로 결국 돌아간 것, 남한 사회에서의 통일 관련 일을 접은 사실은 거의 아는 사람만 아는 일이 된 것이다.


송두율은 남한으로의 귀국을 결심했을 때 어차피 스스로는 경계인이기 때문에 국내의 어느 정도 부정적인 반응을 예상했겠지만 그것은 예상보다 훨씬 대단한 것이었다. 남한에서 사상적 경계선은 곧 회색지대나 다름없다. 대한민국의 경계엔 군사적 긴장(군인과 철조망)만이 흐른다. 그 곳은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다. 그 곳은 이 나라에서 가장 위험한 지대이다. 자신의 identity에 대한 질문에 가장 먼저 nationality(대한민국 국민임)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만큼 우리는 한반도 경계선의 남쪽을 '내부(자아)'로, 북쪽을 '외부(타자)'로 인식한다. 우리는 이 경계의 '안'에 속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그런데 밖에 소속된 자가 신분을 버젓이 유지한 채 이 안에 오려고 한다. 안과 밖을 평화적으로 통일하자며,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자고 한다. 이것은 우리의 identity의 존재적 근거를 위협하는 자의 그러한 발언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 나라의 국경선을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원이다. 우리에게 이 나라의 정체성은 비판적이던 친화적이던 우리의 영원한 소재이자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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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2>에서는 송두율에 대해 친화적이던 비친화적이던 누구나가 훈수를 두려고 한다. 사람들은 개인 철학자 송두율 교수를 마치 사회의 대안적인 영역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그 자체의 존재에 대한 찬반을 표명하는 것처럼 군다. 철학자 세미나를 마친 리셉션 자리에서 대표적 보수인사인 한홍이 송두율에게 건배를 제의하며 '당신 피엔 예수의 피가 흐른다.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다. 사오로가 바오로가 됐듯이 당신도…….' 운운하고(이날 한홍은 거의 전향을 선언했다?), 송두율의 귀국 후 긴박하게 돌아가던 검찰 수사에 대한 비대위에 모인 사람들은 '당신은 어떤 사람이다', '대한민국은 당신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당신은 이처럼 행동해야만 한다'고 끊임없이 제의하고 주장한다. 송두율은 거의 침묵으로 일관한다. 사실 관계를 묻는 질문(자신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임을 북한 방문 전에 알았는가에 대한 문제 등)에도 헛갈리는 대답들을 내놓는다. 37년 만에 밟은 고향 땅에서 송두율은 스스로의 identity로 여겼던 borderer에 대해 근본적인 위협을 받는다. 이 나라엔 '대한민국 국민'과 '북조선 인민'만이 존재한다(외국인 노동자와 탈북자, 교포2세들의 문제도 여전히 있겠지만 그들의 출신이 어디든 이 '고귀한' 땅을 선택한 이상 엄연히 이전의 사상을 버리고 대한민국 헌법 사상으로 전향한 사람이다). 그것의 선택은 자유이다. 다만 제3의 변수는 없다.


송두율은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버지의 땅을 밟고 싶어 했다. 그리고 민족주체철학자로서, 남과 북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경계인으로서 고국을 방문해야만 했다. 남한이 보수 세력의 집권에 눌려있을 시절 북한에서의 활동이 있었고 2000년 들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그는 이 화해적인 분위기에 힘입어 더 늦기 전에 남한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 학자의 철학적 소신에 따른 행동적 실천은 국가 전체의 이데올로기를 뒤흔드는 일대 혼란적인 이슈가 된다. '당신이 무엇이기에 남한에 와서 스스로를 'borderer'로 말하느냐?', '북한 노동당원이 국내 간첩으로 대대적으로 귀화하는 뻔한 공작에 우리가 또 속을 것 같으냐?' 언론과 여론은 하나가 되어 송두율의 남한 귀국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이 기회에 우리가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모든 이데올로기적 근거들을 쏟아내며 이 나라의 border를 또 한 번 단체적으로 그려나가는데 집중하기 시작한다. 송두율은 어떤 사람이냐를 이야기하는 것은 곧 송두율은 '대한민국'에서 어떤 사람이냐를 말하는 것과 같아진다. 세계적으로 그는 유명한 주체철학자이자 민족평화운동에 앞장서는 지식인인데 이 나라에선 노동당에 가입된 북한 공작원 김철수로서 당연히 분리조치(구속수감)되거나 추방되어야할 사람일 뿐이다.


송두율은 이 같은 남한 사회에 대해 할 말을 잊은 듯 사람들의 훈수와 인터뷰 요청에도 거의 어떠한 제스처도 하지 않다가 기자회견을 통해 결국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국내 귀화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대한민국 헌법을 따라서 북한에서 편향된 활동을 한 점을 사과하고 사법처리 되어야할 부분은 엄중하게 받겠다는 것이다.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하던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는 이 '대국민 사과'에 진정성이 부족했다는 여론의 채찍을 맞고 수차례의 검찰 조사를 더 받은 후 결국 구속 수감된다. 송두율은 2003년 귀국 시점부터 신문과 뉴스의 톱을 장식하며 일대 이슈 메이커가 되었지만 스스로의 반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부로 밀려났다. 그가 구속된 바로 그 시점부터 언론과 여론은 일제히 그에게서 관심을 접는다. 몇 개월 후 항소심에서 승리하고, 노동당원으로서 활동한 적이 없음을 확인받아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이미 사람들의 관심밖에 멀어진 후의 일이었다. 그 당시 우리의 반응과 대처는 옳았고, 송두율은 국내에서 사상 검증을 받은 후 감옥에 갔었던 사건으로 기억돼있을 뿐이다.


전편의 <경계도시>가 송두율이 국내 귀국을 시도하다 좌절된 사건을 그의 베를린에서의 일상적인 모습들과 함께 스케치하며 마치 일기같은 형식으로서 기록했다면 <경계도시2>는 본격적인 국내 다큐멘터리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 한다. 영화는 정치적 민감함을 건들인 개인, 그 집단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개인의 모습을 철저하게 따라가며 사회적 활동가의 기록물로서 우리에게 전달된다. 영화는 당시 KBS에서 제작 방영한 송두율 관련 다큐의 편파성 논란으로 인해 KBS사장까지 해임되는 사건을 보여주면서 이에 따라 <경계도시2>영화를 TV 방송분으로 내보내려했던 계획을 접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린다. 국영 방송이 허용하는 미디어 활동과 영화의 다큐멘터리 활동사이의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하지만 2003년에 벌어진 민감한 정치적 상황을 기록한 영화가 2009년에 와 상영(완성)될 수 있었던 것을 본다면 독립 다큐멘터리로가 가진 운동의 한계성도 분명 느껴지는 것이다.

이 당시의 생생한 활동의 영화가 2009년의 지금에 와 과거의 기억과 망각을 사유하는 영화가 된 것은 기획 의도로 보았을 때 좀 아이러니하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송두율의 과거 영상을 끄집어 내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지난 영화를 지금 트는 것이다. 이것은 엄연히 말해 다큐 집단의 다큐멘터리 운동의 일환으로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다. 영화는 생생한 현장을 위험을 무릅쓰고도 쫒으며 가려진 진실의 이면을 드러내고자 애쓰는데 이 지점에서의 감흥은 6년이란 시간이 지나 우리에게 이 시간을 '기억'하는가의 또 다른 화두를 제시하며 그 날의 진실을 알지 못했던 현재의 관객을 반성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한다. 이 지점은 송두율이 석방 후 소회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언론이 '계몽'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자신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는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화의 운동성은 결국 소재적이고 주제적인 것으로부터의 운동성에서 멈추지 않고 시간의 흐름을 지나 형식적인 운동성이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계몽'을 하고 있는 것일까. 현실에서 실패한 운동을 기록한 영화를 뒤늦게 볼 때 이 영화는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필름 위, 우리의 망각, 그 시절에만 군림했던 언론, 혹은 나올 수 없었던 국영 텔레비전 화면 위. 아니면, 2003년의 상상적 스크린. 그도 아니면 그냥 보이는 그대로 2009년의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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